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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십자가의 의미
히브리서 11, 17-19
1

성서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외아들을 사람의 죄를 위해서 희생시켰다고도 하고 또 대속의 제물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같은 표현이 현대인에게 납득될 수 있는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맑시스트 블로브는 다르게 풀이한다. 예수의 죽음은 제물을 요구하는 신, 피에 굶주린 복수의 신에 대한 저항의 행위라고 한다. 그것은 제물을 전제로 하는 낡은 종교관념에서의 해방을 위한 행위라는 뜻이다. 그런가? 그렇더라도 그가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제물이란 낡은 시대의 관념이 빚어낸 무지의 소산인가? 제물이란 모든 관계를 법적(동양으로 하면 인과율적)인 사고와 종교-제의적으로 보는 사고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는 것을 영원한 법칙처럼 전제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초자연적 존재거나 피안적 존재일 경우에 벌을 받거나 빚을 갚을 길을 마련한 것이 종교적 관념으로 된 제의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의식(kult)이 있다. 이른바 비종교적인 현대인은 이런 것을 일소에 붙여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늘 우리의 현실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표현되어 있다.

2

우리가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라고 할 때는 자연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 자연은 언제나 제물을 요구한다. 한 생명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제물을 필요로 한다. 꽃 한 포기가 자라는 데는 대신 썩어야 하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며 새 한 마리가 자라기 위해서 희생되야 하는 곤충들이 있다. 어린 아기가 나서 자라나는 데도 제물 이 요구된다. 어머니의 젖은 바로 그의 피다. 그것은 그 어린 것이 자라기 위해 바쳐야 하는 제물이다. 자식 하나 기르는 것도 부모가 바치는 제물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물질이나 육체적 수고만이 아니다. 자식이 성장하면 아유 없는 반항을 한다.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 없다. 그는 부모의 옳은 뜻을 거역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 그럴 때 부모는 내가 이로써 이 자식을 잃느냐, 아니면 옳다고 확신하는 자기의 지적, 감정적 판단, 아니 양심마저도 포기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 경우 끝끝내 시비를 가리면 자식과의 관계에 균열이 온다. 그래서 대개의 부모는 자기 양심적 판단이나 주장을 포기한다. 이런 경우에도 희생의 제물이 있다. 우리는 가끔 신문광고란에 "XX아 모든 것을 네 뜻대로 할테니 귀가해라—아버지"라는 구절을 본다. 자식이 뛰쳐나갈 때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대립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막상 떠난 후 그 아버지는 애정에 못 이겨 결국 자기신념이나 주장을 포기하고 너를 위해서는 개, 돼지도 될 작정이라고 결심했으리라. 거기도 제물이 있다. 그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남과 남이 일생을 함께 지내는 이 관계에서 생기는 충돌은 거의 운명적이다. 그런데 그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어느 쪽인가가 희생의 제물을 바쳐서 가능하다.

이것은 개인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을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내맡겨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삶의 목표를 세운다. 목표를 세우면 거기 선택이 따른다. 선택은 흑과 백처럼 뚜렷하게 갈라진 상황이 아니라 그런 것이 마구 뒤섞인 둘 또는 셋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한다. 그럴 때 그는 다른 쪽의 것을 포기, 즉 희생해야 한다.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이것도-저것도"라는 욕심은 허용되지 않는다. 삶은 선택이다. 그런고로 언제나 제물이 따른다.

현대인은 이상주의와 실리주의 사이를 오고 가거나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산다. 과거의 이상주의는 개인주의적이었다. 그 이상주의는 사랑을 구가했다. 그러면서 사랑을 위해 자기 것을 즐겨 바쳤다. 그러나 현대의 이상주의는 공동체적이다.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기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기득권자에 대항하고 혁명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바친다. 이에 따라서 과거의 실리주의는 국가 또는 민족의 차원에서 다른 약소 민족을 희생의 제물로 하여 강대국이 되었다. 식민지, 제국주의 따위가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늘의 실리주의는 개인주의화되었다. 자기의 지위나 치부를 위해서 약한 자를 사정없이 희생의 제물로 삼는다.

이상주의는 선물을 바친다. 실리주의는 뇌물을 바친다. 하나는 자기의 것을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적은 것을 미끼로 공적인 것을 제물로 하려는 것이다. 둘다 목적은 다르나 결국 제물을 바치게 한다는 데서는 같다. 이에 대해서 합리주의가 있다. 그것은 제물을 전혀 바치지 않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제도로나 의식 상으로나 처음부터 협상을 통해서 상호의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의 필요에 따라 상환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주의자다. 말하자면 희생, 더군다나 제물 따위는 없이 살자는 것이다. 서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래서 법질서를 확립하고 개인주의를 합법화해서 가족제도로 바꾸어 모두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독립한다. 그래서 부부나 자식 관계도 네 것 내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가정마저도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로 이변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희생의 제물이 있다. 그것은 고독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합리주의란 결국 기존질서에 안착하자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위치나 가진 것 그대로를 전제하고 서로 조화해서 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리(無理), 모순, 역설 따위는 배제하고 모든 것을 순리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족적인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 이것은 이미 가진 자, 배부른 자의 처세술이다.

그러나 못 가진 자의 눈에는 이 현실은 상실, 파탄, 모순이다. 이 세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과거와 현재, 너와 나의 관계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한마디로 이대로의 위에 무엇을 조정하거나 구축할 수는 없다. 이 세계가, 그리고 인간 실존이 그 본래성에로 돌아가려면 기존적인 것이 부셔져야 한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나 혁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거기 제물이 절대로 요청된다. 말하자면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혁명은 불가능하다. 까닭은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기성의 아성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생각의 실현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희생은 반드시 새로운 세계를 가져다 준다는 신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그같은 영역에 머물면 그 본뜻을 모른 것이다.

3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백 세에 얻은 유일한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을 향해 떠난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극히 단조롭게 서술되었다. 그는 아침 일찍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사흘 동안 간다. 산 아래 사환들과 나귀를 두고 이삭에게 그를 바칠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아들을 찔러죽일 칼과 태워죽이기 위한 불을 들고 오른다. 이삭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했다고 한다. 그는 지시한 곳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나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아들을 묶어 놓고 칼을 뽑는다….

이상의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의 복종심을 시험했으며 아브라함은 끝까지 복종하므로 축복을 받았다는 극히 간단한 도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이 이야기를 깊이 해석한다. 그것은 바로 "저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 자다"라는 주석에서 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이야기에서 그 침묵을 주시한다. 아브라함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는 그 아이의 어머니인 사라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삭과의 한마디 주고받은 말은 벌써 대화는 아니다. 즉 그것은 이유를 물어서 대답을 얻을 수 없으며, 말로써는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는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나타내려 했음인지 모른다. 이것은 확실히 인과율이 적용되는 합리적 현실은 아니다. 백 세에 난 유일한 자식을 잡아 바치라는 의지는 이성의 영역과는 상관 없는 그 무엇이다. 더욱이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하겠다"는 약속의 소리와 이 명령은 그대로 괴리며 모순이다. 그러니 거기엔 침묵밖에 있을 수 없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지 않는다. 이야기의 성격으로 보아서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라거나, 어떤 대안으로 협상을 청함직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도피구의 가능성도 전혀 봉쇄되어 있다. 사실상 시비를 가렸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불가능했으리라. 여기에는 복종 아니면 저항밖에 있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복종하므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이삭을 죽이기 이전에 이미 기존의 자기를 잡아 바친 것이다. 이치를 따지는 나, 논리를 추구하는 나, 선악을 판단하는 나,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나를 죽인 것이다. 그는 불가항력적인, 납득할 수 없는 뜻 앞에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은 죽여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히브리 기자는 보이는 현실, 기존의 질서의 세계가 아닌, 새로운 창조의 현실을 말한다.

그는 11장에서 신앙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했다. 그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믿음에서만 볼 수 있는 새 현실이다. 그것은 새 현실이기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야 했으며(8절) 정착 된 집이 아니라 천막에서 살았으며(9절) 단산 속에서 임신하고(11절) 죽은 자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새 인간이 탄생하는 현실 속으로 걸어가야 했다(12절). 바라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는데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13절). 즐거워한 것은 보이는 세계(기존질서)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실재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가지는 것과 버리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낡은 것과 새 것, 사는 것과 죽는 것, 바라는 것과 실상 등의 넘을 수 없는 괴리와 모순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이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제물을 바친다. 아니! 믿음이 곧 제물을 바치는 행위다. 제물을 바침으로 다시 그 제물을 찾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나 도로 찾은 제물은 이미 과거의 것이 아니라 새로 주어진 것, 즉 새로운 창조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 자기를 제물로 드렸고, 드리므로 이삭도 자기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이삭도 그 자신도 아니다. 새로 받은 선물로서의 생명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이 자신을 바친 것이라고 하며 또 인간을(대신해서) 제물로 바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도로 살아났다고 하며 그 신앙에서 저들은 새 삶을 구가했다. 그런데 도로 살아났다는 것은 낡은 생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부활은 제물로서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서 가능했다. 아니! 그 죽음이 곧 부활, 새 창조의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건은 인과율적 필연의 사건은 아니다. 범죄자는 벌을 받는다는 것이 필연의 세계다.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죄없는 자가 인류를 대신해서 자기를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죄값으로 죽었다는 것은 필연적 사고이나 대신했다는 것은 필연일 수 없다. 어떻게 죄없는 자가 남의 죄를 대신해 벌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벌써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부조리는 조리적 현실의 미지의 여백도 아니며, 그 비약의 돌출구도 아니다. 그것은 벌써 다른 차원의 현실이 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과거청산 따위의 설명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낡은 것의 종언 이상이 안 된다. 십자가 사건에서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곧 새 창조의 사건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이 제물(희생)을 통해서 살아난다는 것과는 다르다. 밀 한 알이 땅에 들어가 썩어야 새 싹이 나온다는 아날로기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설명되지 않는다. 까닭은 밀은 썩되 그 핵은 보존되어야 살아날 수 있는데 대해서 십자가의 사건은 철저한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사람이 죽였다가 도로 살렸다고도, 육체는 죽고 영이 살아났다고도 하지 않고 사람이 죽인 것을 하나님이 살렸다고 한다. 사람이 죽인 것과 하나님이 살렸다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다음에 부활이 아니라 실은 사람이 죽인 사건이 곧 하나님 편에서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곧 부활에의 참여인 것이다. 여기 참 제물의 모형이 있다.

참 제물은 그것을 통한 어떤 대가나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새 창조의 사건이며 행위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만일 그가 그것으로 보다 큰 축복을 전제로했다면 벌써 제물이 안 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전제 없이 무조건 바쳤을 뿐이다. 조건이 있어서 바치는 행위는 인인의 영역에 머문 것이다. 그런데 조건없이 바침은 그런 영역을 탈출한 행위이다. 이것을 바로 복종 또는 신앙의 행위라고 한다. 히브리 기자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를 살릴 것을 믿고 한 행위라고 한다. 그가 죽이는 것과 하나님이 살린다는 것은 인과적 연속은 아니다. 하나님이 살린다 함은 새 창조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복종은 전혀 다른 영역에의 참여인 것이다.

5

우리는 지금 남북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남북은 오랜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화해를 해야만하는 명령을 무엇에 의해선가 받았다. 그 무엇은 역사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다. 하여간 불가피해서 회담에로 들어간 것이다. 화해는 제물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해의 명령은 곧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사상, 이념 그리고 제도를 초월해서"라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이같은 약속은 기존 질서에 그대로 서서는 도저히할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속을 세계에 선포한 것은 이삭을 끌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처지에 비길 만도 하다. 이것이 한갓 공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삭을 바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 이삭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것만을" 하는 가장 귀중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물을 바칠 용의가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바치는 대가, 또는 결과를 전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삭이 될 수 없으며 그 회담은 기껏해야 일반 정치 영역에서 보는 협상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 회담이 정말 새로운 민족사의 창조적 계기가 될 것인가? 그러려면 무조건적인 제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린다는 신앙의 행위다.

(1972. 8.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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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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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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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 (마르 5, 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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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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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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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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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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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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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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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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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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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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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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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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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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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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