우리는 한 사람이나 그 사상을 평가할 때 시대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현대로 직접 끌어와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평가는 그 시대에서 얼마나 전진 또는 후퇴했느냐 하는 관점에서 해야 한다. 바울로를 산업사회의 척도에서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 그의 주장을 오늘과 직결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우리가 물을 것은 바울로의 투쟁의 일차적 대상이 무엇이었나를 묻고 거기에서 그의 한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로는 이른바 '민중'이 아니었다. 그는 명문 출신이다. 그리고 재산도 있었고 높은 수준의 교육도 받았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 그는 유다인이지만 유다 본토에 살지 않고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자라고 배웠다. 유다인으로서는 유다교의 엘리트인 바리사이파에 속했고, 헬레니즘의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희랍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유다인이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접하고 분노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다적 전통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지만, 그가 그리스도교로 전향했을 때에는 유다교가 잘못된 것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통박할 수 있었다. 그는 그만치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한편 그리스도교인이 된 그는 일약 그리스도교 선교인으로 일선에 나섰는데, 그 현장은 희랍사상이 중추를 이루었으나 알렉산더대왕의 아시아, 유럽 정복에서 생겨난 동서문화의 접촉에서 파생된 헬레니즘이 판을 치는 때였고, 로마 통치하에 있는 그 대상은 유다인이 아니라 유다 밖의 외국인 지대였다. 이처럼 그의 시대는 희랍철학, 그것이 로마를 거치면서 격하하여 대중화된 철학 그리고 희랍, 로마 등의 잡종교 그리고 에집트, 바빌론 등의 신비종교 그리고 이런 것들이 접촉, 혼합해서 새로운 양상으로 형성된 새로운 혼합적 사상풍조, 그중에서도 영지주의(靈知主義)가 판을 치는 시대였다. 여기서 그는 이미 세계에 알려진 유다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 그것도 발생한 지 불과 수년밖에 안 된 그리스도교를 앞세우고 홀로 적진으로 진군하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가 대변하는 그리스도교는 전통이 짧은 탓에 교리도 정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소재인 예수의 전승 그대로는 유다 사회에서도 그리고 헬레니즘 영역에서도 납득되기에는 너무나 모순에 차 있는 그런 것이었다. 유다인에게는 그들의 율법과 그리고 그들의 희망인 메시아상에도 반하며, 헬레니즘에서 볼 때는 너무나 '무사상(無思想)한'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로써 그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느냐에 있었다. 이런 사명을 의식한 그에게 약ᆞ강점이 병존했다.
약점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예수의 목격자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의 직계제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아직 목격자들이 '사도'라는 이름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것은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약점은 예수의 현장, 곧 예수의 관심의 대상은 팔레스틴 농어촌이며 어디까지나 민중이었는데, 바울로의 현장은 헬레니즘 영역의 도시였으며, 그는 무엇보다 지식계의 설득을 일차적 목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역사의 예수)과의 연속성이 약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그가 디아스포라 유다인이기에 본토 유다인들에게서 보이는 폐쇄성에서 떠나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점과 그의 현장인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그의 강점이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가 총력을 기울인 것은 어떻게 역사의 예수를 소개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면 이미 케리그마화한 그리스도를 그가 선 사회의 시대언어로 바꾸어 선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도록 뿌리를 내리게 하느냐에 있었다. 이로써 예수와 바울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팔레스틴의 민중과 더불어 그들의 친구로서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역사의 질적 전환과 그 앞에서 저들의 권리를 의식화시킨 데 대해서,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어떻게 기존문화권에서 공인받도록 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변증적(apologetic) 구원론 내지 그리스도론 전개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선 탈유다화하는 일과 동시에 헬레니즘 영역에서의 토착화가 중요했다.
그런데 이 과제를 수행하는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류층, 즉 민중이 중심이었다. 이 민중은 예수를 따르던 민중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예수의 민중은 농어촌의 민중으로 민족공동체에서 소외된 계층인데 대해서, 고린토의 민중은 도시의 민중으로서 노예 출신, 로마정권에 의해서 추방당해 전전하며 이 지역에 정착하려는 자들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예수의 민중은 계층적으로 완전 소외된 채 자기들끼리 몰래 살거나 다니지만, 고린토의 민중은 다른 계층과 공간적으로 공존해야 할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보다 서로 긴장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이같은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다인, 자유인과 종, 남과 여의 차가 없다든지, 모든 새로운 피조물은 자유하다든지, 한 몸의 지체와 같다는 점 등을 강조하며 화해의 복음을 말하고 사랑의 설교를 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가난한 자, 약한 자, 비천한 자, 즉 민중을 변호하며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그들을 상위에 둔다. 이 점에서 당시의 희랍적 인간평가에 역행한다.
그런데 바울로의 변호의 논리는 민중 자체에 있기 전에 희랍적 가치관과의 싸움의 일환이었다. 가령 그가 희랍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저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며, 희랍인이 숭상하는 지혜에 대해 애초부터 포문을 열고(고전 1, 18 이하), 그같은 범주 안에서 '어리석은 민중'을 변호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관서(특히 마르코)의 민중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마르코는 표류하는 '밖의' 민중을 말하는 데 대해, 바울로는 '안에 들어온' 민중만을 말한다. '안'이란 '그리스도 안'인데 구체적으로는 교회의 일원이 된 민중이다.
또 마르코는 민중을 지도계급과 대립시킨 데 대해서, 바울로에게는 그런 강조점이 없다. 바울로도 강자와 약자,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 등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집단 안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교회라는 집단을 한 몸으로 비유하고 각기의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약하고' '흉하고' '변변치 못 한' 부분을, '귀한 것' '아름다운 것'과 대립시키는 것과 같다. 또 바울로가 '약한 자' '미련한 자' 등을 선택해서 강자, 배운 자를 무력하게 한다고 한 부분도 "약하게 보이는 부분의 지체가 오히려 요긴하다", "흉한 것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민다", "변변치 않은 지체들을 더욱 귀하게 다룬다" 등의 관점과 상통한 데가 있다.
마르코는 정치ᆞ경제적인 체제에서 소외 내지 압박받는 자를 민중으로 본 데 대해서, 바울로에게서는 그 점을 의식화시킨 흔적을 볼 수 없다. 단지 사회적인 측면에서 멸시받는 것을 옹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 자체를 위한 변호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집단을 변호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고 뚜렷한 선언과 신념이 있다. 그것은 세상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하는 층, 권력권에서 밀려난 자 그리고 신분적으로 비천한 자들을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선택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등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본문의 고전 12, 12 이하, 특히 24절). 여기에서 우리는 새 사회를 창조하는 역사의 주역은 바로 민중이라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일 수 있다.
■ 『현존』 제104호, 1979년 9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