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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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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산다?
마태오복음 16.24-25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란 무슨 말인가 나는 이 역설의 현실성을 한 측면에서 이해해 보겠다.

전승자는 자기 삶과 일치된 말을 전한다

나는 오늘 말씀을 전하는 데서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 순수한 것, 본래적인 것은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인위적인 이론이나 독단으로 변질시킨 그 이전에로 돌아가야 찾을 수 있다.

둘째, 사람은 자기의 삶의 양식을 정당화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감당할 만한 것을 전승하고 그럴 수 없는 것은 묵살 또는 변질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받아들이는 자도 제 생활 조건에 맞는 것은 잘 듣고 감격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곧 거부반응을 일으키거나 들어도 곧 다른 귀로 흘려 버린다.

이것은 나의 경우를 통하여 보면 더욱 분명하다. 나는 아직 성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단순한 독자로 읽을 때 그리고 생의 실제를 모를 때 성서(특히 복음서)대로 살려면 가정을 가질 수 없다고 단정했다. 구라파로 유학 가기 전까지는 두 벌 옷 갖지 않는 것, 그리고 소유, 저축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은 고사하고 옷장도 없었고 밥상마저도 없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세 식구에 동생까지 취직했기에 내가 받는 월급은 받는 대로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성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본 10년 후의 나는 달라졌다. 성서의 배후를 알게 되므로 많은 부분이 상대화되었으며, 신학적 논쟁에 젖음으로 지적 의미가 성서와 나의 삶 사이에 완충지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학자 생활이나 최소한 그리고 연구하는 데 방해받지 않을 만한 서재가 있을 정도의 집이 필요하다. 그리고 밥 걱정 때문에 머리를 쓰고 남의 신세를 지지 않을 만큼 가정경제를 조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도의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즐겨 서구 신학적 상아탑 아래서 제시된 방법론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삶과 부딪히지 않고 머리와의 교류로 끝났다.

그런데 지금와서 놀라는 것은 독일 10년, 돌아와서 5년간 거의 공관서와만 씨름하는 동안, 지금 내 눈에 발견되는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간단한 이유다. 그것은 내 삶의 조건이 성서의 그것과 다르므로, 또 그렇게 다르게 사는 서구 신학자들의 영역에서 호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성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이전에 안 것과 생활조건이 맞물리던 그 경지를 다시 옳다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보다 고민이 있다. 그것은 그 때는 복음서의 그것을 받아 들이는 데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나의 생활조건과 성서의 순수한 오리지날한 것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다시 예수의 본 모습을 추구하고 그를 긍정하는 것은 나로서는 용기요, 그 계기는 나보다 그런 여건에 있는 이웃들 틈에 있기 때문이다.

탈가정, 무소유자들

예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글이란 읽는 자의 생활조건과 상반되어도 그 모순을 모순대로 보류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구전은 그것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심에서 곧 동의하거나 반항하거나 곧 대답을 요구하며 결단을 요구한다. 가령, 어떤 말씀이 구전으로 전해질 때, 그것을 받는 자가 제 생활조건에 맞으면 그것을 계속 전승하고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이 자기를 비판하거나 자신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때는 묵살해 버리기가 쉽다. 즉, 성서에 여러 가지 상반된 듯한 언급들이 있는데, 그것은 전승하는 그룹의 다양성 때문에 생긴 경우가 많다. 이제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누가복음 14장 26절과 마가복음 10장 29절에서는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려야 한다. 또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전한다. 이 말씀을 어떻게 처리할까? 또 마태복음 8장 20절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20절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자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은 적어도 비가정적이요 비윤리적이다. 연구가는 이런 것을 종말적이라고 하고, 예수는 그 때를 너무 다급하게 상정했다 운운하면서 도피구를 찾는다. 전달자는 믿는 그대로를 전했을 뿐이다. 누가 그 말을 전승했을까? 그것은 가정생활을 포기한 비가정화 그룹이다. 이들은 떠돌이 설교자라고 한다.

그러면 초대 그리스도인은 다 탈가정화했나? 아니, 복음서에는 이와 반대로 가정을 전제한 말씀도 있다.

누가복음 12장 52절은 가정의 분열을 전제하고 있지만, 마가복음 3장 35절은 "하느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하면서 가정적인 모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런 것은 가정을 가진 사람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탈가정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가에는 부부의 정의와 이혼권을 독점한 남자들의 횡포에 쐐기가 되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마태에 와서는 벌써 그것이 너무 생활조건에 맞지 않으니 "간음한 연고 외에는"이라는 예외율을 붙였다. 어쩌면 마가의 것은 여자들이 전승자일 수 있고 마태의 예외 항목은 남자들에 의해 수정되었을 수 있다.

부와 소유에 대한 비판 어록은 다음과 같은 말씀들에 담겨져 있다. 부자 청년에게 명한 것(마가 10, 7), 땅에 보화를 쌓지 말라(마태 6, 19-21)는 말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마태 6, 25)하다는 경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말라(마태 6, 25)는 결단의 말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말씀을 전승했을까? 그것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단신으로 나선 지도자에게만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제자 파견의 말씀을 보자.

지팡이, 주머니, 빵, 돈,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 말고, 한 곳에 가면 한 집에 머물라. 영접하지 않으면 떠나라고 전한다. 이것은 열두 제자에게만 명한 것인가? 아니 그리스도인 전반에 적용되나? 그것은 그렇게 산 부류들이었을 것이다.

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욕먹고, 박해받고, 멸시받고"라고 할 때 마가복음 13장에서는 "이 도시에서 박해받으면 저 도시로"라고 말하는데, 이런 것을 모든 탈고향한 사람들의 경우며, 나그네가 도상에서 당하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런 증거로 써는 역시 Didache(디다케)에 떠돌이로서의 삶을 찬양한 데서 본다.

이러한 방랑하는 전도자는 대체로 다음 특징이 있다.

첫째 출가, 둘째 무소유, 셋째 떠돌면서 복음 전파, 넷째 대체로 농촌을 중심하고 반도시적이라는 점 등이다.

왜 그렇게 되었나? 그것은 전승자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농민 출신이면 갖고 다닐 것도 없다. 농부는 노동자와는 다른 조건의 노동자다. 농민은 노동자보다 경제적으로 급수가 아래다. 노동자는 도시 생활에 쉽게 적응하는데, 농민 출신은 그렇지 못했다. 바울은 수공업 기술자라서 도시선교가 가능했지만, 베드로는 어부라 도시생활에서는 전적으로 도시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는 없었다. 방랑하는 전도자는 구조화된 도시에는 머물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농촌에서 농촌으로 다녀서 일도 해주고 선교도 했다. 도시를 맹렬하게 비판한 어록은(마태 10, 20 이하)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전승자의 삶의 조건을 말했다. 그러면 그들의 삶의 조건만 나타냈나? 그렇지 않다. 예수 자신도 사실상 떠돌이 전도자였다. 그야말로 그렇게 철저하게 탈가정, 무소유, 탈고향한 선교자였다. 더욱이 그가 접촉한 것이 주로 농민, 농부임은 그의 말씀의 소재 또 언어의 소박성 그리고 헬레니즘 영향(도시문화)이 전혀 없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그리스도교는 집을 버리고 고향을 버리고 소유 없는 가난한 예수에게 연유된 공동체로서, 또 그런 모양으로 그를 따르며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 기초되었다. 즉 처음의 출발은 철저히 너무도 철저히 탈소유의 파토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달라지는 길목에서

바울도 직접 사도가 아니면서 이 같은 전통에 섰다. 그도 탈가정, 탈소유자로서 떠돌이 선교자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기같이 살도록 권고했다. 결혼에 대한 그의 견해가 그것이다(고전 7장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상황이 그것을 관철할 수 없게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나 강요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이 팔레스틴 안의 유다인이 아니고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로마 문화 영역에 사는 비유다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바울의 선교의 현장은 도시였다.

따라서 교회에 모이는 계층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기층 민중들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사회적-경제적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도 가담하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지혜 있는 자, 권력자, 가문이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고전 2, 26)가 이점을 시사한다. 생활 수준이 높을수록 시대의 사조에 쉽게 오염된다. 로마사회가 휩쓸던 헬레니즘의 영향이 그리스도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 흔적이 뚜렷한 것은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반영한다. 저들은 예수를 닮은 일(실천)에는 약하거나 무관 심하고 지적 이해에 더 관심했다. 그러므로 지적 관심이 본래의 것과의 사이에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므로 급진성은 무디어지게 되었다. 비록 급진성이 남아 있다고 해도 삶에 아니라 지적 급진주의에 머물렀다.

누가는 시대를 예수 시대와 지금을 구별하여 <그 때>는 그랬고 <지금>은 이라는 시대적 구분성의 비현실성을 그대로 두어 그 순수성을 살렸다. 가령 열두 제자 파견에서는 소유를 금하는 것이 중심인데 22장 35절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또 자루도 가지고 가라. 그리고 검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구분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상황적 윤리의 기초를 놓는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생활조건에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박해를 받는 입장에 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역시 박해 속에서 기쁨의 신학을 운운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조건에서 예수 또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전한 방랑하는 지도자들의 전승한 말씀을 그대로 보지 못할 수 있고, 어떤 핑계를 댐으로 그만큼 악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생활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정착해 있다. 가정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핑계댈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되었다. 그게 이론[神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변증적인 것 이전에 예수의 말씀, 즉 원래적인 말씀을 찾는 수고와 더불어 그 말씀 앞에 고발을 받으면서 언제나 탈탈 털고 "보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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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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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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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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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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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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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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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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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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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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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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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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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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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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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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