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 세계는 닉슨의 중공 방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여론은 기대와 회의로 분분하다. 그는 출발에 앞서 가진 성명에서 그의 이번 방문의 목적은 20년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할 공동의 장소를 찾고, 커다란 대양과 같은 의견차를 좁힘으로써 미래에도 비록 사상적인 차이는 그대로 있겠지만 다른 사상을 갖고도 전쟁에서의 적이 되지 않고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의 내용은 그는 결국 궁극적인 통합 또는 합일에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명의 말미에 단지 일주일 동안에 그 긴 적대관계를 해소하리라는 그런 환상을 갖고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중공은 거의 동시에 대화를 모색한다고 하면서도 옛 동맹국(자유중국)의 희생 위에서 대화의 길을 찾을 수는 없다는 닉슨의 외교성명을 비난하는 글을 냈다. 진정한 만남이 되려면 너와 나의 이해관계를 초월, 흡수할 수 있을 만한, 어떤 더 높은 혹은 더 깊은 차원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의 장소는 북경일 수도 없고, 워싱턴일 수도 없다. 정말 만날 장소는 인류의 참 평화이거나 혹은 휴머니티이거나, 하여간 둘에게 지상의 명령이 되는 어떤 장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자리는 아무도 마련해놓고 있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남북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인 이름으로는 그 대결상태를 도저히 마주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적십자사의 정신을 빌려서 만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 만나는 바탕은 적십자 정신도 판문점도 아니고 민족이어야 한다.
외족과 서로 원수 된 관계에서도 이해 때문에 서로 만나는데, 민족 특히 갈라진 가족이 만나자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누가 시작했든지 간에, 민족적 혈육이라는 그 지상의 명령 앞에 적어도 외적으로나마 굴복해야 할 처지에 있다. 그러나 벌써 19차의 모임과 반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정치적으로 얽힌 횡적 대립관계는 이 민족적인 지상의 명령을 그대로 가로막고 있다.
갈라진 민족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을까? 그 만날 장소는 어디인가? 우리는 피의 힘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도 정치적인 대립을 제거하는 힘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자리가 너의 기득권, 나의 기득권을 뛰어넘어서 만날 수 있는 자리인가? 분명히 우리는 다시 만나 서로 합해야만 살 수 있는데, 이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쇠사슬에서 풀려날 만큼 강한 힘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이기고만 본다면 별문제이지만 모든 관계, 특히 '너와 나'의 인간관계를 잃지 않겠다는 것을 대전제로 한다면 시비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한 쪽이 지고 한 쪽이 이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뒤에는 반드시 복수가 따른다. 하여간 직접적인 대립을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제3의 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개인 안의 갈등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대립되는 두 면이 있어 고민하고 고통을 겪는다. 어느 한 쪽을 억누르면 그 억눌린 부분은 어떤 형태로든지 복수하고 만다. 그 대립을 극복하는 길은 역시 제3의 자리여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인 사고에서는 이 제3의 통합의 자리를 이른바 '정신'이라고 했다. 하여간 대립은 직접적인 대결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통합되는 길은 어느 의미에서는 헤겔이 말하는 이른바 '변증적인 제3의 지점'에서만 가능하다. 정(正)과 반(反)이 맞설 때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지양한 합(合)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종교란 바로 이 제3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