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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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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는 자와 거두는 자
감사절에 부쳐
요한복음 4.31-38

이 본문은 예수와 제자의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둘 사이의 뚜렷한 격차를 볼 수 있다. 첫째는 삶의 거침에 대한 이해의 격차가 있다. 제자들이 음식을 잡수라고 할 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한 입장에서 "누가 잡술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고 하신다.

둘째, 때에 관한 판단의 격차다. 제자들(사람들)은 아직 넉 달이 돼야 추수할 때가 온다고 본 데 대해서 예수는 지금이 이미 추수할 때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무엇 다음에 …"라는 자연적 과정에서 삶이나 역사의 계기를 본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생을 자연의 순서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서 본다. 그것은 종말적인 관찰이다.

셋째, 제자들은 추수하는 것, 성과, 성공, 즉 내 손으로 심은 것을 내 손으로 거둘 때의 기쁨만을 안다. 그러나 예수는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고 그런데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심은 것은 내 손으로 거두는 기쁨에 대해서 내가 심은 것을 거두는 다른 이의 기쁨을 함께하는 기쁨을 말한다. 이로써 마침내 중요한 사실을 알린다.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했다. 수고는 남들이 했는데 너희는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내 삶이 어떤 것 위에 세워졌으며 또한 내 삶에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거두는 기쁨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희랍의 견유학파들은 행복이 삶의 목표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기쁨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행복하고 기쁜 것인가? 농부는 일 년 내의 수고의 결실로서 무르익은 곡식에 낫을 댈 때, 장사하는 사람은 자본과 노력을 바친 결과 돈이 자기 손에 들어올 때, 정치인은 노력의 대가로 권력이 자기 손에 들어 올 때이다. 반면에 슬프다는 것은 제가 심은 곡식을 제 손으로 추수하지 못할 때, 장사하는 자는 들인 자본과 노력의 대가가 자기 손에 안 들어올 때, 정치가는 그의 공들인 것에 안주할 수 없을 때다. 즉 내가 심은 것, 내가 노력한 것만큼의 추수를 제 손으로 할 수 있을 때 기쁘고 그렇지 못할 때 슬프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쁨은 이기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결국은 영업하는 자의 품목 이상의 의미는 없고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소유의 기쁨뿐이고 <더불어>의 기쁨은 없는 홀로의 기쁨이다. 그 생태는 거미의 그것과 같다. 거미는 제 몸에서 나온 액체로 거미 줄을 치고, 그것에 걸리는 것을 <추수>하는 목적에서 산다. 이런 인간에게는 엄밀한 뜻에서 친구도 사랑도 있을 수 없다. 까닭은 모든 사람을 자기 수확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가 거두는 것은 자기의 공로의 대가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기가 목표하고 계획한 것이 맞아 떨어진 것뿐이다. 그의 오늘의 처지, 오늘의 수확, 오늘의 성공은 결국 자기 공로, 제 덕[德(得)]의 결과다. 제가 한 것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기쁨이 있을까? 따라서 그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이 없다. 내 수고의 대가인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이런 사람에게 은총이니, 선물이니 하는 따위의 개념은 전혀 무의미하다. 제가 한 일의 대가인데 은혜는 무엇이며 감사는 무엇인가? 그런데 감사하는 심정이 없는데 기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참 기쁨은 삶의 감격에서 온다. 삶의 감격은 은총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것은 우연이요, 해우일 때, 즉 주어진 것이라고 할 때 와지는 것이다. 한 농부가 추수를 하여 증축한 곳간에 양식을 쌓아놓고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누가 12, 19)고 한다. 여기서 '즐긴다'(eufraino)는 것은 먹고 마신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기쁨(kara)이 아니라 향락이다. 삶의 환희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그 삶이 그 소유를 떠날 때는 곧 사라질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부자를 어리석다고 한다.

주는 자의 기쁨

거두어들이는 기쁨에 대해서 내주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심는 자의 기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내주는 기쁨을 갖는다. 참 부모는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하여 자라나는 자식을 보는 기쁨에 산다. 이것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의 기쁨이다. "씨뿌리는 이와 거두는 이가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kara)이다.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데는 <너>의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거기는 단독만이 있다. 이에 대해서 내가 심은 것을 네가 거두는 것을 기뻐하는 데는 심고 거두는 자체보다 <너>를 만난 공존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기만하는 데서 오는 기쁨만은 아니다.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했다. 수고는 남들이 했는데 너희는 수고하지 않고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 내 삶, 나의 소유는 내가 심지 않은 것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받았다. 내가 여기 있음은 나를 있게 한 이가 따로 있다. 그는 나를 추수하도록 심어 주었다. 나는 이것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여기서 나의 기쁨은 받은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은 <너>와의 공존의 삶의 환희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 삶 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뜻하지 않은 것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내 심은 것을 거두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요, 선물이다.

그는 받았다는 기쁨에서 심는다. 심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받았다는 기쁨의 응답이다. 그는 거두는 기쁨을 목표로 심는 것을 권리로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심는 일을 자기할 일의 전부로 안다. 그는 심는 일 자체에서 거두는 자의 기쁨을 동시에 누린다. 내가 심는 것을 누군가가 거두리라는 기쁨에서 그는 심기만 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추수의 때만이 있다. 그 앞에서 언제나 낫을 대야 할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친다. 4개월 후가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 내 앞에 추수한 것으로 차 있다. 까닭은 그에게 추수하는 일과 거두는 일이 구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전설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꽃들이 전국에 퍼지게 된 것은 이름을 감춘 사람들이 꽃나무 뿌리나 씨를 안고 다니면서 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무명의 사람들은 그저 심고 사라졌다. 그들은 후에 누군가 그것을 보며 기뻐할 것을 앞당겨 보면서 수확의 기쁨으로 심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묘목을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언덕, 길가에 심어 두어 행인들이 쉬고 갈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갔으며 어떤 이들은 돌들을 굴려 놓아 이름 모를 행객의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홀홀히 사라졌다. 그런 이들은 모두 자기가 받은 생의 감격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자기가 못 볼 남의 기쁨을 앞당겨 자기 것으로 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시골길을 가다가 느티나무 그늘에 무심히 앉아 쉬고 그대로 떠나는 자에게는 삶의 환희가 없다. 그러나 누가 나를 위해 여기 느티나무를 심어 주었나를 묻는 이, 거기서 이름 모르나 나를 위해 심고 떠난 그 마음씨, 그 손길을 느낀다면 그는 홀로이면서 공존의 기쁨을 경험할 것이다. 오늘 도시문명의 혜택에서 사람들은 삶의 감격을 느끼지 못한다. 까닭은 그 편리한 용기들에 내가 낸 세금이 포함됐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오늘을 있게 한 숨은 뜻이 있으며 손길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더욱이 그것이 철저한 익명으로 되어졌을 때 그는 마침내 하나님과의 공존을 경험한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내 가진 것 중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삶의 기쁨과 동시에 감사가 따른다.

더불어 사는 기쁨

나는 당신이 심은 것을 거두고, 내 심은 것은 당신이 거두고! 여기 기쁨으로 찬 삶의 원리가 있다. 한 가정이나 한 공동체 또는 한 민족의 역사에 이런 것이 없으면 발전도 기쁨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정치제도, 경제제도, 심지어 교회에서까지도 내가 심은 것은 반드시 내가 거두되 십억 배라도 수확해야 하겠다는 데서 사막화되고 있다. 모두 공로의식에 차 있다. 그래서 내 것, 내 권리만 주장하다 마침내 거두려는 자만 있고 심는 자가 줄어든다. 내일은 없고 오늘만이 있다. 그래서 일확천금의 사기꾼이 범람하며 오늘 심고 오늘 거두려는 전시적 정치와 권력 남용이 판을 친다. 심는 것보다는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건설을 한다는 소리는 높아도 가졌던 것마저 갉아먹는 쇠퇴의 경사를 내달릴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생리가 범람하여 내일 죽더라도 오늘 나는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으리라는 심는 자의 기쁨을 바보로 간주하는 풍토로 전락했다. 잘사는 것은 내 덕이요, 못 사는 것은 너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자기보다 우세한 것은 침해자로 보여 경멸만하고 못 가진 자는 심을 생각보다 남을 원망하는 일에 겨를이 없다. 그래서 불신의 풍조는 날로 조장되고 국민은 알알이 흩어졌다.

우리의 목표는 <잘산다>는 것이 슬로건으로 되어 있다. 백억 수출 천불 소득이라는 표어가 민족의 이념처럼 내세워졌다. 그 같은 경제성장의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설명이 없다. 경제 성장의 열매를 누가 따먹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고려가 없다. 잘산다는 것은 제가 심는 것의 수십 배, 수백 배의 수확을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상태 이상일 수는 없다. 이러한 경쟁장에서는 기득권자가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점점 가난해지고 부한 자는 점점 부해진다. 이 마당에 기쁨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오늘의 풍요사회의 부유층은 과거의 어떤 유토피아의 환상에서 그리던 각 개인의 여건보다 이상의 상태를 구비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기쁘지는 않다. 까닭은 단 한 가지 문제 때문이다. 그것은 <더불어>의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풍요한 것에 안주하고 즐기기에는 수탈당한 가난한 계층들의 아우성과 원망의 소리가 너무 크다. 저들의 불법이 나의 삶을 침범해서 암영을 던진다. 이래서 담장을 점점 높여, 마침내 스스로 쌓아올린 성벽 안에 외롭다. <잘 산다>를 소유와 직결시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를 사막화한다. 잘 사는 것은 <더불어>살 수 있는 여건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는 공존의 원리다. 잘산다는 것은 너를 위해 심어 줄 수 있는 상태다.

(1974. 11.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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