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 15).
이것은 예수의 설교를 집약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두 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인 사건으로 '때'(καιρός)가 찼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으로서 도래하는 현실이며, 또 하나는 주관적인 행위로서 회개와 믿음인데, 이 둘은 모두 함께 오고 있는 것에 대한 자세를 뜻한다. 즉 때가 찼고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을 미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회개와 믿는 것은 그것을 희망하는 자가 해야 할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희망한다는 것인가?
'때'(καιρός)란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는 고유한 개념이다. 바울로는 복음서의 예수의 말인 '때'로 번역하면서 카이로스(καιρός)를 대치하는 단어로서 '크로노스'(χρόνος)를 사용했다.
"크로노스(χρόνος)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갈라 4, 4)"
이 '때'(χρόνος)는 지나간 '세계사의 때'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로는 흐르는 시간 자체를 말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측면에서 이해한 이 '세계사의 때'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 카이로스(καιρός)는 궁극적인 완성의 때,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된 때이다. 그것은 영근 때이다. 마치 초목의 씨가 무르익어서 표피를 깨뜨리고 튀어나오는 순간처럼! 이런 순간은 시간과 관계된다. 그러나 시간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 가령 어떤 이가 10년 만에 출옥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10년은 시간의 흐름이며 그것 자체가 출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10년이라는 때가 찼으므로 출옥하게 된 것은 어떤 약속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 스스로 찰 수는 없다. 그 시간을 한 기한으로 설정한 뜻만이 그 '때'를 채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설정한 때(καιρός)이다. 그러나 그의 '때'는 바로 이 역사 안의 한 시점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의 '때'는 이 역사의 때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때가 찼다"는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를 결정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 32)고 한다. 그 '때'는 아버지만이 아는 때이다.
그 '때'는 약속된 때이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라는 말을 하도록 보냄받은 종이 오는 때는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의 상황에 차질을 주는 그런 때이다. 그 때는 돈으로 환산되는 때와는 다르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아홉시, 열두시, 오후 다섯시 그리고 저물었을 때에 일꾼을 불렀다. 그러나 저들에게 지불하는 주인의 뜻은 때에 따라서 사는 인간을 상대로 했으나 그의 임금은 그런 때에 매이지 않았다.
성서의 희망은 바로 이러한 카이로스를 믿는 믿음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 그 '때'는 반드시 온다. 그 '때'는 하느님의 때이다. 그것은 역사 안에 온다. 그러나 역사의 기복에 따라 명멸하는 그런 희망이 아니다. 그 '때'는 불의가 전승의 축제를 울리는 순간에도 올 수 있으며, 모든 투지가 정지되고 절망과 체념만이 지배하는 순간에도 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때'는 인과법칙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것의 허리를 자르면서 올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은 도적같이 올 것"(마태 24, 43)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 : 때가 찼으므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이것은 그 '때'의 내용이다.
예수의 설교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웬일일까? 그것은 그 나라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예수는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르 14, 25)라고 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일면을 암시한다. 그 나라는 철저히 새로운 순수 미래이다. 그 나라는 어떤 형태로나 오늘(의 나라)의 연속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의 단절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다시 포도열매에서 난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을 마시는 현실이다.
하느님 나라가 새로운 순수 현실이라면 인간으로서는 그 나라에 대해 어떤 사변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언어도 그 나라의 현실을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성격과 그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날 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규명해본다면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히 확립되는 현실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직역하면 '하느님의 왕국'이다. '왕국'이란 그 당시의 국가체제를 반영한 것으로서 왕의 절대주권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뜻한다. 이것만으로 그 왕국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 어떻게 지배되는 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하느님의 주권이 확립된 현실임에는 틀림없다.
둘째, 그 나라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데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그리고 남과 북에서 하느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여들 것이다(루가 13, 28~29; 마태 8, 11).
그 나라는 개인의 영혼의 휴식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나라는 공동체적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나라에 대한 설명 중에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현실이라는 암시는 많다(마르 14, 25; 마태 22, 2~4). '식탁을 함께한다'는 것은 유다 전통에서 최대의 기쁨을 표시할 뿐 아니라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계급을 넘어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그 나라는 이 세계의 가치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그 나라는 앞선 자가 뒤서며(루가 13, 30) 이 세계에서 크고 높은 자가 오히려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루가 18, 16; 마태 18, 4).
그 나라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필연적인 조건과 질서로 하고 있는 현실이 아니다. 그 나라의 행복의 기준은 다른 것이다(마태 22, 30; 루가 20, 35).
그 나라에서는 노력이나 공로에 따라서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정의로 삼는 이 세계의 가치관도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그 나라에서도 노력의 대가가 무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아야 된다는 논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의 대가에 의해서 사는 현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사는 은총의 세계이다(포도원 농부의 비유; 마태 20, 13~15).
넷째, 그 나라의 도래는 현실적으로 이 세계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 이 심판은 그 나라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나라가 옴으로써 빚어지는 결과이다.
현재는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이다. 순수 선(善)은 있을 수 없고 악(惡)에 의해서 규정된 선만이 있으며, 의(義)도 불의와의 공존 아래서만 드러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도래는 추수 때처럼 밀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현실이다(마태 13, 24 이하). 그 나라의 도래는 바다에 친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쓸 수 있는 것과 못쓸 것을 가려내는 것과도 같으며(마태 13, 47~49), 양과 염소를 가려내는 것과도 같다(마태 24, 31 이하).
이것은 동시에 인간역사의 결산의 때를 뜻한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4, 14 이하), 악한 종의 비유(마태 18, 23 이하)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간접적으로 드러난 그 나라의 편모일 뿐이고, 그 나라의 내용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이상에서 본 것은 그 나라 자체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기존세계에 대한 부정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들이다.
하느님 주권의 절대성은 바로 인간이 인간을 강권으로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종식을 희망하는 것이며, 그 나라의 공동체성이 역사나 민족을 초월한 전혀 새로운 기준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은 바로 기득권과 이해관계에서 형성된 이 세계의 공동체를 비판한 것이다. 또 어린이를 내세우고 뒤선 자가 앞선다는 것으로 그 나라의 모습을 말한 것은 바로 오늘의 강자와 약자, 치자와 피치자로서 관계와 질서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궁극적인 부정을 뜻한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예수의 비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미래의 세계라면, 그것은 희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여러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로 시작되나 그 내용은 전부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한 서술(Indikativ)은 아니고 오히려 지금, 여기서,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떠해야 할 것인지(Imperativ)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나라를 희망하는 자가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 나라를 피안의 세계로 동경함으로써 이 역사적 현실에서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에 의해서 현재를 어떻게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희망은 인간이 찾아갈 어떤 고지 같은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 유토피아 사상과는 판이하다—그것은 오늘을 사는 동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이 세계를 탈출해서 가는 현실이 아니라, 이 역사의 한복판을 향해 오는(parusia) 현실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계속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그의 희망은 바로 이 역사의 구체적인 구조나 상황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조건 속에 살아가는 힘 또는 지혜의 길로서 회개와 믿음을 강조한다. 회개와 믿음이란 바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계로 향한 사신(使信)이나 그가 이 세계로 온 소명의 내용은 바로 그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