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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대화
요한복음 4, 3-42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순례하시는 평면적인 예수를 볼 수 있는데 대하여 요한복음에서는 한 마리 양을 찾아서 안으로 더듬어 들어가시는 입체적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문은 그런 것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영과 육의 대화, 하늘과 땅이, 하나님과 사람이, 영와 영이 마주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냉대를 당하고 갈릴리의 귀로에 오른 예수는, 시장하고 피곤한 몸을 유다와 갈릴리 중간에 야곱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쉬었다. 제자들은 빵을 구하러 거리로 가고 홀로 계실 때 때마침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그 우물로 나왔다. 목이 갈한 이 나그네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네므로 이 극적 대화와 사건이 전개된 것이다. "물을 좀 달라." 이 말씀은 무슨 이런 대화를 예기하면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생리적으로 목이 마르기 때문에 하신 자연스러운 요청이다. 그런데 이 요청에 대해서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는 냉담한 말씨로 깨끗이 거절했다.

주전 722년 "살곤"이 타민족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혼혈된 이래로 유대 지방인의 교만이 사마리아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터인데 더욱이 한 낯설은 유대 사나이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까지 건넨다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예수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군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는 두번째 말씀을 했다.

벌써 그는 자신의 육체의 목마름을 잊어버리고 그의 목마름을 잊게할 정도로 고갈된 한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병든 자식의 숨가빠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어머니와도 같이, 낚싯대를 응시하는 어부의 눈초리와도 같이, 이제 잃어버렸던 한 양의 고갈함을 들여다 보면서 그 양의 마음의 입을 열어 생수를 마시게 하려고 접근해 들어가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는 이가 누군 줄 알았다면. 애처롭게도 이 여인에게는 그와 대화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볼 눈이 없었다. 그의 무딘 눈에는 그분이 한갓 여행에 지친 지나가는 유대 나그네(사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물(dorea)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땅을 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선물이란 말이 여러 가지로 쓰여져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 여인과 대화하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정말 누군 줄 알았다면 참말로 그에게 그 무엇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을 들을 귀를 그 여인은 갖지 못했다. 그 말을 비웃음거리로밖에 안 들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 보다 더 크니이까?" 분명히 이 여인의 귀에는 그것은 무리한 말로밖에 안 들렸을 것이다. 확실히 사람을 농락하는 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마술사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여인은 야곱을 내세웠다. 그러나 평소에 이 여인에게 조상 야곱이 그렇게 의미가 있거나 자랑스러웠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조상숭배나 조상추도의 모든 의식은 조상을 추모해서거나 그것이 자랑스러워서라기보다는 자기 배경, 자기 보위책으로 선전하려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다. 족보를 캐는 심정이란 대체로 바루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축복을 받아 한 족장이 되었고, 그 이름은 마침내 그 민족과 동일어가 되기까지 위대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분은 그 "보다" 더 크다거나 작다거나하지 않았다. 그 물음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대답한다. 양적으로 비교하려는 여인의 물음에 차원이 다른 것을 말씀한다. "이 물을(야곱이 준)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씀이다. 야곱이 준 물은 여인이 무심코 말한 대로 그와 그의 자손들과 그리고 짐승과 함께 먹는 물이다. 즉 그 물은 개나 돼지와 사람에게 공통한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르다면 사람만이 먹는 고유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분이 주려는 물은 짐승과 함께 먹는 것, 그런 것과 다른, 오직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만이 먹어야 하는 물이다. 야곱이 주는 물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에 속한 것이다. 즉 육체를 위한 것이다. 그런고로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주는 물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다. 즉 영혼을 위한 것이다. 영원한 것 이어서 시간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 말씀은 확실히 여인의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준 것 같다. 물론 그 말씀 자체에서도—비록 그 말대로 믿지 않았다고 해도—호기심을 느꼈을 터이나 그보다 우리는 이 말 밖에 이 장면의 그분에게서 풍기는 어떤 힘, 여인을 보시는 그 눈동자, 거기서 발하는 어떤 힘이라기보다 빛이 그 마음을 녹여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안할 수 없다.

좌우간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말씀은 여인의 시든 마음에 어떤 동경을 일으켰다. 그런 물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은 이 여인의 진심일 것이다. 확실히 이 여인도 이 우물에서 부엌으로 물동이를 이고 드나드는 무의미한 반복을 계속하는 동안 산천이 변하고 청춘이 늙어가는 공허감이 있었으리라. 그도 그 허무를 뚫고 그것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가슴에 서려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 여인은 한갓 유대 사나이로밖에 안 보이던 이 분에게서 행여나 어떤, 자기를 이런 데서 구출할 수 있는 힘이라도 있을까 하는 것은 넌지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염원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그런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를 그런 무의미한 데 비끄러맨 줄은 무엇일까? 그를 무력화하는 병균은 무엇일까?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이 실연한 화제의 변화는 그분의 진단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분은 그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신 것이다. 그것은 곧 정욕이었다. 정욕이 저를 가두어 옴짝 못하게 한 것이다. 정욕이 굵은 고랑쇠가 되어 이 여인을 꽁꽁 비끄러매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진단은 적중했다. 그러나 여인은 당황했다. 곱게 싸두었던 비밀의 아픈 상처에 수술도가 닿은 것이다. 그 비밀은 차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비밀은 슬픈 것이다. 비밀을 안다는 것은 슬픔을 안다는 것이다. 그분이 이 비밀을 알려는 것은 호기심에서거나 폭로를 위해서가 아니며 그 비밀에 참예하자는 것이었다. 즉 그 슬픔을 책임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의 이런 심정을 느낄 마음이 없었다. 거의 본능같이 된 버릇대로, 거의 반응적으로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의사의 진단을 피하려는 미련한 폐병환자와도 같이 이 여인은 그의 수술에 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가는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 손으로 싸맨 베일을 자기 손으로 헤치지는 못한다. 가끔 베일을 헤치는 듯한 참회의 눈물도 보나,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피상적인 것이고 최후의 베일은 언제나 그대로다. 최후의 베일은 남이 벗겨 주는 수밖에 없다. 다른 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역사상 3대 참회록으로 루소와 톨스토이와 어거스틴의 것을 드는 것이 버릇인 듯한데, 어거스틴의 것과 기타의 것은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역시 루소나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제 손으로 벗다 못해 그대로 내버려둔 것이요, 어거스틴의 것은 다른 손에 의해서 벗겨진 적나라한 그대로의 진실성이 있는 것이다.

이 때에 그분은 그 마지막 베일에 손을 대시는 것이다. 수술도를 든 의사와도 같이 이 여인의 마지막 병근을 드러내기를 지체하지 않았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정말 피와 고름이 막 쏟아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도록 다 드러나고 말았다. 이 여인의 썩은 이면이 숨은 비밀이 다 드러나버린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해서 여인의 화제는 갑자기 돌려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의 말을 우리는 그 당황한 장면을 피하고 싶은 간교한 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고상한 발언을 함으로 자기를 그대로 고집해보려고 했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분을 선지자라고 한 것이 그 사실을 시인하는 말이다. 이 여인도 그것을 부인하기까지 양심은 마비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안에 양심이 살아있었다기보다 그분 앞에 그 이상 가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이 질문은 그의 진정한 심원의 발로라고 봄이 좋을 것이다. 이제 그 이상 그 더러운 과거는 말하고 싶지 않고 이제라도 거기서 헤어나올 길은 역시 종교에 있다고 보았는데 종교는 방법 즉 의식에 있다고 보아서 이방법을 그 선지자같은 이에게 묻고 싶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예배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인가는 정말 동양종교의 조상묘지 선택하는 심정과 같다. 그러나 종교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 종교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종교란 어느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참 예배란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참 종교란 의식에 있지 않고 마음의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말 새종교의 계시다. 이 여인은 종교란 자기가 찾아가는 것인 줄 안 데 대해서 그분은 종교란 하나님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 이야말로 복음이다. 하나님이 이제 이같은 창기와 다를 바 없는 비천한 여인에게도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여인의 마음은 이제 어두운 밤을 지나 여명이 오려고 하고 있다. 굳게 닫힌 문고리를 열고 님의 손이 문고리에 닿을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해졌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하는 아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이것은 님을 기다리는 마음의 솔직한 발로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고할 그, 그를 하나님 앞에 세워줄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심정이란 영혼의 상태를 열매에 비긴다면 무르익어 손만 대면 떨어지려는 찰나다. 중보자를 찾는 마음은 심원의 최고 절정의 순간이다. 육체의 고통보다 그 의미를 몰라서 애쓰던 욥은 마침내 저도 모르게 중보자를 불렀는 데 이 중보자를 그리는 심원은 그의 고난의 대가로 주어진 진주인 것이다. 이러한 순간, 이 다 익어 떨어지려는 순간, 문고리를 열고 애타게 기다리는 이 순간을 그분은 놓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그 문을 활짝 열고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하시었다. 이렇게 하므로 손을 내밀어 무르익은 열매를 땄다. 길잃어 헤매면서 한사코 피하다가 더 갈 곳 없어 지친 양에게 손을 내밀어 안은 것이다. 비밀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가리웠던 비밀이 드러났다. 한 양을 구하였다. 한 영의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무심코 심상하게 헛소리같이 말을 주고받던 끝에 언제나 드나들던 이 지루한 우물가에서 그처럼 기다리던 님을 만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이제 이렇게 놀라운 해후에 황홀해진 여인은 그대로 거기 있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전 순간까지는 입으로 대답했으나 그분이 그인 것을 발견했을 때 말로 대답하는 대신 행위로 대답했던 것이다.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증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린 채, 내버린다는 의식도 없이 자기 마을로 뛰어들어갔던 것이다.

이 때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들고 돌아왔다. 선생을 대접하고 싶었다. 자기들이 배고팠던 것처럼 선생도 배고팠을 것을 짐작한 그들은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권했다.

그러나 선생의 대답은 의외였다. "내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느니라." 이 무슨 말인지 제자들은 몰랐다. 그들이 누가 선생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나 보다고 상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저들은 조금 전까지 배고팠던 것이 이제 떡을 먹으므로 힘을 얻은 구체적인 실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먹는 양식은 진정으로 달랐다. 사람은 짐승과 더불어 먹는 물과 음식이 있다. 그러나 정말 사람만이 먹을 양식이 따로 있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에게서는 관념적인 말만이 아니었고 곧 그의 생태였다. 주는 실상은 당초에 요청하던 목 축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쉴 새도 없이 한 영을 찾아 고된 여행을 계속한 것이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못 마신 그가 배고픔을 잊었다는 것은 역시 제자들은 모르는 양식이 주는 힘이다. 당신은 이 양식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양식이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생명은 빵에 속한 것이다. 생명은 숨쉬는 것이다. 참된 숨통은 폐에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 가지의 생명이 그 줄기에 있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실상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삶의 원리인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사랑함에 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요한1 4, 8). 방금 주님은 이 뜻을 이룬 것이다. 한 미로에서 헤매는 양을 찾아 일으키는 사랑의 수고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거리에 나가서 육체의 떡을 사먹을 때 당신은 이 생명의 양식을 먹은 것이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은 그의 눈은 육체의 양식만 먹은 제자들은 전혀 볼 수 없는 전경을 보고 환호를 올리는 것이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삶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그의 눈 앞에는 무르익어 고개를 늘어뜨린 곧 낫을 대어 추수하게 된 곡식이 황금 물결치는 전답이 보인 것이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날아드는 낙엽 하나를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알며 뜰 앞에 선 나뭇가지의 열매 하나만 맛보아도 교외에 나가지 않아도 무르익은 과수원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열매를 따서 맛을 본 주가 이제 그 뒤에 무르익어 낫을 기다리는 곡식밭을 전망한 것은 그의 생태로 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하게 되리라는 것은 제자들의 배를 불린 그 떡을 만드는 곡식밭의 상태나, 주의 먹은 양식의 밭은 방금 누르러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보신 그대로여서 여인이 들어가서 증거하는 말에 움직인 사마리아인들은 이 농부의 낫을 청하여 그의 손에 다 걷히었던 것이다.

(1954. 7. 『야성』)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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