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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코복음 5, 1-15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노력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세계관을 가진 시대에는 3차원적인 우주관에서 살았다. 즉, 내 위와 내 아래가 있다. 그래서 이 3차원의 관계에서 자기 설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 3차원의 세계관을 부셔버린 오늘의 사람은 평면(1차원)의 세계로 위축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의 행동이나 사고는 보이는 것, 즉 지구 평면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전에는 위와의 관계를 가진 사람과 아래와의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갈라 놓았는데, 지금 평면은 상(像)에서 좌익이나 우익, 보수냐 진보냐 등으로 갈라진다.

인간은 이 평면에서 돌출구를 잃어버렸다. 단지 있는 평면에 정좌하기에도 숨가쁘다. 따라서 이에 인간은 이 평면에서 3차원의 세계를 찾아냈다. 그것은 "나"(ego), "초자아"(superego)가 나 아래의 본능과 충돌하는 데서 나오는데, 그것을 "Libido"(본능)라고 부른다. 그것을 파헤친 사람이 프로이드다. 그는 우리의 행동은 결코 의식한 것에 의해서 조종받는 것이 아니라 의식 아래의 세계에 의해서 조종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있는 가치 체계, 사회질서 등이 압력이 되어서 인간은 억압당한다. 이것이 바로 "나 이상(以上)의 나"다. 그것은 법칙, 금제, 이상 등의 모습으로 내게 압력을 가한다. "나"(ego)는 이 두 틈—libido와 superego—에서 싸운다. 이것은 모든 것은 다 인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 안에 갇힌 포로가 되어, 자기 안에 있으나 자기가 알 수 없는 힘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갈등의 실상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탈출하는 길은 우리 안에 군림하여 우리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의 허상을 파헤치는 것이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인간은 그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자들이 인간의 내적인 갈등을 문제한 데 대해서 외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마르크시즘이다. 마르크시즘도 엄밀하게 말하면 평면상에 3차원 도식으로 세계관을 구성한다. 모든 문화, 정치, 가치관 등은 그 자체가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소위 상층 구조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경제"라는 것이 하층 구조이며, 인간은 이 틀에 있다고 본다. 프로이드가 하층의 세계, 즉 무의식 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때, 인간이 이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 데 대하여, 마르크스는 "사회"를 기존 경제질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이 해방된다고 한다. 저들을 따라서 공동목표는 기존의 일체의 구조이나 가치관, 즉 상층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다 파괴해야 한다고 보며, 그런 의미에서 혁명만이 살길이라고 본다.

이 둘은 근대 사회의 대표적인 유물론적인 혁명관들이다. 저들은 이 문제를 유물론에서 출발하여 유물론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저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을 물론 잘 본 것이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특히 성서도 같다. 성서는 인간의 타락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유물론적 혁명관을 표방하였던 대표적인 두 인물이 모두 유대인임을 숙고하자.

소외된 인간

현대인은 스스로 인간의 소외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저들은 인간을 단일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현대인을, 다이얼을 틀면 여러 방송이 동시에 들리는 고장난 라디오에 비긴다. 초점이 없다. 틀면 잡음만 들린다. 그 위에 교육을 실시한다. 그런 식으로 외계와 관련을 갖게 된다. 그리고 현대인은 그 안의 혼란을 외계에 방영한다. 그러나 자기가 진실을 모르니까 다른 사람도 모른다는 결론을 안고 무의식의 세계에 자기를 내맡겨 버림으로 결국 자기에게서 소외된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지성인이라고 그 안에서 제 나름의 사변을 한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자부하는데, 철학이란 하나를 파고 드는 것이 아니다. 자꾸 바꿔 입는 것이다.

"쉰"의 말대로 월요일은 유물론의 이복, 화요일에는 한 베스트셀러를 읽고 그 세계를 관념화한다. 수요일에는 공산주의라는 새 길을 걷다가, 목요일에는 자유라는 철로를 놓고, 금요일에는 라디오에서 프로이드를 듣고 그 길로 여행할 생각을 하고, 토요일에는 그 대신에 술집에 가서 만취하고,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이 왜 바보처럼 교회로 가나"하면서 어두운 방에 누워 담배연기만을 뿜는다. 이렇게 둥둥 떠다니다 사람들과 만나면 대화랍시고 하는데, "나", "나"만 연발한다. 그러나 상대방도 "나", "나" 하고 제 이야기를 전개하니 결국 싫증이 나서 달팽이처럼 제 방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자기에게 무척 짜증을 낸다.

자기소외는 어쩔 수 없이 이웃과의 소외를 초래한다. 자기 자신 안에 평화가 없이 남과 평화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하겠다는 생각이 중지되면, 남이 내게 짐이 되는 것이다. 내게 대한 짜증을 남에게 비화한다. 내 안의 갈등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는다. 달라는 것이 없이 밉다. 누군가 미운 자 하나를 언제나 설정하고 증오를 계속해야 나의 내적 갈등이 홀가분해진다.

이러한 이웃에서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에서의 소외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나의 밖에서 어떤 의지인 선, 정의, 진리 따위의 "권위"가 나를 힐책하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은 불안하고 마침내 좌절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반드시 현대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 한 미친 사람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현대인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니 "군대"라고 한다. 그 수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마태 5, 9). 하나면서 무수히 집단에 예속되어 있다. "나"면서 "자기"면서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것"에 끌려간다. 하나의 집단에 끌려다니면서 또 실은 무수히 찢겨진 분열이다. 이것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자학이다. 자기와의 싸움도 될 수 있고, 예속된 집단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소외되었다. 성서는 그가 사람과 격리되어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죽음과 삶 사이의 고도에 유배되어 있다. 그는 사람이 싫다. 무엇이나 "나"를 구속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 놓은 것"을 번번히 끊고 뛰쳐 나온다. 누구도 당할 재간이 없다. 아무의 권유도 듣지 않는다. 구속을 받아야 할 원인은 자기 안에 있으면서 구속하는 원인이 남에게 있는 듯이 반항한다.

또한 그는 하느님에게서 소외되었다. 예수를 마주한 그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렵니까? 날 괴롭히지 마시오"라고 한다. "괴롭다! 날 내버려둬라!" 이미 예속 상태이면서 밖의 간섭은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현대인의 모습과 일치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태에 대한 규탄이나 시비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구출해야 하느냐가 문제다. 정말 프로아트나 마르크스처럼 물질적으로 인간의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프로이트에게 많이 배우면서도 프로이트에게 반항한 융은 바로 이 "리비도"에 의한 콤플렉스에서 해방함으로 "리비도"에게 내맡기면 된다는 데에 반항했다. 그는 문화인을 상대한 결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35세 이전의 사람이 그렇게 된 원인은 예외 없이 이미 가졌던 종교적 신념을 잃은 데 있다"고 하며, "종교관을 다시 얻지 않고서 정신병에서 실질적으로 완치된 사람은 단 한 사람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물질은 분열시키고 정신은 통일시킨다. 물질의 해결로 바른 정신상태가 된다는 것은 아직 결핍, 즉 굶고 있다는 그 상황만을 본 일방적인 진리다. 만약 물질의 욕구불만이 해결된다고 해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나? 천만에!

마르크시즘 역시 많은 분파로 갈라지고 있다. 비판의 소리도 높다. 블로흐는 단지 인간은 빵으로 살 수 있다는 진리에 못지않게, 인간은 희망에 의해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 주목할 것은 모택동의 소위 문화혁명이다. 그는 마르크시즘의 가장 중요한 테제인 사회 상황(경제 여건)이 인간의 의식을 형성한다는 전제에서 경제체제의 개조는 새 인간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모택동은 발견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인간의 정신적 혁명이 사회 상황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르크시즘도 그래서 "의식화", "운동"을 중요시한 게 아닌가. 오늘날의 사회주의 세계의 혼란은 마르크시즘의 구원의 약속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다. 아무리 공산혁명을 하고 몇 세대를 감금상태에서 "유물사회"로 이끌어 왔으나, 소련 사람의 욕구나 불만이 자유세계의 그것이 도로 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의 그것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모택동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는 가령 하루 세 끼씩 먹으면 된다라고 반복한다. 이렇게 인간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 인간형을 제시하나? 결국 모택동의 머리의 인간상이 아닌가?

서구의 Student Power는 3M을 내세운다. 그러나 공산당이 되려고는 않는다. 저들은 대답을 "사람은 싫어한다. 단지 지금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외치고, 그것을 하여간 부수고 보자는 것이다. 역시 아니라는 것을 아나 "대답"은 자기 안에 못 가진 상태다.

전에는 인간은 밖의 어떤 것에 쫓기었는데, 지금은 제가 자기를 쫓고 있다. 사냥개와 토끼가 일시에 한 몸이 되었다. 그러니 미칠 수밖에 없다.

아니! 현대인에게도 다시 내 손으로 세운 것이 아닌 선악과가 세워져야 하겠다. 밖으로부터 세워진 것 말이다.

예수의 민중

예수에게서는 참 혁명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민중은 그의 죽임 당함의 깨달음에서 그 사실을 인식했다. 예수는 바로 모순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을 대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이미 규정된 틀에 맞는 무엇을 더 강조하고 저들을 악에서 옹호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문제 자체를 그대로 받아서 그것에서 출발함으로써 기성적인 것에 반항한 것이다.

현대인을 비판만 하는 자는 잘못이다. 현대인은 무엇인가 찾고 있는데, 백안시하는 것은 자기 옹호만을 위하는 자다. 현대인을 다시 자기가 만든 감옥에서 풀어놓아 주어야 한다. 현대인이 아무리 성인이 되었다고 하나 자신이 자기 귀를 잡아들어 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밖에서 누가 들어줘야 한다. 밖에서!

예수는 바로 이 거라사 청년을 피하지 않고 또 그를 책망하지 않고 그와 마주 선다. 그를 비판하는 대신, 또는 그를 정죄하는 대신 그를 사로잡은 힘을 추방한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이것으로 그는 그를 밖의 폭력에서 보호해서 구출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에게서 탈출시킨 것이다. 그는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라."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웃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한 일을 전하였다." 그는 "나" 아니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나섰다. 오늘 우리는 이 확신을 가져야하고 또 그 확신으로 현대인에게 마주 서야겠다.

우리 교회가 앞장 서야 할 당면 과제가 있다. 그것은 낡은 종교 관념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목욕물과 함께 목욕시킨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아니, 이 낡은 의복을 갈아야 한다. 참 예수의 본 뜻을 보이자. 그는 영원한 인간의 친구다.

(1971. 대전 YS)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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