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마르 12, 29~31)이라고 했다. 이것은 가장 옳은 인간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전에 주(註)가 있다. 그것은 "주 우리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인 주이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만을 인간의 주(主)로서 섬기라는 것이다. 이것을 새삼 강조한 것은 그렇지 못한 데서 야기되고 있는 인간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태 6, 24)고 말한다. 그것은 주인이 둘이 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권력이나 그외의 모든 것에도 해당될 것이다. 주인은 오직 한 분뿐이어야만한다. 하느님만이 주인이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 위에 있어서는 안 되는 현실을 말한다. 한 하느님을 주로 섬기는 세계에서는 인간 위에 인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어떤 이름의 절대권도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말한다. 주의 기도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해 달라"(루가 11, 2)는 희망의 기도로 시작된다. 이것도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권자로서 모든 다른 것과는 구별하게 해 달라는 희망이다. 이 땅 위에서는 그의 어름을 빙자한 어떤 법칙도 권력도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비록 하느님의 계명으로 선포된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마르 2, 27)라고선언한다.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 예속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은 하느님만을 주로서 할 때만 가능하다. 예수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 먼저 그 나라를 구(求)하라고 했다(마태 6, 25). 이것은 굶어도, 입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어떤 것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새나 풀도 먹이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일까보냐"(마태 6, 26~31)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먹고 입을 권리는 물론 그 이상의 존엄성을 하느님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인권은 하느님에게만 속해 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마태 6, 29~30)고 한다. 하물며 너희 생명이랴! 그러므로 너희는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 말라고 한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은 바로 어떤 것도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위함이다.
그럴 때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은 하나로 묶여진 것이다. 형제를 네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길은 형제가 나처럼 하느님에 속한 인권을 가진 것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관계는 주종의 관계이거나 인간 둘은 서로의 이용물이 된다. 여기서 왜 예수가 "세상의 통치자들은 강제로 백성을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나 너희들은 서로 섬기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에게 속한 것과 꼭 같이 그도 하느님께 속한 존엄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권은 하느님께 속했기에 그 무엇으로 대치할 수도 없으며 어떤 명분으로도 유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범법자요 죄인으로서 소외시킨 자들도 엄연한 이웃으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가 그런 인간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식탁을 함께하고 저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한 것은 하느님 외에 어떤 인간이나 제도도 저들을 정죄할 권리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비록 아들 됨을 포기하고 집을 나갔던 탕자일지라도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권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맞아들인다. 자기 앞에서 탕자인 동생을 멸시하려던 형의 권리를 아버지는 용납하지 않는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사랑한다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인간 또는 인권이 무엇인지를 밝힌 점이다. 99 대 1이라는 양적인 사고에서는 인간의 존재성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사고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은 99에 대한 1이며 99분의 1의 가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목자는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두고 떠난다. 까닭은 그 한 마리는 '지금' 잃어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잃었다'라는 것은 역사적 구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인류나 인간이라는 보편개념이 아니라 '지금'의 '나' 혹은 '너'라는 인간의 구체적 존재성을 말한다. 사건이 일어난 한 사람! 그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는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나를 요청한다. 나는 그에게 전체로 대해야 한다. 그는 전체, 다수라는 이름 밑에 희생될 수 없는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죄인을 찾아 왔노라'는 뜻을 엿볼 수 있다.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을 양으로 환산하여 비인간화해 버리는 낡은 인간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비결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인간공동체의 질서나 조직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뚜렷한 것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 어린이, 죄인 등에게 그같은 관심을 쏟았다. 말하자면 그 공동체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