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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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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예수
고린도후서 13, 4

다윗 왕조적 사가들의 전통 이후로 하느님을 왕으로 표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주권을 "하느님의 왕권", "하느님의 왕국", "이스라엘의 왕", "예루살렘의 왕좌"와 같은 표현이 크게 지배하게 됐다. 그뿐 아니라 왕권주의적 사고는 메시아 표상에까지 영향을 끼치어 메시아는 다윗 왕조의 후예이며 "그의 군림은 다윗의 왕도인 예루살렘에"라는 사고가 유포되었고 메시아는 강자로서 천하에 군림, 호령하며 심판하는 자로서 그리게 됐다.

이러한 왕권적 강자 우위의 사고는 콘스탄틴 이후의 그리스도교 사에서 다시 크게 재수용되어 그리스도가 <왕중의 왕>으로 부각되었으며, 신학은 강자의 이데올로기로 자처하고 교회는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한 구체적 상이 법왕의 위치 규정이며 그가 쓴 삼층으로 된 "왕관"인 것이다.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강한 것이 진리며 약한 것은 죄라는 생각이 유형무형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신은 강자의 신으로서 언제나 초자연적으로 개입해 들어와서 악한 세력을 물리친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뿐 아니라 옳은 자는 하느님의 강한 팔이 승리라는 방법으로 보호, 승화시킨다는 생각이 그리스도인 사이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전지하고 "전능"한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를 자기편으로 시위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사람의 가치 기준인 강약에 매이지 않으며 예수 역시 그 같은 기준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곧 암초에 부딛히게 된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정반대의 그리스도 고백을 한다. "사실 그는(예수)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살아계십니다. "

이 고백은 우리의 자명적인 그리스도관을 흔들어 놓는 말이다.

예수는 전능하나 그 초인성을 "보류"하면서 수난을 자신한 것이라는 생각,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실은 시편을 노래한 것이라는 생각 등이 마태의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26, 53-54)는 서술에 매달리게 하고 있다.(그것은 마가 원문에도 누가에도 없다.) 약하다는 원문은 "어떤 것 앞에서 꼼짝 못한다"(helpless)는 의미 또는 "병들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물리적 힘과 대조되는 뜻만은 아니다.

우리말에도 "사람에 약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등의 표현에서 다른 차원의 약함을 말한다. 그러기에 바울이 "하나님의 약함"이라는 표현(고전 1, 25)을 쓸 수 있다(그것은 비록 다른 것에 액 센트를 주기 위한 서술이긴 하지만).

예수는 약해서 십자가에 처형됐다. 마가의 예수는 이 점에서 분명하다. 그는 유대인들의 막연한 기대를 외면하고 어떤 인간 이상의 능력도 제시하지 못한 채 운명했다. 이 점을 분명히 재확인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기 쉽다.

약하다는 것은 육(sarks)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너희 마음은 원이지만 육은 약하다"(마가 14, 38; 마태 26, 41)는 것이 유대의 상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약하므로 십자가에 꼼짝없이 달렸다는 말은 바로 그가 육체를 지닌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말씀(logos)이 육을 이룬 것이 예수라고 한다(1, 14).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이다. 약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십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약한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약한 그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산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또 쉽게 우리말로 번역된 "권능"을 물리적인 힘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런데 권능이라고 번역한 dynamics의 뜻은 물리적 힘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 번역에서 '힘에 맞도록'이라고 번역된 힘(dynamics)은(마태 25, 15) 능양(能量)이라는 뜻이다. 5를 담당할 능양, 2를 담당할 능양 등이 있는데 그것은 가치 척도가 아닌 것이다. 또는 우리 번역에 "말의 뜻"(고전 14, 11)이라고 된 "뜻"도 dynamics다. 이 번역은 제대로 된 것이다. Dynamics가 "의미"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요는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 패배라는 맥락 속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있다"고 이해해도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다. 요는 이 표현에서도 강자라는 표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하느님은 약해서 죽은 그를 살게 했다는 뜻이 된다.

위에서 예를 든 요한복음의 구절에서도 육이 되어 우리(역사) 안에 계신 그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요한 1, 14)라고 한다. 육은 약하다. 약한 육을 다른 것으로 변화했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것이 아니라 육(약함) 자체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약한 현장, 제 육신의 현장을 떠나서 저 피안에 전능한 하느님의 권능을 기다리는 버릇이 있다. 예수는 역사에 육으로 왔는데 우리는 저 피안에로 도피하느라 예수, 그리고 그에 의해 계시된 하느님을 못 만난다. 유대 지배층이 이 십자가에 약하므로 죽어가는 예수를 외면하고 그를 그 십자가에서 기적적으로 끌어내려 올 힘만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가 저 피안에 승천해서 하느님의 보좌에 앉았다는 왕권주의적 표상 속에서 다시 오늘의 현존하는 그를 외면해 버린다. 우리는 물리적 힘에 의해서 지고 이기는 것에 진정한 승부가 결정된다는 전제에서 울고 웃고 기뻐하기도 하고 절망도 하여 한 걸음 나가서 신의 현존과 부재의 신념의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다. 그 약한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서 현존하며 육이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오늘의 그리스도는 이 역사에서 어떤 형태로나 현존해야 참으로 우리의 구원자일 것이다. 우리는 어딘가에 계시어 우리를 주재하는 하느님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신념을 잃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물리적으로 강한 힘, 왕, 왕권, 절대승리라는 것과 하느님의 현존을 직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를 위시한 약자에 대한 무조건의 축복, 한 걸음 나가서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 속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약자를 위해서 산 이만이 아니다. 아니! 바로 저 약자 속에 현존해 있다. 계속 십자가에 달리면서!

(1981. 6. 20. 『크리스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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