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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
마태오복음 6, 2-4. 16-15
1. 눈(眼)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말한다. 눈이 없는 삶은 아무리 태양이 비쳐도 어두움 속에서 산다. 개인에게 있어서 눈이 없는 경우는 그 삶의 암흑이다. 한 사회에 있어서도 눈이 없으면 그 사회는 암흑이다.

그런데 눈은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눈은 너와 나와의 관계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한다. 내 눈을 통해서 너와 내 주변의 여러 가지 사실이 전달되어 나의 판단과 결단을 가능케 한다. 또 내 눈은 상대방을 비쳐서 그에게 나를 전달하고 그를 반사함으로써 그 상대자의 판단과 결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6장 22절에서 눈은 이 생리적 눈에 한정시키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는 동물적인 눈이 아니라 내적인 눈이 있다. 본문은 그것을 마음속의 빛이라고 한다. 불교는 이를 혜안(慧眼) 또는 심안(心眼)이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반사하는 것은 거울이지 눈은 아니다. 그것은 보고도 못 보는 눈이다. 참 눈은 생리적인 눈이 안 보이는 것까지 볼 때 참 눈이다. 소위 대중이 보는 것만 보는 눈은 눈이 아니다. 남이 못보고 지나간 것들, 가리워진 것을 보는 눈이 참 빛으로서의 눈이다.

근경에는 심층심리학이라는 것이 고도로 발달했다. 그것에 의하면 사람은 3차적인 세계에 의해 움직인다고 한다. 사람의 의식의 세계는 평면세계다. 그에게는 전통에서 주어진 가치개념이라는 고차원과 동물적인 본능이라는 하부적 영역에 의해서 그 삶이 결정된다고 본다. 심리학자는 표면상의 이유를 꿰뚫고 의식상의 세계를 보는 눈을 발달시켰다. 그래서 그 눈으로 문제에 걸려 있는 그 상대의 자기를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함으로써 그들을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오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심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결국 무한심(無限深)의 동굴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현기증을 느낀다고 한다. 이제는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비명을 올려야 할 단계다.

사회학적인 관찰도 세계에서 인과율만 찾는 데서 역시 3차원적인 관계를 보게 되었다. 맑시즘의 상층 구조, 하부 구조 따위가 그 발견이다.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요, 이 사회의 현상 배후에 얽키고 설킨 필연적, 인위적인 복잡성을 발견하고 놀란다. 세계는 무엇이 움직이느냐? 그것은 결코 양성화된 것들이 아니라 음성적인 것이 결정한다. 경험과 과학적 발달도 음성적인 것을 양성화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인위적인 음성화의 길을 동시에 열어 놓았다. 예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드러내놓고 뇌물, 공갈, 폭력 등을 감행하면서 선거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조용한 분위기였으며 또 전에 비해서 비교적 부정적 행위가 눈에 덜 띄었다. 많은 음성이 양성화한 셈이다. 그러나 인위적 은폐에 의한 음성적 기술이 그만큼 발달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학생들이 참관인 정도로서 밝힐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부정은 목격하지 못했는데 부정했다는 아이러니 앞에 서서 요새는 부정에 대한 새 차원을 발견한 것으로 소위 원천적 부정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야 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부정이라는 말이다.

이래서 결국 불신세계로 줄달음친다. 듣는 말, 보이는 표정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이제는 저 우는 자, 저 가난한 자, 저 다정(多情)이 정말인지 통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가까운 사람마저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을 액면대로 받지 못하고 "무슨 꿍꿍이 속이야" 하는 회의부터 앞선다.

반면에 더 슬픈 것은 내 말, 내 진심, 내 뜻을 그대로, 액면대로 받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두 친구가 나를 만나자 "국가적 박사"라고 농담했는데 곁에 있던 친구가 "왜?"라고 물으니, "아니, 독일에서 학위했으니, 흥 누가 아나, 거짓 학위인지, 또 돈 주고 샀는지"라고 했다. 어떤 수사기관에서 취조받을 때, "아니, 내가 신학자인데,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산 것을 당신이 아는데, 그래 공산당으로 의심해"라고 했더니, "누가 아오. 그런 것이 오히려 위장술일 수도 있지"라고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되면 슬퍼진다. 정말 버선짝이면 뒤집어라도 보일 텐데 하는 비감도 생기며 "에이, 이래도 저래도 모를 바에는 공연히 성실하려고 할 것도 없다. 요령껏 살자" 하거나 아니면 실의에서 살 흥미를 잃게 된다. 나를 받아 주는 눈, 이해해 주는 눈이 없는 것이 아마 지옥의 마지막 층의 삶이리라.

불신은 파멸 직전까지 몰고 온다. 이런 마당에 오늘 읽은 본문은 내게 새삼 살 용기를 주었다. 그 단순한 말씀에서 나는 새삼, 그래도 사람을 믿고 대하고, 믿고 살자는 용기를 주었다.

2. 하느님의 눈

이 본문은 약간 다른 관련에서 하느님의 눈을 말씀한다. "금식할 때,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구제할 때, 회당에서나 거리에서 스스로 나팔 불지 말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고 한다. "은밀히 보시는 하느님의 눈"이라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하느님을 "눈" 하나로 표시했다. 참 그것이 특히 요새 마음에 공명되고 굉장한 힘을 준다. 선거 때에도 한국 하늘에 "눈" 하나를 띄웠으면 한다.

왜 구제하는 사람이 저렇게 자기 선전에 여념이 없나? 왜 금식하는 자가 그것을 나타내려고 저렇게 안달인가? 그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다. 즉, 남들이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다는 대전제 때문이다. "구제하면서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 이것은 오늘의 풍조에서는 미친놈의 짓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가 얼마나 "하느님의 눈"을 직시하고 그 눈동자 앞에서 살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은 한 푼에 팔리는 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 없이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눈을 정말 보고 그만 믿고 산 표본이다. 우리가 이 불신 시대에 그대로 믿고 그 소신대로 남이야 인정하거나 말거나 구부러짐 없이 살 길은 "하느님이 은밀한 중에 보신다"는 이 신앙이다. 이 신앙 없이 한국의 미래는 없다.

그러면 이 하느님이 그렇게 은밀하게 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예수에게 그 예리한 눈을 본다. 얼른 보면 예수는 일상 생활인에게 무관심한 듯하다. 그는 미래에만 도취, 지금의 울음, 슬픔에는 아랑 곳 없는 듯 고고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바로 남이 못 보는, 너무 자명적이기에 못 보는 생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셨다.

3. 예수의 눈

복음서에는 예수의 행태에서 한 가지를 여러 행태로 반복한다. 그것은 <보신다>는 여러 표현이다. "보시고", "눈여겨보시고", "둘러보시고"가 그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짧은 말씀을 보면 놀랄 정도로 섬세한 관찰자였음이 엿보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성을 꿰뚫어 본다. 살인, 간음, 이혼의 동기 등이 그것이다. 또 그들의 놓인 상황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지친 것을 불쌍히 여겨",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상 생활인의 행태를 보는 눈을 예수는 가지고 있다. 씨뿌리는 농부, 씨의 분산, 자라는 데 놀란 농부, 가라지 문제, 보물 발견한 자의 기쁨, 고기 많이 잡은 어부, 잃은 양 찾은 목자, 아들 찾은 아버지, 한 돈 잃은 여인, 재판장 찾는 억울한 처지의 과부, 악한 포주, 잔악한 종, 게으른 종, 부지런한 종, 반항 속의 복종, 무엇보다도 세리의 기도, 기름부은 여인 이야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정말 자상하게 그리고 넓게 가리워진 데를 보시었다.

반면에 예수는 날카로운 눈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눈은 잡혀가던 때 몸을 돌아켜 베드로를 똑바로 보시던 그 눈, 남에게 비난당할 때, 둘러보시어 혈루증 여인의 눈과 마주친 그 눈이 그것이다. 그 눈은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바로 우리 생활 주변에 집착했다. 그래서 그 눈은 우리를 절망에서 일으키고 우리를 어두움에서 해방하고 가리워진 데를 드러냈다. 그의 눈은 무엇보다도 이긴 자, 성한 자가 아니라 눌린 자, 소외당한 자, 남이 알아 주지 않는 자에게 향했다. 그의 눈은 결국 그가 믿는 하느님의 눈, 은밀한 중에 그 눈을 비추었다.

4. 끝말

우리는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그의 눈을 다시 보자.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그것은 심판, 두려움을 보여 준다. 둘째 는, 예수의 눈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그럼으로써 아무리 부정이 범람하고 내 정성이 관철되지 않더라도 나만은 꼿꼿하게 그의 눈에 인정된 삶을 살도록 다시 옷깃을 여미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이 되자.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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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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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축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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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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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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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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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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