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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먹어라
요한복음 6, 34-40
나를 먹어라

예수와의 관계에서 "나를 배우라"과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는 요청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또 하나의 엄청난 요청이 있다. 그것은 "나를 먹어라"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이같은 직설적 용어를 허용할 만한 대목이 계속 반복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 생명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며 누구든지 먹으면 죽지 않는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말씀은 결국 <나를 먹어라>는 뜻이다. 나를 먹으라니? "이 말씀이 귀에 거슬리니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거부반응을 일으킨 제자들에게 있어서처럼, 이 말은 정말 소름끼치는 요청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는 공관서의 수난예고(마가 8, 27-38)와 최후의 만찬 장면의 동기가 복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천 년 전 어느 한때 있었던 사실을 호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현존적(現存的) 관계로 보편화시킨 것이다.

공관서의 "최후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포도주와 떡을 나누어 주면서, "이것은 내 피", "이것은 내 살"이라고 하여 각각 먹고 마시게 했다. 그것이 바로 <나를 먹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내 닥칠 그의 운명, 곧 그의 사형과 연결시켜서 그것을 앞당겨 말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은 굶주린 오천 명에게 떡으로 배불리게 한 기사 다음에 그것을 연결시킨 것이 특이하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는 말에서 암시되듯이 떡에 노예가 되어 <떡만이면> 다라고 하는 인간들에게,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6, 26-27)고 함으로써, 이제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영원한 삶이 되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다시 말하면 <나를 먹어라>고 함으로써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제자들이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그를 떠나가고, 열두 제자마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동요하게 될 때, 예수는 "너희도 나를 버리고…"라는 질문을 한다. 이것은 공관서의 수난예고의 모티브와 상통한다. 공관서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이 고백에 대해서 가부를 말하는 대신 그의 죽음을 예고한다. 이 때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곧 반발한다.

"너희도 나를 버리고 가려느냐?"라는 질문은, 공관서나 요한복음에서 다같이 제자들의 배신과 버림의 예고, 또 그의 최후에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반영한 것이나, 그것 역시 그의 일로서가 아니라 현존의 그의 제자들에게 묻는 물음, 그럴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삼으려는 데 그 뜻이 있다.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의 장면이 따로 없다. 그 대신 12장 27절 아래에 보면 그의 최후의 전야가 아닌 때에 그 기도의 내용과 상통하는 한탄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존의 그리스도인들인 바로 "너희를 위한 것"(12, 30)으로 한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도 최후만찬에 대한 의미를 밝히려는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도록 내가 보여 준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현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길로서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결국 <오늘의 우리>에게 직접하는 말씀이 된다.

먹고 먹히는 역사

사실 먹고 먹히고 하는 것이 자연이며, 세계이며, 또한 역사 아닌가?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 철칙이라면, 인간 또한 먹힐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현장이다.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현실이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 역사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와 "어떻게 먹히느냐"에 있지 그러한 현실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사람이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벌써 먹고 먹히는 현실을 논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反>이 <正>을 먹고, <正>이 다시 <反>을 먹어서 그 다음의 단계에 도달함을 <合>이라고 한다. 모든 문명이란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 먹고 먹히면서 얻어진 소산이다. 오늘의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자동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또는 오늘의 의약품의 효용성을 알아낼 때까지 얼마나 먹고 먹히는 과정이 거듭됐을까! "독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보면 알 게 아니냐" 하는 농담 역시 실은 인간사 형성의 유일한 실험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인간공존을 위해서도 진행되어 왔다. 누가 나와 인류의 적인지, 누가 나와 인류의 친구인지, 어떤 체제가 나를 위한 것인지 나를 노예화한 것인지, 어떤 것을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지, 어떤 집단 또는 어떤 사람에게 공동체의 지도권을 맡기는 것이 옳은지 등을 알기 위해서 사람은 <먹고 먹히는> 모험을 계속해 왔으며, 그러한 실험 과정은 현재에서 아직도 얼마나 더 오래 이어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고뇌한다. 우리는 아직도 식인종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인간을 무엇에겐가 잡아 먹도록 바친 때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점차 짐승으로 대치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잡아 바치는 현실이 종식된 것인가? 오히려 그것은 <정당한 이유>까지 내세워 단번에 수천 수만으로 집단화되기까지 했다. 한 정권이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어버렸으며 한 국가가 군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민족을 먹어버렸으며, 극소수의 일부 계층이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노동력)을 잡아먹었는가? 이같은 현장에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란 바로 먹으려는 힘과 안 먹히려는 저항이 충돌하는 과정이 아닌가. 그러나 결국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존은 이어져 온다.

예수는 <먹이>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먹이>로서 제공하는 것이 된다. 왜?

예수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위해 일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고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과거 인류의 조상들이 모두 먹으면 썩어버릴 양식을 주었다고 거듭 비판한다(요한 6, 32.49.58). 저들의 조상들은 결국 죽을 것을 먹게 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생명의 떡>(요한 6, 35.48.51),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먹이>, 곧 먹으면 죽지 않는(50), 그러므로 영원히 살 수 있는 <먹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마디로 하면 그는 자신을 궁극적인 생명원으로서, 자신을 인류의 <먹이>로서 제공하는 것이다.

한 번 먹으면 다시 굶주리지 않고 죽지 않는 <떡>! 이것은 그날 그날의 양식을 위해 전생을 다 바쳐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최고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 떡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라는 반응은,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말할 때 그 여인에게 나타난 반응과 꼭 같은 것으로서, 삶의 고뇌의 끝없는 반복, 그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삶의 지루함과 허무함에서 몸부림쳐야하는 한계성에서의 탈출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고 한다. 즉 <나를 먹어라>고 한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여기에서 먹으라는 <나>는 "현존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 이것은 <산 채로의 그리스도>를 먹으라는 것이다.

자연은 <먹어야> 생존한다. 인간의 역사도 계속 <먹으므로> 유지해 간다. 예수는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우리가 조상들의 세대에 살고 있었다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데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마태 23, 29-31)고 한다. 이것은 유대(인류)의 지배자들의 역사가 예언자들의 피를 먹고 존속했으며, 인간은 바로 이렇게 의인들을 먹으므로 생존해 왔으며, 저들이 의인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추도하는 것은 실은 의인의 피를 먹고 사는 종족이라고 입증하고 있음을 그대로 폭로 하는 말씀이다. 요컨대 저들은 먹되 언제나 죽여서 먹는다. 산 채로 먹기에는 너무도 비겁하다. 아니 저들은 산 것을 무서워한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면서도, 산 것이 무서워서 죽여 먹는다. 그게 바로 지배층의 인간들이다.

그런데 <나를 먹어라>고 할 때, 예수에게 무엇을 찾아 먹으려고 모인 패들이 뿔뿔이 도망갔다. 이로써 인간상의 정체가 폭로된 셈이다. 먹는 놈, 먹히는 놈 할 것 없이 다 죽은 것들! 먹는 놈은 산 것을 죽여서만 먹게 되고, 또 먹히는 놈도 죽어있기 때문에 먹히는 것이다. 정말 살아 있다면 먹을 놈이 없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바로 먹히는 층에게 한 말임에 틀림없다. 호랑이도 산 사람을 희롱해서 혼을 빼고 정신이 혼수해져야 먹는 것처럼, 사람의 세계에서도 역시 산 사람을 그대로 삼킬 수가 없어 갖은 방법으로 혼을 빼고 정신을 마비시켜 시체 같은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먹이로 삼는다. 그러한 인간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산 채로 먹으라>고한다. 그것은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몸으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들의 대응여하에 따라서 그 의미가 사건화된다.

산 채로 못 먹는 인간

예수를 다른 <종교적> 선구자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규명한다면,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그의 생애의 극적 전환을 드러냈다고 하는 마가복음 8장 31절의 "수난의 예고"에서 그는 "인자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31)이라고 하는데, <배척받는다>로 번역된 ὰποδοκιμάζω는 <버린다> 또는 <쓸모없다>는 뜻인데, 집짓는 사람이 <쓸모없다>고 내버린 돌이라는 대목에서도 이 단어를 쓰고 있다(마가 12, 10).

그는 세상에서 무용지물처럼 버림받았다는 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운명에 대한 이해다. 히브리서는 좀더 극적으로 이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제물에 피를 바쳐진 짐승의 시체와 그 배설물이 성문 밖에 버려진 것과 똑같이, 예수도 성문 밖에 버려진 오물처럼 버림받은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고 한다(13, 10 이하 참조). 사실상 그는 동족(유대인)에게, 이방인(로마인)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최후 절규는 이러한 그의 운명을 포괄한 것으로서 그의 생애는 <버림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다(마가의 해석).

그런데 이것은 인간성, 이 세계성을 폭로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그 벽두에 세상(어둠)이 그를 <이기지 못했다>, 또는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말은 모두 <받아들인다>(λαμβανω)의 상반구로서 결국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 까닭은 이 <세계성> 자체가 그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를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15, 18 이하).

그런데 <나를 먹어라>고 했던 예수는 결국 "너희들도 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너무도 변조된 질문을 한다. 이 말은 열두 제자에게 향한 물음이다. 여기에는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서, 살해되는 시저가 부르터스를 향해서 남긴 마지막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여운이 있다. 왜, 이같은 <뜻밖의> 질문을 던지나? 직접 동기는 "그 때부터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에서 보는 대로, 이미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이제는 열 두 제자마저 서성거리고 있는 형편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버리려는 이유는 "그때부터"(εκ τούτου)란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그때부터>란 예수가 수난의 선언을 한 때부터이다. 이 선언은 바로 <내 피와 살을 먹어라>라는 극렬한 표현이다. 공관서에서는 그의 흘린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을 나누어 주어 먹고 마시게 하므로 새로운 연대관계를 굳히는 듯했는데, 끝말은 변조되어 "'내가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는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이다"고 했다. 그것도 그 제자들이 자기를 버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마가 14, 27 이하 참조). 이 예언과 똑같은 일이 요한복음에는 현재의 사실로서 진행되고 있다.

결국 그의 길은 수난의 길이기 때문에 저들은 그를 버린 것이다. 떠난 무리들은 "이 말씀이 귀에 거슬리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고 했는데 저들에게 이 사실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들에게 "이 말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은 마가복음의 저 예언의 말씀의 단어와 꼭 같은 것이다. 그의 수난에의 결정은 저들에게 <스칸달론>이 되는 것이다. 왜?

못먹으면 버린다

"너희도 나를 버리려느냐?" 이 질문은 예루살렘 도상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과 상통한다. 둘 다 함께 결단을 촉구하는 데서 같으며 어떤 위기 앞에서의 질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단지 서술상으로 공관서는 예수의 물음 후에 그의 수난을 예고하므로 제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순서이고, 요한복음은 수난을 분명히 예고하고 그것에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결단을 권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고백도 둘 다 같으나 선후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두 복음서의 공통점을 추려낸다면, 저들이 예수를 버린 이유가 그를 따르던 목적이 예수 자신의 길과 상반됐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우선 따르는 자들의 동기가 문제이다. 요한복음에는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다(6, 26-27)고 하고, 공관서에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해서였다(마가 8, 33b). <사람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 즉 그의 뜻(계획)에 상반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자리다툼(9, 33 이하)과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과 제자들의 반응(10, 35 이하)의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이 생의 보장, 승리, 영광 등을 위한 데 있다. 저들은 예수를 따르되 자기들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함이었지 그의 길, 그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결단과 그의 갈 길이 분명해지자 저들은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수난에의 결단,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수난을 거치지 않고 그의 <영광>에 참여할 길은 없다. 그러므로 공관서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의 영광의 반열에 참여할 소원을 피력했을 때, "너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내가 받은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가 10, 38)고 했다. 그 잔과 세례는 물론 수난을 상징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를 따르되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뜻을 심화하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그를 <먹음으로> 그와 숙명적인 단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으므로 그의 부활에 참여한다" 또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듯이 그와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내주려는 그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그와의 공동의 숙명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열두 제자를 대표한 베드로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공관서의 그것과 유사한 그리스도 고백을 한다. 그는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생명의 말씀이 자신들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수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를 버리게 된 것이다.

그를 <버렸다>는 것은 그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 대신 지배자들이 그들이 버린 예수를 죽여 먹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 후 비로소 저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빼고 본다면 역시 <산 채로> 먹지 못하고 죽여서 먹었다는 뜻이 된다.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이 역사가 그를 죽여 삼켜버렸다는 말이 된다. 그 다음은 그의 무덤을 단장하고 그의 비석을 세우면서 그를 추모함으로써 또 하나의 역사 안에서 사람으로 살기에 필요한 정신적 양식이 되어야 한다. 그 많은 예언자들의 죽음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를 가둔 무덤이 열리고 그가 부활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역사(인간)가 그를 죽여 삼켰으나 그대로 소화할 수 없어 도로 토해버렸다는 말이 된다. 사도행전의 고백은 "여러분은 그를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2, 23-24)고 한다. 죽였으나 죽이지 못했다는 말도 되고, 삼켰으나 소화할 수 없어 도로 토했다는 뜻도 된다. 예수를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는 산 채로의 그를 먹는 길밖에 없다. 까닭은 그를 죽음이 삼킬 수 없었기 때문에.

산 채로 그를 먹은 자는 그와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를 죽여 먹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떤 것도 땅 위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 이상 무서움이 있을 수 없다. 까닭은 죽음이 최후의 협박의 무기인데, 죽음이 삼킬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자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 그들은 그와 똑같이 <나를 먹어라>고 자신을 내대면서 약육강식의 현장에 뛰어들 것이다.

(1977. 『현존』)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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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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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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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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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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