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심각한 대립 속에 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존재성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현실은 괴리와 상반 그리고 부조리로 차 있다. 그래서 고민하고 울고 있다. 이러한 대립은 개개인이나 사회 일반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교회의 내부, 가정의 내부에도 상존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이 없는 듯이 눈을 감을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대립된 상태를 계속할 수도 없다. 이런 마당에서 직선적으로 시비하거나 다툰다면 대립의 해소는 고사하고 결국 피를 보거나, 좌절감을 안고 후퇴하거나, 아니면 이를 갈면서 복수의 때를 기다리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점점 더 절망으로 빠져들게 될 뿐이다. 이것은 정말 무덤을 찾는 여인들의 모습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살 길은 역시 너와 나, 내 안의 대립성에서 해방될 때이며, 그곳에서 다시 통합을 이룰 때이다.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처럼 대결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서로의 구열을 메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실패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고 틈이 난 관계를 완전히 박살내어 버림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길은 더욱 없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칼은 칼로 망한다.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라고 부활한 예수는 말씀한다. 절망 속에서 체념했거나 복수심에서 이를 갈거나 바로 이러한 대결상태에 정착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한다. 갈릴래아,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갈릴래아를 알고 있는가이다. 좌절된 너와 나, 대결하고 있는 너와 나, 그러한 모두를 끌고 갈 장소인 갈릴래아를 우리가 알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부가 갈릴래아를 알고 있는지, 야당이 갈릴래아를 알고 있는지, 위협이나 회유나 돈 따위 말고 정말 새로운 통합의 장소인 갈릴래아를 우리는 알고 있는지, 아니 꼭 찾으려 하고 있는지, 우리의 교계가 갈릴래아를 아는지, 헤어진 교회가 다시 만날 갈릴래아를 알고 있는지, 갈릴래아를 찾고 있는지, 거기 예수가 먼저 가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 초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그러면 오늘 우리의 갈릴래아는 어딘가. 물론 그곳은 팔레스틴의 갈릴래아는 아니다. 갈릴래아는 너와 내가 처음 만난 원점일 수도 있다. 사이가 나빠진 부부에겐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하던 곳, 사이가 벌어진 친구들에겐 서로 마음을 한데 묶어 미래를 맹약하던 곳,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 그리스도교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자리를 갈릴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영을 받기 위해 기대했고 그 영 앞에 함께 복종했다. 참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지양되고 통합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이른바 기도하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분열, 작당하는 일은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말한다.
바울로는 이 갈릴래아를 ἐν χρστω 즉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스도 안'이 헬라인이나 히브리인, 남자나 여자, 상전이나 종 할 것 없이 현실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 간격이 무너지고, 혈연이나 지연마저도 지양되어 통합이 되는 장소이다.
오늘 그리스도교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지상의 과제는 바로 이 갈릴래아, 새로 만날 장소, 온 세계 인간이 새로 만날 장소,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 만날 장소, 인간의 고향인 갈릴래아를 알려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은 결코 피안이 아니라 정말 갈릴래아라 했듯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 위다. 그곳은 분열된 그리스도교인들, 분열된 정치인들, 세계의 국가들, 우정이 금간 친구들,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미래를 지향할 새로운 가치관의 자리일 수도 있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한다. 우리는 그를 부활의 주로 믿는다. 우리가 그의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달리 새로운 통합의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바로 이 예수를 향해서 가고 있다.
■ 『현존』 1972년 2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