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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코복음 15, 27-39
1. 십자가 처형현장

십자가는 식민지 정치범을 달아 죽이는 가장 극한 형태이다. 예수는 바로 거기 달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엉터리 재판에 의한 죄명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했다. 그는 끝까지 고독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비명을 올린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죽는다. 거기는 아무런 초자연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암흑, 비참, 패배, 절망, 그밖에 없다.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로마제국과 유대교 지도층이다. 그런데 처형 때나 그런 운명이 결정될 때에 그는 끝까지 침묵했고, 저들에게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를 판 가롯 유다를 저지하지 않은 것이나 제자들이 저들을 반격할 때 만류한 것과 상통한다. 이제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도 "이놈들아, 왜 날 십자가에 다느냐"하지 않고, "하나님, 왜 날 십자가에 답니까?" 소리친다. 이것은 겟세마 네에서 "왜 날 이렇게 죽이려고 합니까,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뜻의 기도와 본질상 같다.

왜 죽기는 사람 손에 죽으면서, 그것도 억울하게 죽으면서 저들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향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죽인 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처음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라고 보면, 예수를 죽인 것은 가롯 유다도, 로마의 빌라도도, 유대인들도 아니요, 하나님이 죽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무서운 역설적인 고백이다. "하나님, 왜 날 버립니까?"이러한 항고에 "내가 죽이냐! 악마가 죽이지"라는 대답도 없다. 그럼 하나님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나?

2. 바울의 십자가 이해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으련다고 했다(고전 2, 2). 그만큼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사건을 십자가에 집중했다. 사실상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역사의 사건 중 유독 십자가만은 계속 반복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독교는 희랍교회의 영향 밑에서 십자가보다는 본질론에 집중했다. 즉, 하나님의 본질,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관심이다. 그런 관심이 결국 본질상 완전, 완전한 인간이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이 인간아 된 문제를 논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성서적인 관심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하나의 실체로 보고, 그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추구하는 것으로, 희랍적인 전통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은 본질의 추구가 아니라 관계의 추구다. 즉, 하나님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하느냐,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어떤 관계가 있느냐, 즉 How의 이해다.

또 바울은 관계의 사건인 십자가를 객관화해서 인식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에 "나"가 개입해서, 그것에 참여하여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죽고 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에 나를 개입시킨다는 말은 십자가의 사건을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인간 즉, 내 죄의 문제와 관련시킨다. 즉, 죄의식과 그것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십자가에서 찾는 것이다. 죄의 의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의로서의 하나님 앞에선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비쳐진 의를 행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식이다. 즉, 내가 내할 일을 못한다.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제 구실을 못한다는 불안감이다. 사람은 계속 요청, 요구, 지시에 쫓긴다. 그러므로 해야 할 것을 못하는 자기를 안고 안타까와 한다. 반드시 요것, 요것을 못했으니까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의 한계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존재적 불안이다. 비록 외적으로 요구된 것을 다했는데도 어쩐지 불안하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구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라!"고 한 바울의 비명은 그 개인의 고뇌를 토로한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실존의 불안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 앞에서의 고뇌이기 전에 실존적 불안이다. 즉, 너무도 높은 하나님의 의 앞에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적 불안에서 결국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를 인식했으며 그것을 믿음으로 오는 구원을 경험한다.

그럼 그는 십자가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바울은 뜻밖의 이해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저주라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자가 되었다…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가 저주받은 자다"(갈 3, 13). 확실히 복음서에 기록된 십자가의 장면은 저주받은 자의 최후다. 그렇게까지 철저하고 잔인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을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 저주는 격심한 분노의 표현이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나타냈다는 것인가? 예수 자신을 저주했다고 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면 그는 인간을 저주했나? 그것으로 인간의 죄를 저주했나? 그것이 하느님의 궁극적 목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의지로서의 신은 어디갔나? 루터는 "골고다에 있어서 하느님과 하느님이 싸웠다"고 했다. 즉, 골고다는 '어느 누가 누구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 안에서의 격투라고 본 것이다. 즉, 신의 이면의 충돌이라고 본 것이다. 루터는 좀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분노가 격투했다"고 갈라디아 주석에서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일으킨 분노와 그의 사랑의 교차점에서 마침내 자기의 분노를 영원히 저주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죄에 대한 분노를 저주한 것이다.

한 사람이 부정한 아내를 가졌다. 그 아내는 남편과 자식을 가지고 어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다. 그 남편은 그 아내의 그것 때문에 고통하면서도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남편된 그는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다. 왜 인간에게 이러한 분열이 와야 되는가? 그는 자기 부인의 문제에서 인간문제로 생각을 진전시킨 것이다. 그것은 다시 진전되어 인간을 그렇게 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구조화에 자신은 책임이 없는가? 그는 그것을 방관했다. 결국 자신을 저주하게 되었다.

바울이나 루터는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노를 저주한 것, 극단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못박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십자가는 저주를 영원히 저주했다. 미움을 영원히 미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철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시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의 저주는 우리를 위해서였다(갈 3, 13)고 고백한다. 그 목적은 이러한 저주를 통해서 죄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막혀버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을 헐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뜻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롬 5, 1)라고 한다. 이 점을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자.

3. 저주받은 이

십자가의 처형 장면에 많은 사람이 나타난다. 로마 병정, 유대 종교지도자는 물론, 구레네 시몬, 여인들 그리고 몰약을 타 먹이려는 자, 옷을 제비뽑는 자,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사람들, 예수를 조롱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저들은 모두 처형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저주 하기 위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이 그저 하나의 배경처럼 그려져 있고, 오직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초점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예수는 그들이 어쩌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직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느냐고 신에게 격투와 같은 항변을 할 뿐이다.

바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왜 나를"을 "우리를"로 바꾸어 이해했다. 우리를 위해서의 싸움., 그것이 예수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죽음의 매를 맞는 자가 왜 나를 버리느냐고한다. 그는 내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또는 용서해 주십시오라든가하는 항변을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억울하다고도 하지 않는다."왜 버립니까?"한다. 버린다는 말은 왜 벌하느냐라는 말과는 다르다. 벌은 자기 자식으로 언제나 함께하기 이해할 수 있다. 버림은 벌을 안 주고 무관심으로써도 가능하다. 왜 날 버립니까는 관계를 끊습니까라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죽어도 좋으나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나는 이 장면을 제멋대로 생각해 봤다. 막내 아이가 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너무 분해서 하인들에게 저를 쳐죽이라고 한다. 몸을 비끄러 맺다. 하인들은 칼을 들고 이제 목을 치려 한다. 거기 많은 사람들이 둘러섰다. 그 아아의 형 또는 엄마가 칼이 떨어질 그의 등을 덮어 제 몸에 피를 내면서 칼을 든 하인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해 왜 우리를 버리려고 합니까하는 장면, 또는 아버지가 너무 분해서 그 자식에 향한 칼을 자기에게 향할 때, 그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달려들면서 왜 나를 버리려고 합니까 한 장면 등.

예수는 그를 죽이는 사람들을 원망치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자기를 죽인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죽인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분노의 칼을 맞아 죽으면서 사랑을 관철한다. 하나님의 저주의 십자가는 역사적 예수에게 사랑으로 나타났다. 우리를 위해서.

4. 십자가는 믿음의 창조

십자가의 주변에 무신론자들이 있다. 저를 저렇게 억울한 죽음에 내버려두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없다는 자들이다. 여기 유신론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있으나 저를 구하지는 않는다. 만일에 저가 의로우면 하나님이 내려와 도울 것이라는 자들이 그들이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럼 네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겠다"는 자들, 저들은 증거를 보아야 믿겠다는 점에서 무신론과 유신론자는 꼭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고투에는 하나님은 침묵인양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으며 나타나지 않는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 하나님은 무(無)처럼 잠잠하다. 이제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의 아무런 반응도 없다. 하나님은 이 현장에는 없다. 이 현장에서 하나님은 죽은 것이나 같다. 하나님은 무(無) 자체와 같다. 예수가 지금 무, 허공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독백이다. 정말 죽은 사람의 몸을 흔들면서 가부간에 말해달라는 것과도 같다. 죽은 사람에게 왜 날 버렸오 하고 통곡하는 것과도 같다. 마가에는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고 한다. 정말 암흑 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 장면!

그런데 예수는,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한다. "버려도 당신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버림받아도 나는 버림받은 그대로의 당신의 아들입니다"이다. 무(無)와 같이 아무런 보장이 없는 그 앞에서 그대로 하나님께 내맡기는, 여기 신앙의 창조가 있다.

5. 끝말

첫째, 의가 꼭 필요하나? 그렇다면 지금은 분노의 칼을 뽑을 때다. 사랑이 꼭 있어야 하나? 그것을 실현하려면 용서가 앞서야 한다. 이 분노와 이 용서가 교차되는 현실에 사느냐? 그러면 바로 지금이 우리가 질 십자가의 현장이다. 바울은 자신은 매일같이 나를 쳐 굴복케 한다. 그것은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196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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