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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요한복음 19, 6

Ecce homo! Behold the man! 이것은 니체가 자신의 전기를 쓸 때 사용한 표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를 재판하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역사적인 서술에 그리 관심하지 않고 사상적인 전개에 집중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재판 장면은 어느 복음서에서보다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그는 이 재판의 장면을 서술함으로써 예수의 입장을 밝히려하고 있으며 그를 처형한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궁극적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물음으로써 유대교를 비판한다. 그는 반면에 로마 정부의 처사는 본의 아닌 것이었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나 서술된 결과에서 나타난 로마정권의 모습은 정치권력 구조의 진상을 폭로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정에 세워놓고 "이 사람을 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보기 전에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부터 보자. 그리고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무리를 보자. 그 다음에 "이 사람"을 보자.

1. 빌라도—정치인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관리이다. 그는 대로마제국의 대표,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사는 사람이다. 로마제국은 법과 권력으로 조직된 세계국가이다. 그것을 대표한 빌라도는 법과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한 인간형을 대신한다.

빌라도라는 인물에 대해서 약간의 기록이 전해진다. 헤롯 아그립바가 로마의 카이저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절대로 굽힐 줄 모르며 앞뒤를 고려하지 않는 자로서 폭정으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재판도 없이 사람을 사형에 처하며 끝없이 잔인하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고발장이기 때문에 순수 객관적인 상(像)은 아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들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는 주후 26년에 제5대 총독으로 유다에 와서 10년간 재임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주둔지의 사람들과 되도록 충돌하지 않고 실리(實利)만 노리는 정책을 써 왔다. 유다에 와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 해서 예루살렘에 군대 주둔을 피했다.

그런데 빌라도는 부임하면서 그의 권력을 시위하기 위해서 군대를 예루살렘에 진주시켰다. 그 때 유대인들은 연 5일 간을 총독 관저 앞에서 시위했다. 빌라도는 발포를 명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끝끝내 죽음으로 항거하므로 결국 빌라도는 후퇴해야만 했다. 빌라도는 헤롯 관저에 카이저의 이름을 나타낸 표지를 장식했다. 유대인들은 당시의 카이저 디벨리우스에게 항소함으로써 빌라도는 카이저의 지시에 의해서 그것을 철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상수도 시설을 위해서 성전 재산의 유용을 강요했다. 그것에 항의하여 궐기한 유대 군중에게 그는 군대를 동원해서 많은 인명을 살해했다. 공관서에 그가 갈릴리 사람을 죽여 그 피를 신전의 제물에 섞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유대인의 갈릴리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한 정치 수법이었을 수 있다.

이제 예수를 재판하는 빌라도의 태도를 따라가 보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끌고 와서 고소했다. 그는 우선 그의 행위를 법에 비추어 본다. 그는 그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지 않기에 그 고소를 기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불복하고 집요한 공세를 취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겁냈는지 모른다. 그것은 권력에의 위협을 뜻한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내세운 법은 주춤한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을 일단 후퇴시킨다. 그는 예수를 심문한다. 입건할 법적 근거를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세계는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을 알고 그를 석방하기 위해서 유대 군중 앞에 그의 무죄를 선언한다. 그러나 완강한 저항에 법은 다시 후퇴한다. 그는 마침내 소위 정치협상을 꾀한다. 그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유월절을 계기로 한 특사를 제의한다. 그러나 그것도 거절된다. 그는 또 하나의 융화책을 내세운다. 예수에게 왕관과 왕복을 입히고 군중 앞에 끌고 나와 희롱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군중을 무마하려고 한다. 그 때 그의 유명한 말 "이 사람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군중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친다. 빌라도는 그 순간까지 법에 서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이 사람을 놓으면 카이저의 충신이 아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저를 반역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를 막다른 골목에 세웠다. 카이저의 충신이냐 반역자냐, 어떤 것이 카이저의 충신이냐하는 것을 행동으로 밝혀야 할 단계에 왔다. 그러나 그는 판단할 수 있는 기점을 놓쳤다. 그는 카이저의 충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말 카이저의 충신이 되었나, 아니면 거짓 군중의 충신이 되었나? 카이저의 충신으로서의 길은 로마제국의 법, 카이저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카이저의 충신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로마의 법, 카이저의 법을 유린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카이저를 모욕했으며, 그의 권력의 거점을 발로 짓밟았고, 그 군중의 뜻을 대행해서 집행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렸다. 빌라도는 그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이 자기 손에 있음을 호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의한 민중의 꼭 두각시임을 폭로하고 있다.

권력이란 사실상 누가 주어야 행사할 수 있다. 물론 권력을 폭력으로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일정한 수속을 거쳐서 그 권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모든 독재자들이 그랬다. 폭력으로 권력을 빼앗고도 어떤 익살이나 위험을 통해서 민중의 인정을 강요한다.

주어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인데 일단 그 손에 잡혀지면 그 자체를 독립시키려고 한다. 민중에게 아부하면서 얻은 권력인데 일단 그 손에 들어오면 그것은 민중을 억누르는 무기로 둔갑한다. 그러나 그 민중을 억누르는 것을 혼자서는 못한다. 독재자는 그 권력을 아래로 분배한다. 그리하여 분배받은 자의 지지로써 자기 유지를 꾀한다. 권력을 분배받은 자는 그 권력을 장구한 것으로 사수하기 위해서 권력에 자신을 판다. 그리하여 법에 의해 인정받은 권력은 점점 권력을 절대화함으로써 마침내 법을 파괴하게 된다. 이처럼 법과 권력은 긴장 관계를 이루어 마침내 법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 유대인—종교인

그러면 예수를 고소한 유대인들(유대교)은 어떠했나? 저들은 유대교는 윤리, 종교, 가치관 전체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저들은 하나님의 뜻의 수호자이며 그 파수꾼으로 자처했다. 그들은 예수를 바로 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로 단정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는 것이다.

종교는 그 거점을 법이나 권력에 둔 것이 아니고 초월자에 두고 형성된다. 초월자를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길이다. 인간은 보이는 것, 있는 것에 예속되지 않고 그것의 주인이 될 때에만 참 제 모습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출발은 초월자에 두고 있으나 그것이 역사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전통을 지니면 그 기점을 상대적인 것에로 옮기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것이 유대교에서는 율법이요, 일반 종교에서는 교리이다.

이렇게 되면 곧 율법 또는 교리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율법과 교리를 집행하기 위해서 교권이 확립된다. 이 교권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쉽게 국가의 권력과 야합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치화된다. 유대교는 독립국가인 경우에는 인간의 생사권을 그 손에 장악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서는 그 생사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권위의 존속을 위해 로마와 야합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자신을 상실했다.

그러면 그렇게 된 종교는 어떠한가? 여기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보자. 저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한다. 그의 죄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죽음에 해당한다고 확신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다." 저들의 법대로 하면 예수는 죽일 자이다. 그런데 왜 저들은 예수를 죽이지 않고 로마 법정에 끌고 갔나? 그것은 저들이 만일 예수를 죽이면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권리는 행사하고 싶으나 책임은 회피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 유대 민족의 이름을 송두리째 끌고 빌라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빌라도의 법 앞에 무릎을 꿇은, 즉 자기를 팔아버린 자들은 로마의 정권의 추종자들도 아니면서 로마 카이저의 충신의 옷을 갈아 입고 꼭두각시 역할을 한다. 빌라도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할 때 저들은 소리친다: "카이저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이 추태! 이 비굴! 왜 저들은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저들의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아니, 실상은 저들은 자기 수호에 미쳤다. 자기들이 이미 형성해 가진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치우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종교적인 재산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에 자기의 집을 지었다. 거기에 안주하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그들은 거짓과 비겁의 살인자들이 되었다.

이상의 두 인간상은 낡은 인간형을 집약한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낡은 질서를 조종했고, 거기에 군림해서 역사에 탁류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탁류는 비단 정치나 종교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도 이런 인간형아 우굴거리고 있음을 보며, 저들의 거짓 고소와 증언에 희생되는 제물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형들이 지금 예수를 심판한다. 저들은 역사에, 인류 앞에 한 사람을 내세운다. 그리고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이 사람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이인가?

3. 새로운 인간형

빌라도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된 종교의 법을 대리 집행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유대 종교는 자기들의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로마의 카이저의 거짓 충신 노릇을 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예수는? 그도 저들과 똑같이 왕도 아니면서 왕관과 왕복을 입고 사람 앞에 서야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가 만일 로마에 반항해서 싸우다가 잡혀서 사형을 받는다면 하나의 민족적 영웅이었으리라. 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왕관과 왕복을 입고 조롱을 받게 되었다면, 그 왕관, 그 왕복은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꼭두각시이다.

그러나 그의 꼭두각시 역할은 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저들은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스스로 맡은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들이 뒤집어 씌운 꼭두각시의 역할을 했다. 저들은 살인을 감행하면서도 억지와 교묘한 변명, 위협 등으로 책임을 끝끝내 남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유능한 배우로서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권리의 수호나 자기 정당방위는 고사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무능"에서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무능한 꼭두각시! 그것은 수난이다. 그 수난은 무능한 자의 수난이다. 그는 지금 꼭두각시들의 거짓의 소용돌이 속에 꼼짝 못한 채 한 꼭두각시로 구경거리가 된다. 거짓 증거의 함성 속에서 그는 입도 손도 발도 못 가졌다. 그는 침묵했다. 왜? 소크라테스처럼 법의 존엄성을 위해서인가? 비록 불의한 동기이기는 하나 법이 결정하는 한, 법에 순응할 참이었는가? 아니면, 저들의 고소 내용과는 다르더라도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어떤 죄책감에서 하는 침묵인가?

확실히 그는 빌라도의 권력을 인정했다. 그러기에 그는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시지 않았더라면 네게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빌라도의 권력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판결을 다소곳이 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 왜?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음성을 잘 듣는다."

그의 삶의 진리를 증거함이라면, 그의 이러한 수난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패배, 그의 무능, 그의 침묵 속에서 받는 심판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에게 속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리이다. 그의 꼭두각시 역할은 그 세대(세상)에 굴복해서이거나 그 세대를 승인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새 나라, 새 세대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는 모략과 폭력, 책임전가 등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심판을 받으면서, 수난을 당하면서, 패배하면서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면 이 재판석에서 무엇이 증거되었나?

정치권력의 허구성이 폭로되었다. 종교의 허구성이 폭로되었다. 저들은 예수를 심판함으로써 스스로 심판을 받았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살행위를 했다. 저들의 정의, 저들의 진리가 얼마나 허구한 기초 위에 세워졌는가가 증거되었다. 저들의 유능(有能)이, 저들의 생사권이 얼마나 허위를 위해 쓰여지고 있는지가 증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천 년 전의 한 장면의 진상을 폭로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가 계속적인 물음과 대답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4. 세계—빌라도의 법정 속에서

세상이 질서를 유지하려면 정의가 서야 한다. 정의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종교가 주는 가치관을 의지해서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되는 정의의 관념은 법을 형성하고 이 법은 권력이 집행한다. 그러나 정의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관계에서 언제나 계속적으로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 종교는 새로운 정의를 위해 언제나 시대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종교가 전개되어 가는 역사에 민감하지 못하고 이미 형성된 것에 고착되어 버리면, 그 때 종교는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기성(旣成)의 특권을 옹호하는 이용물이 됨으로써 종교 악을 형성하고 새것의 순을 잘라버리는 독아(毒牙)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에 종교의 이름을 뒤집어 쓴 정의가 자파(自派)의 이익을 위한 증오와 복수의 도구로 전락하여 무죄한 피를 수없이 흘리게 한 사실을 보고 있다.

권력은 법의 수호자이다. 따라서 정의의 수호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은 "위에서 준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개인 또는 한 집단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혔을 때 법과 정의에 대포로 맞서는 정치악으로 전락되는 것을 얼마든지 보아 왔으며 지금도 그런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도 빌라도의 법정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이천 년 전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진행되는 법정이다.

예수는 이 법정에서 억울한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예수는 지금도 계속 말없이 저들의 손에 유린당하고 처형당하고 있는 권력 없는 자들 속에서 죄 없이 죄인으로 재판을 받는다. 저들은 자기의 인권을 유린당해도 국가니 종교니 하는 거창한 성벽과 같은 것들 앞에 입도 없고 손도 발도 묶인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처형되어 간다. 이런 판국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권력에 아부하고 저들이 조성하는 여론에 아부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거수기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바로 이처럼 빌라도의 법정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되 어떤 방어의 능력도 없이 희생되는 무리들에게서 지금도 예수가 심판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심판 속에서 마침내 궁극적인 사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처럼 심판받는 자가 바로 세계를 심판할 뿐 아니라, 그가 바로 "진리"의 세계, 새 세대의 왕임을 본다. 무능하게 심판받는 예수는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라고 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왕이다(누가 4, 18-).

이 왕은 침묵 속에서 낡은 세계를 정죄하고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한복판에 정좌하고 있다. 이 억울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한다. 이 불의가 의를 유린하고 악이 선을 짓밟는 세속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본다. 심판받는 자를 통해서 심판자를 심판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패배한 그를 왕으로 올린 아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는 이 어지러운 모순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1970. 11. 『해방자 예수』)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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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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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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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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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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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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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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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학'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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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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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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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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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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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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