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서'라는 말을 쓰므로 성서를 종교적인 내용만 담은 책이라고 얼른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종교와 일반역사 사이의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마치 인간역사와 사회현상을 축소해놓은 그림처럼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사회에 있는 온갖 모순과 갈등은 물론, 희비애락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성'(聖) 자를 붙여 오해를 일으키나 히브리어로 된 본래 단어는 그저 책(biblia)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번역된 이름에 '성' 자가 붙은 탓에 '속'(俗)에 대한 거룩한 내용만 있다고 전제하고 읽어가다가는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성', '속'의 구별이 없습니다.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실들이 수용되어 있는가 하면 인간생활의 원초적인 또는 본능적인 욕구와 행동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영국의 한 작가의 작품이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시비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작품을 변호하는 측에서 만일 그의 작품이 외설이라면 성서는 외설로 가득 찬 문서이니 금지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어느 시기나 사건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에서도 그 양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실락원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타락한 인간사회가 숙청되고 새롭게 열리는 새 역사의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아브라함에게서도 그 양면이 그대로 폭로됩니다. 그는 신의 뜻을 따라 모든 낡은 것을 내동댕이치고 탈출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욕심없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반면, 부족을 이끌고 인근의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전멸시키고 그 전리품을 실어오는 잔인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식까지 바치는 용감한 사람인가 하면, 집안 식구를 이끌고 먼 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아내가 못된 군왕에게 납치되어 능욕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으려고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비겁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는 야곱도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교활한 인간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장자(長子)의 분깃을 뺏기 위해서 형의 굶주림을 이용하는 간교함이라든가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장인의 눈을 속이는 일 따위도 서슴지 않으며,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온갖 간교한 수단을 사양하지 않는 그런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은 이 민족의 해방자 모세에게서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부귀영화의 상징적인 현군이요 구세주나 다름없이 추앙하는 다윗왕 같은 사람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용감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또 잔인하고 비겁한 패륜아적인 인간의 단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패륜행위를 뉘우쳐 밤낮으로 통곡하는가 싶더니 그 패륜의 결과로 태어난 자식인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 더러운 전통을 상속하는 듯한 의구심을 짙게 자아냅니다. 사실상 솔로몬왕은 일면 성전을 짓는 데 몰두할 뿐 아니라 스스로 대사제의 역할도 떠맡지만 삶의 목적을 여자들을 섭렵하는데 둔 듯 세계의 여자들을 후궁으로 끌어모았습니다. 성서의 기록만 봐도 인근 각 나라의 공주들을 후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천여 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온갖 향락에 흠뻑 빠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예언자'라는 특수한 카리스마적 군상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혼(魂)'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기고만장하고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신의 대변자로 왕후장상들을 기갈하는 용감함을 보이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조그마한 일로 물에 빠진 쥐새끼처럼 초라해져서 혼비백산하는 무력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로 추앙받는 엘리야의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신약'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의 직계제자인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무지함과 욕심, 비겁, 배신 따위가 주저없이 폭로되며, 그리스도교를 '세계의 종교'로 승화시킨 바울로의 상(像)도 결코 우리가 그리고 있는 성현(聖賢)의 틀에는 맞지 않는 사람임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일반 '속세'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갈등과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전제를 가진 책이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뿍 담은 책입니다. 필자가 하고픈 말은 이런 사실들을 여기서 나열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서는 종교적인 책'이라는 전제를 버리고 담담한 마음으로 '인간사를 기술한 하나의 책'으로 읽어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