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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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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고난
골로새서 1, 24

골로새서 1장 24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몸으로 채워 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류의 죄를 도말하기에 부족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2장 13-15절에는 분명하게 죄 가운데 죽은 자들(여러분)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렸으며 십자가는 모든 주권과 권위의 무장을 해제한 개선의 사건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채우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비적인 고난의 공동체라고 보고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부족한 고난을 보충한다는 뜻인가? 그러나 어디에도 교회의 수난의 대속의 역할을 한다는 뜻은 없으며 언제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정적인 구원의 사건 임을 강조했다.

우리말의 고난 또는 환란으로 번역된 thlipsis라는 단어는 속죄와 관련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속죄적인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또는 죽음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종말 때의 <메시아의 선풍>의 표상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의 세계 도래가 임박한 종말 때에 우주적인 진통의 때가 온다고 믿었다. 그것을 <메시아 선풍>의 때라고 했다. 이러한 사상은 마가복음 13장 19절에서도 볼 수 있다. 역사의 종국, 새 세계의 도래에는 반드시 고난의 때가 온다. 이것은 바울의 믿음이다. 그는 <세상 끝이 임박한 오늘>에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련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라고 한다(고전 10, 11 이하; 살전 3, 3). 이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한다. 이것은 과거를 청산하는 소극적인 의미의 고난이 아니라 도래를 향해 전진함으로써 당하는 고난이다. 미래를 향할 시 더 받을 고난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을 하나의 숙명처럼 감수하려거나 고행주의자처럼 고난을 위한 고난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 또는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받는 고난을 말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가는 사람에게는 투쟁이 없을 수 없다. 투쟁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너를 위해 사는 사람에게 고난은 당연하다. 고난을 각오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thlipsis)을 당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다"(고후 1, 6)고 한다. 그의 고난은 그가 마주선 지금 여기 있는 너를 위한 것이다. 너를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서 전쟁(War)은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날이 오기까지의 전투(Battle)는 계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이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그의 고난을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후 4, 10) 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빌 3, 10)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저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 고난을 <내 몸으로>라고 한다. 여기서 몸이란 것은 Soma가 아니라 육체(sarks)다. 여러분을 위한, 교회를 위한 고난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이 얼마나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는지는 그가 몇 차례 언급한 데서 볼 수 있다. 위한다는 것은 사념이 아니다. 행동이다. 행동은 어쩔 수 없이 육체적인 수고와 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 그는 22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체의 죽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구체성을 말한다. 너를 위하는 일은 육체적인 아픔과 직결되어 있다. 너를 위한다는 것은 너 대신으로 당한다는 현실이다. 네가 하지 못한 일을 내가 보충하고 네가 수고해야 할 일을 해 주고 네 약점을 보충해 줄 때 너를 위하는 일이다. 바울의 편지는 남을 대신해서 보충해 주는 행위를 여러 번 말하고 있다(고전 16, 17; 빌 2, 30; 살전 3, 40). 바울은 특히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고통을 제 몸에 짊어진 사도로서 자각하고 있다. 바울은 그러나 이 고난을 즐겁다고 한다. 왜? "너"를 위한 사랑의 기쁨인가? 그런 것만이 아니다. 이 기쁨은 그 다음에 내 몸으로 채워간다는 말과 관련이 있다. 채운다(antanapaleroun)는 말은 아직 모자란다는 말이다. 이것은 차는 때(Vollendung)가 올 것을 전제하고 있다. 고난은 무제한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까지다. 그는 독에 물을 채우듯이 너를 위한 고난 속에서 그날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믿고 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처럼, 고난이 차면 그 날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기에 고난을 오히려 즐거워한다. 그는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롬 8, 19; 고후 4, 17 참조)고 한다. 그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새 나라의 여명을 보고 있다. 그의 고난이 그 나라를 앞당기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써 그는 "너"와 더불어 고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1970. 12. 『세계와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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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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