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낙원은 어떤 것인가? 하느님이 자연을 창조했다. 우리 이야기에서는 자연은 직접 '…… 되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인간은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만들어야 하는가를 전제하고 만들었다고 구별하여 서술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과 자연 사이에 위치한다.
'하느님과 같은 형상으로'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신론과 구별된 인간론에 묶일 필요는 없다. 인간론에 매여 기본 뜻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과는 달리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자율성! 그것은 선택권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능성의 존재'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한다.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연을 개발하는 노동을 통해 역사를 창조해나감으로써 하느님, 인간,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현실이 낙원이다.
노동은 강제된 행위가 아니다. 노동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으로서 자기 형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며 동시에 역사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즐거운 것이 되는 현실이 낙원인 것이다.
그러면 이 자연에서의 아담―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제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지시에 따라 인간의 인간 됨과 그 할 일을 밝혀보기로 하자.
첫째, '이 땅을 다스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 땅을 경작하라는 말, 즉 노동으로써 역사를 창조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든 곡식, 즉 식물은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동물을 먹으라는 흔적은 없다. 만약 이것에 의미를 준다면 자연 안에 살고 있는 동물마저도 인간의 노동에 의해 사육될 수 있는 현장을 만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자연을 개간하는 일(cultivation),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의 근원이다. 자연에 주어진 가능성을 개발하는 것이 노동이다. 땅의 가능성을 도와서 곡식도 심고 꽃도 가꾸며 나무도 자라게 함으로 스스로도 살며, 자연에도 조화를 줌으로써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일이 바로 노동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은 하느님과 자연,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발달된 물질과 정신, 혹은 육과 영혼,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조화된 혼연일체의 현실만이 있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외부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신학 또는 교회에 의해 무시되어왔다. 그리고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물(物)과 영(靈)을 구분하고, 그리스도교는 영의 세계만을 담당하는 자로 자부함으로써 물의 세계를 방관 내지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서 권력자들에게 인정된 종교귀족으로 등장함으로 노동에 대한 이해를 변질시켰다. 즉 자신들은 이른바 영적인 사실을 다루는 자들로 군림하고, 물질을 다루는 노동을 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천한 자들로 취급받아왔다. 이것은 문화(culture)를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시키고 육체적 노동과 구분한 지식인 상류사회의 행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물과 노동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의 실제적인 주체들을 멸시하는, 한마디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비리가 그리스도교 안에 그대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칼 마르크스 이래로 구체화된 유물론이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상치된 형태로 등장함으로 반마르크시즘의 경향이 물질을 물질주의와 동일시 하게 함으로써 물질을 멸시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물에 대한 책임은 고사하고 아무런 해명이 없는 채 오늘에 이르렀다. 물질에 의해, 물질로써 자신을 지탱하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자세는 노동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노동, 이것은 인류 삶의 기본바탕이었으며, 그것이 산업혁명 즉 기술의 도입으로 기계화에 의한 물질생산 형태로 바뀌면서 불균등한 물질분배, 노동의 변질,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이 강제당하고 착취되며 물질이 강한 자에게 편중됨으로 사회에 구조적 불의가 만연되어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양상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배반되는데도 말이다.
노동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즐거운 행위인 동시에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구체적 행위이다. 이것이 깨지는 것이 바로 실락원의 상태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 전체에 주어진 것과 같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 아담과 이브가 있다. 이것은 바로 성(性)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 이하에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이브는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동반자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남성이 권력과 재력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남존여비의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크게 이용되어왔었다. 남성위주의 인간사회에서는 성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강자의 점유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은 창조행위로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똑같은 두 인격이 자주적으로 만남으로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동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이 구절은 무시되고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라는 것만이 강조되어 왔을까? 이것은 바로 성을 독점하고 그것을 강제하는 관계로 만들어버린 강자 남성들의 죄에서 나온 결과이다.
셋째, 낙원에 있는 모든 곡식과 실과는 인간의 자율권에 맡겨졌으나 '그 가운데 심어진 나무의 실과만은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이다.
금단의 열매! 이것은 무엇이며, 왜 심어졌을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해왔다.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같이 된다는 말에서 그것이 '지혜'를 말한다고 보는가 하면, 그것을 따먹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다는 이야기에서 그것은 '성'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낙원의 한계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독점할 수 없는, 그러므로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는 그것을 일단 '공'(公)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더불어 받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공' 또는 공적인 것이다. 가령 하늘은 공이다. 하늘은 어느 누구도 사유할 수 없다. 땅도 본래는 공이다. 그것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나누어 먹을 수는 있으나 사유화할 수는 없다. 하느님도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어느 누구에게 소유될 수는 없다. 어떤 종파나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으며 독점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공을 침범하면 전체의 질서가 깨진다. 이것이 금단의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그 뜻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노동하는 데는, 즉 역사 창조행위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만 그 노동행위가 개발을 위한 것인지 퇴폐를 위한 것인지 또는 전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개발, 전진하는 것이 선이고 퇴폐, 후퇴하는 것이 악이라 한다면 노동에 의한 창조행위의 결과가 악인지 선인지 식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금단의 열매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역사적 존재가 되려면 한계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은 타율의 상반개념이 아니다. 타자, 즉 '너' 때문에 '나'를 제한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바로 자율적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은 방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금단의 열매는 인간을 역사적 존재가 되게 하는 조건이다.
바로 이것이 낙원이다. 인간은 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독자적 존재로서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낙원이다. 이렇게 사는 삶에는 슬픔, 고통, 부끄러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