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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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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은혜
로마서 9, 19-24
1

그러면 당신은 내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오, 인간이여! 그대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는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한 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 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의 권능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면서도, 그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아 주시고, 영광을 받게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게 하시려 하셨다면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불러내셔서 자비의 그릇들을 삼으셨습니다.

최근에 동양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 방면의 교수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의 특이한 점을 재확인했습니다. 그 하나는 예외율의 현실이 사실은 원래적인 현실이라는 주장입니다. 유교는 인과율을 바탕으로 하여 윤리 혹은 도덕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봉건제도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데 그 뜻이 있고, 노자와 장자에 이르면 오히려 인과율 밖, 즉 비확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연이라는 것은 결코 인과율적인 것만이 아니고 인과율적인 것과 비인과율적인 것 전체를 포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병행한 다른 하나는 서구에서는 변증법적인 사고를 필연적인 것으로 내세운 데 대해서 동양에서는 유, 무, 유 …의 도식으로 논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 무, 무 …와 같이 그냥 무로 진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확률이 없는 세계, 또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관찰에 의한 측정 따위는 불가능하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게 아무런 보장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철학을 하면서도 특별히 수리철학을 하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닭의 주인과 닭의 관계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닭은 아침마다 그 주인이 나오면 으레히 모이를 줄 줄 알고 모여듭니다. 이것은 자연법이나 인과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에도 그랬다는 데서 생긴 습성이며 또한 지금까지 미루어 보아 앞으로도 그러겠거니 하는 추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 주인은 실상은 모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전부 잡아서 구어 먹을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닭들은 주인의 뜻을 모르고 여전히 모이를 줄 것으로 알고 모여들었습니다. 이러한 예로써 그가 밝힌 주장은 자연법 자체에도 절대적인 확률은 없다는 것입니다. 도덕에 있어서도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철칙처럼 내세우고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자연법이니 혹은 신을 내세우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또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상이나 벌이란 해석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실상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이 많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특별히 최근에 와서 부조리라는 것을 절규합니다. 부조리라는 것을 전부인 듯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부조리의 현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절감한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에서도 불공평을 보고 또 신은 불공평하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단순히 역학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저들이 그만큼 애를 쓴 대가이니 공평하다고 합니다. 어떤 독일의 학자는 독일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도 저주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부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내적 평화와 화평한 관계는 사라지고 점점 거칠은 인간성으로 침식되어 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불평등, 불공평, 혹은 신상필벌 … 따위의 사고는 객관적인 바탕이 없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로마서 9장 처음 부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중에 어떤 개개인을 축복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예를 들면 야곱과 에서 형제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다"고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기준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야곱은 계속적으로 교활했고 사기행각을 한 데 대해서에서는 선량한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습니까? 이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으니 했지" 하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질문하는 입장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기존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합니다. "왜 야곱은 그렇게 교활하고 사기행각을 했는데도 축복합니까?" 하는 질문은 단지 우리의 기존적인 질문일 뿐 성서에 있는 하나님께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 사람의 성분이 어떤지 알 수 없는 태중에 있을 때 벌써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해 버렸다면 이것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이니 도덕률이니 또는 양심률이니… 하는 따위는 논의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독자들의 관심이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그러면 하느님은 불공평합니까?" 하고 대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습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논리를 대지 않습니다. 즉 왜 불공평하지 않는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요 불쌍히 여기려는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 대답을 삼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불행해졌다거나 행복해졌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 선하고 악한 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인간에게 윤리적인 책임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 물음에 대해서도 어떤 납득이 갈 만한 설명 대신에 "오, 인간이여! 그대가 누구인데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든 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과도 같은 답을 전제하고 이른바 토기와 토기장이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어떻게 만들어졌거나 간에 만들어진 위치에 있어야지 그런 질문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논리를 차단해 버린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려는 초점은 <은혜>에 있습니다. 즉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고 싶어 준 것이라는 데 강조점을 두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의 삶은 "멸망을 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는 꾸준히 참아 주시고, 또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는 자비의 그릇에 대해서는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게 하시려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도덕률이나 신상필벌 따위의 인과율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엄연한 현실이 있음을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딴 말로 하면 우리가 말하는 부조리란 우리의 가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성서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로 그 부조리도 조리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사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일들은 계속 우리가 선 자리를 강타하는 부조리한 현상들입니다. 대내외적인 많은 사건들은 어느 쪽도 나의 잘 잘못, 소위 인과율과는 상관없는 희비극을 벌였습니다. 이제 삶의 보장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도 무너질 그런 불안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빈도나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는 사실상 전혀 확률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리라는 가상을 원칙으로 믿고 살다가 그것이 비뚤어지면 당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런 불투명한 기준 위에 보장을 두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가련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보고 경험합니다.

3

성서는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몰라도 내가 잘나고 못난 것은 내가 노력하고 안 하고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귀여워할 사람을 귀여워하고 미워할 사람은 미워한다는 것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의식세계에서 결정된 가치관에 의해서는 판단이 될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물론 신약마저도 그렇습니다. 특히 예수의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왜 예수가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인간적인 측면에선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마저도 "왜 내가 이 잔을 받아야 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내게서 이 잔을 피하게 하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인과율적인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죽어서는 안 될 이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함으로써 그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깁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억울한 예수, 억울하게 죽은 예수 위에 세워졌다고 하면 바로 이렇게 부조리나 도덕률이 적용되지 않은 데서 출발한 것이 기독교신앙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역시 기존 질서 안에서 살기 때문에 다시 인과율의 세계로 끌려나오고 맙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본문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이 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희망이 없다는 태도는 비신앙적입니다. 가진 여건에 의해 낙관을 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비판을 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을 보장할 절대도, 미래를 막을 절대도 우리 앞에는 없습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불시에 예상하지 않은 것으로 개입합니다. 미래는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이 열려 있는 미래 앞에는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없습니다. 비관도 낙관도 우리가 설 절대의 자리가 아닙니다.

둘째, 우리가 가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결코 인과율적인 보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기존적인 가치관에 의해 설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애를 썼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애쓴 사람이 안 될 수도 있고, 애쓰지 않은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무엇이 주어졌든지 간에 그것은 내가 내손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고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인과율적인 사고의 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회수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어진 동안에 관리자로서의 최선을 다할 뿐 애초부터 이것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은 비신앙적이며 또한 성서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원래 내 것은 없습니다. 주어진 것은 언제라도 다시 회수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자신은 관리자로만 생각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짜증스러운 현실 앞에서 삶을 취소하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났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 눈앞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비참해졌으면 비참해진 대로, 가졌으면 가진 대로 여기서부터 그 다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 이전으로 우리의 물음을 돌려야,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성서의 뜻대로 하면 그 이상을 물을 권리도 없습니다. 당하면 당한 그대로 이제 그 다음으로 나갈 길밖에는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에너지를 위해서도 옳은 태도입니다. 삶의 비애나 비관은 "왜 태어났나?"를 묻는 데서 옵니다. 사실 우리 앞에 막힌 것은 없습니다. 막는 것은 기존 질서뿐입니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관념은 <공간적으로 많이, 시간적으로 오래>라는 것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기존 질서가, 가치관이 영속하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을 그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제와 오늘의 연속에 대한 보장은 없습니다. 종교생활이란 결국 가진 것이 다 없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형성함에 있습니다. 이것을 형성하지 못하면 우리는 무의미한 장난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는 "내 말 위에 세우지 않은 집은 모래 위에 세운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면 그것으로 갑자기 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정말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루터는 "그(예수)가 지옥에 가라면 즐겨 가리라"고 말함으로써 천국과 지옥이 단지 기존 질서의 투영이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슬픔이나 기쁨은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러 가진다 못 가진다, 이긴다 진다, 길다 짧다 …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반열에 참여하는 데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든 나 그대로가 그 뜻과 그 반열에 참여하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요 자세입니다.

(1973. 『현존』 43호)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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