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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주권만이
누가복음 11, 1-4
1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한 기원이다. 이 기원에서 그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묻기 전에 어떤 사람이 정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지부터 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물음은 사회심리적 물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공관서 중 특히 누가복음의 자료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누가에만 있는 자료에 기도와 관련된 몇 가지 비유가 있다. 친구를 위해 구걸하는 자(11,5-8), 애걸하는 과부(18,1-5), 그리고 바리새와 세리의 기도(18, 9-14)의 비유 등이 그것이다. 이 세 비유는 색 다른 세 가지 형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처음 사람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저녁밥을 지어 줄 수 없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자다. 둘째 경우는 한 과부다. 과부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거나 억울함의 상징이다. 이 과부는 우리 번역에 따르면 "원한에 찬" 여인이다. 그런데 원문의 뜻대로 하면 권리를 뺏긴 여인이다. 그는 폭력에 의해 능욕을 당했을 수도 있고, 재산을 사기당했을 수도 있다. 셋째는 세리다. 세리는 민족감정에서 보면 배신자요 반역자다.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는 철저히 소외당한 계층의 상징이다. 첫 사람은 찾아온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으나 한 끼니의 여유도 없을 만큼 가난해서 다른 친구를 한밤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애원한다. 그리고 저 과부는 불법자를 저항하기에는 너무도 힘없는 존재이기에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재판장"이지만 그에게 매달려 한을 풀어 주기를 조른다. 세리는 그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증인되는 것을 거부당했으며 그의 선의의 헌금도 거부당하는 비인간적 대우에 고통하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히 얼굴도 쳐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는 애정에서 우러나는 기도가 가능했다.

위의 세 인간은 각기 다른 처지에 있으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말 진정으로 기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실존적인 고뇌와 요청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정말 진정한, 그리고 속에서부터의 기도(원)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뺏긴 자에게만 가능하지 배부른 자, 자리를 잡은 자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세리와 대조시킨 바리새인의 기도의 자세가 보여 준다. 그는 기도를 한답시고 중얼거리나 그것은 실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시위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까닭은 그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호화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참 기도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바로 가난하고 눌린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난하거나 사회에서 어떤 동기에서든지 소외된 약자면 반드시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단정하면 안 된다. 오히려 가난이 그리고 억압된 입장이 부와 권력에의 갈망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가령 예수의 "너희는 오히려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그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눅 12, 1)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바로 의식주 때문에 고생하는 계층에게 하는 말로서 그들이 그런 것에 대한 염려의 노예가 될 수 있는가능성을 전제로 한 경고인 것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그리고 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부나 권력 앞에 위축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난하고 무력한 상태와 하나님 나라를 직결시켜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가난의 극복과 상반된 현실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리하면" 저들이 염려하는 것이 오히려 풍부하게 주어지리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의 관련에서 주기도의 내용을 다시 주목하자.

어떤 사람이 주기도를 정말 자기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기도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도의 서두는 "나라가 임하옵소서"인데 그것을 대전제로 하고 다음 세 가지 구체적 소원이 뒤따른다. 그 중 처음 기원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 그날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위한 기도다. 일 주일도 아니며 한 달도 아니다. 하루하루의 양식을 위한 간구다. 우리는 이 간구의 내용을 쉽게 추상화해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말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음을 의식해야 한다. 이 말의 청중들의 입장이 사실상 그랬을 수 있고 또 저들은 이런 기원에서 출애굽에서 그날 그날의 만나만을 허용하고 내일을 위한 저장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전승을 머리에 두고 있었기에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를 싸고돈 민중이 3, 4일을 먹을 것 없이 예수를 따랐다는 이야기를 반드시 비역사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근거는 없다. 요한 기자에 따르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빵을 위해서였다는 전제에서 예수가 책망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마가를 위시한 공관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 반면 저 민중(오클로스)이 예수를 따른 것은 <좋은 세상>을 그에게서 기대했다는 인상이 짙다.

누가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하고 있다. 그의 특수자료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 16-21)는 이 점을 역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부자에게는 주기도가 가능하지 않다. 까닭은 <오늘의 양식>을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걱정이 있다면 이미 확보된 소유를 어떻게 침범당하지 않고 보존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 부자는 그러나 어떤 걱정도 없고 무슨 기원도 없고 단지 모든 것이 보장되었으니 즐기자는 것뿐이다.

그 다음의 두 가지 소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계층과 마찬가지로 가난 때문에 또는 힘없는 약자이기 때문에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내용이다. 가령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하는 경우 우리가 물을 것은 누가, 어떤 계층에 속한 사람이 죄를 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구조화된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해야 한다. 구조화된 권력이나 경제체제에서 가난한 자나 무력한 자는 남에게 범죄할 수 없다. 참 범죄는 오히려 강자나 부자만이 할 수 있다. 참 범죄는 권력의 남용, 경제력에 의한 착취로 진행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약자나 가난한 자가 생존하기 위해 도둑질 정도하는 가능성과 강자의 범죄 가능성은 질로 보나 양으로 보아 비교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착취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의 경우도 같다. 누가 시험(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냐! 그것은 역시 없는 자, 약자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처럼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사람이기에 유혹에 빠질 가능성은 크다. 우리는 계획적이고 <보다 더>라는 욕심에 의해서 부가 권력을 노리는 것을 유혹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아니! 유혹은 약자에게 오는 위험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틀리지 않는다면 주기도는 강자나 부한 자의 기도일 수 없고 약자나 가난한 자의, 그들을 위한 기도라는 결론이 타당하다. 사실상 일 년 아니 일생을 보장받은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나라가 임하옵소서>를 대전제로 한 이 기도는 바로 가난하고 눌린 자의 기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는 첫 축복은 쉽게 이해된다. 마태는 이것이 <영에 있어서>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 가난의 의미를 추상화했으며 그리스도교가 권좌에 앉게 되면서 오히려 마태적 표현에 비중을 두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잘못된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학문적으로도 누가의 것이 원형이라는 데 이론이 없으며 그 <가난>은 결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일용할 양식 때문에 고투하는 계층을 의미한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서 마태의 해석대로 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구하는 계층은 어떤 의미로나 포화상태에 있는 자의 것이 아니라 정말 실존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동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고 있는 그 나라 앞에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또 하나의 비유는 만찬 초대의 비유(눅 14, 16-24)다. 이 비유는 약간 다른 강조점이 있으나 위에서 보아온 것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비유다. 그러나 다른 하나님 나라의 비유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직접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그 나라 앞에 선 두 다른 인간 계층을 반영한다. 한 계층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부하며 다른 하나는 그 초대에 무조건 응한다. 전자는 소유자(땅, 소, 여인)들로 성격화했고, 후자는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계층임을 나타낸다. 가난한 자, 불구자, 맹인, 절뚝발이 등이 그것을 상징한다. 처음 계층은 기득권자인데 반해 후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기존 사회질서를 반영한다. 전자는 그 초대를 거절했다. 까닭은 이미 무엇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후자는 무조건 그 초대에 응했다. 까닭은 저들은 가난하고, 바로 그렇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 두 형(型)은 다음과 같이 성격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자는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 또는 드릴 필요가 없는 계층이요, 후자는 진정으로 그 나라를 갈망할 수 있는 계층이다. 이러한 구분은 누가에서 확실하게 부각된다. 마태는 같은 자료인데 후차적으로 초대된 사람들은 "큰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라고 추상화함으로 유대인 선민권에 도전한 데 불과하다. 누가는 뚜렷하게 계층적 대조를 시킨다. 우리는 누가의 이 구체적 분류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가는 가난한 자의 축복을 말하는 경우에 부한 자에게 화를 선언함으로 이 계통성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에는 오고 있는 그의 나라 앞에 소유 또는 부가 사람을 갈라 놓은 요소로 부각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일련의 말씀에서 볼 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 기보다 어렵다"는 Q자료의 어록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특징이 직접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잘못이다.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 나라에의 초대가 전제되고 있다. 그 나라에의 초대는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말씀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 나라에의 초대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딴 말로 하면 그 나라는 역사의 상황과 상관없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를 향한 자세에서 두 계열이 분명하게 갈린다. 그것은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계층이 갈라지게 된다는 말도 된다. 여기서 우리가 전체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강자나 부요한 자들이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며 좀더 좋게 말하면 비록 그런 기도를 함께한다고 해도 그 의미하는 바가 같을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 나라는 어떤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섰다. 그런데 공관서에 전승된 예수의 말씀에서 직접 그 대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까닭은 그는 그 나라의 도래 앞에서의 인간의 행위 또는 결단을 촉구했지 그 나라에 대한 사변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가 있어서 하나같이 그 나라 전체를 직접 이야기한 것은 없다. 이것이 묵시문학파의 종말론과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심을 추구하려면 다각도로 간접적인 자료를 찾아 접근하는 길밖에 없다. 가령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형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전제할 때 예수의 형태에서 그 나라를 추리해 보는 것 등이 그 가능성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고 단지 누가복음 기자가 제시한 한 항목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누가가 제시한 것은 저 유명한 예수의 선언이다. 그것은 구약을 인용한 것으로 요는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빛을, 눌린 자에게 석방을 아루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것도 그 나라 도래 전야에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곧 그 나라의 프로그램 자체는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 나라의 현실과 무관하리라는 단정도 불가능하다. 그 나라가 정말 임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역사적 형태를 띨 것이며, 이 역사의 과정에 개입해 들어올 것임이 틀림없는 한 우리의 기대와 전면 단절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마지막 말은 큰 비중이 있다. 그것은 "주의 은혜의 해 선포"라는 말이다.

누가에는 마가(마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의 설교의 집약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라는 구절을 뺐다.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을 고유하게 실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누가는 그 나라를 바로 <은혜의 해>로 대치시키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짐작이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를 던져 주는 셈이다.

<은혜의 해>란 다름 아닌 희년을 말하는 것이다. 희년이란 단순히 기쁜 날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해다.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의 원상회복이라는 것이 중추적인 정신으로 되어 있다. 즉 노예 해방, 포로 석방, 빚진 것에서 해방, 편중된 토지의 재분배, 심지어는 자연의 회복을 위해서 그 경작을 금지할 정도로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위적으로, 자연 자체의 차질 등으로 축적된 일체의 비리와 악순환의 요소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서 원상복귀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이미 제정된 제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실현된 일이 없다. 그 까닭은 언제나 가진 자, 강자들이 기득권을 고집하여 그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악순환을 계속했으며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악한 자는 점점 더 교활해지기만 했다. 이런 긴 한의 역사에 지친 민가 속에서 메시아 대망의 싹이 터서 점점 강렬해졌다. 그 대망이 행동으로 옮겨지거나 그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질 그 나라에 대한 사변이 날로 발달되었다. 전자는 민중에게서, 후자는 지식층에게서 발달되었다. 그 메시아는 처음에는 패왕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기존세력이 강할수록 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절대능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메시아는 점차 신격화됐다. 그래야만 기존의 부조리를 깨끗이 청산하고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이사야)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바로 예수가 이러한 메시아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도 예수의 온 목적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의 사명의 제시 내용이 그 나라의 성격과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나라를 기존의 어떤 것과 함부로 일치시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유토피아와는 엄격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1980. 3. 『가독교사상』)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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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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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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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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