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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코복음 4, 35-41
폭풍 속의 한 조각의 배

나는 오늘 본문인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기까지 위험 속에 있는데 고물을 베개 삼아 자고 있는 예수의 잠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 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하려고 하는가? 그 대답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제지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간다. 풍랑이 인다. 풍랑 앞에 조각배는 글자 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장면에서 자기들의 처지를 보았다. 이 폭풍을 만난 바다 물결 위에 떠서 가라앉지 않고 목표를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문제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에 비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한 공동체 즉, 교회를 그렇게 본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교회란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뜬 일엽편주였다. 더욱이 복음서가 이루어질 무렵의 공동체는 마침내 지리멸렬(支離滅裂)하지 않나 하는 위험 속에 있었다. 이 작은 공동체는 분명한 목표를 보고 배를 띄웠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박해로 고향 땅 팔레스틴을 유랑해야 했고, 유다 민중에 분노한 로마는 폭악성을 드러내며 살기가 등등할 때다.

"이 작은 공동체는 마침내 깨어지지 않나?" 이 공동체는 어떤 취미나 이념이나 이해 관계에서 만든 단체는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에 의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역사가 완성되는 순간을 눈앞에 보며 난국을 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난국에 아무런 구조의 손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습니까?" 이것은 초대교회의 원성과도 같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나? 그리스도는 어디 갔나?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던 그리스도는? 그는 홀로 자고 있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왜 아무런 손길이 나타나지 않나?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왜 하느님은 침묵하나?"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줄곧 반복되는 인간의 탄원이다. 특히 초대교회는 예수의 수난사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불의한 손에 잡혀 희롱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들은 하느님의 간섭을 얼마나 기다렸나? 그러나 악랄한 현실만이 자행될 뿐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간섭하지 않으면서 간섭했으며, 침묵 속에서 그의 뜻을 관철했는데 신은 악한 세력마저도 역이용하셨다!"라고 깨달은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를 인식함으로 얻은 부활 경험 이후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제자들, 즉 그리스도교회라는 공동체가 위기 속에서 어쩌면 다 부서져 없어질지도 모르는 고난 속에서 저들은 그 때와 꼭 같이 침묵하고 불간섭하는 신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를 깨워 일으켰다. 그는 곧 파도를 잠잠케 하고,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했다. 저들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 앞에 복종하는가?" 하고 새삼 의문을 던진다.

여기서 초점은 "이 분이 대체 누군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에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인데, 그가 병중에 있었다. 임종이 가까워 오니까 사람을 예수에게 보내서 저를 살려달라고 했다. 예수가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어 있었다. 그때 마르다는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고 한다. 그는 예수가 안 계시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예수가 와서 "마지막날 부활 때,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리라"고 한다.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분만 계시면 무엇이나 가능하리라고 믿었는데 막상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고 하니 새삼 그런 엄청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자고 있을 때, 그가 침묵하고 있을 때는 "주여, 우리를 살려 주어야겠습니다." 즉 "당신은 전능합니다"는 전제에서 모든 기대를 그에게 건다. 그런데 막상 파도를 잔잔하게 하니까 "저가 누구이기에 파도도 복종하느냐?"고 한다. 말하자면 전혀 소화할 수 없는 사건 앞에 오히려 당황하며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꾸어서 이렇게 보자. 예수가 "내가 파도를 다 물리치리라"고 말씀하니까, 제자들은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 당신이 누구라고, 아무리 그렇기로 파도야 어떻게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회의(懷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급할 때—그가 없다고 생각될 때—는 그저 단순하게 그를 찾고, 그분이면 무엇이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가 "파도를 잔잔케 하리라"고 할 때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회의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침묵할 때는 침묵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정작 행동할 때는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믿지 못하여 무서움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어떤 아이가 자기보다 큰 아이와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힘이 기우는 것을 의식했을 때, "너 우리 아빠가 나오면 없다. 우리 아버지 힘이 얼마나 센지 알아? 벼락을 명령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 널 보고 벼락아 저 놈 위에 떨어져라 하면 넌 재가 돼!"라고 위협했다. 이 말을 담넘어 들은 그의 아버지가 어느 날 바로 그 아이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 "이 놈, 내가 벼락을 부르겠다!"고 위협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체! 아빠는 뭐 사람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벼락을 명령해!"라고 응수했다. 말하자면 믿지 않은 것이다.

어떤 교회가 수해를 맞았다. 홍수의 강도는 작은 교회당을 뭉개 버릴 기세다. 그래서 교인들은 함께 "주님, 왜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둡니까? 어서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함께 애원했다. 그 때 목사가 "주님이 오시면 순식간에 이 물결을 잔잔케 하리라"는 설교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자 중에는 "체! 아무리 그렇다 해도 파도야 별 수 있나!"라고 냉소했다.

우리의 사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 있어서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자세를 우선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간에 있어서나 교회생활에서 무슨 신통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침묵과도 같다. 그래서 애당초 "우리 거동이나 생각에 그가 함께한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래서 제 죄나 제 재간에 의존한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절망으로 공포 속에 빠져 버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다.

둘째,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느님께 매달린다. "하느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이 불의의 힘을 물리쳐 주십시오." 이 둘째의 경우는 애원을 하지만, "하느님은 지금은 적어도 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를 갖는 데서 첫 경우와 같다.

셋째, 이 둘에게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은 순식간에 네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라고 선포될 때 드러난다. 처음 경우는 애당초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으니 믿지 않았고, 둘째 경우도 "원! 글쎄! 하느님이면 이 판국을 어떻게 한단 말이야, 내 재간껏 해야지!"하게 된다.

"왜 믿지 않느냐, 왜 무서워하느냐?" 이 책망은 첫째 경우의 사람이나 둘째 경우의 사람도 똑같이 들어야 할 것이다. 저들의 불신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파도가 인다. 배가 뒤집힐 위험이 연속한다. 배에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홀로 있다. "이젠 죽었구나!", "아니! 너희는 홀로 있지 않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 직장, 교회, 국가라는 배에 있다!", "그가 함께한다면 왜 간섭이 없느냐? 그는 자고 있는가? 그러면 함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생각이 업치락뒤치락 한다.

이것은 결국 기적을 바라는 심정이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가 무엇을 내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전에 "그가 함께 여기 계시다"는 이 사실을 정말 안다면, 그것을 믿는다면 정말 그렇게 당황하겠나? 정말 그렇게 새삼 놀라서 "주여, 주여" 소리를 지르겠는가?

우리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좌절했다가도 그래도 '저분은 이 땅에 살고 있는데'라는 것을 자각할 때 갑자기 삶의 용기가 나는 것을 경험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내게 무엇을 했거나 또 구체적으로 도와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아니, "그가 나와 같은 배에 탔다"는 사실 하나가 나에게 절망을 없게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어도 그와 함께 죽으리! 그와 함께 있다는 이 사실이 나를 공포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 역사, 이 한국, 내 가정, 내 선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는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해치는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이 현실이 이토록 불의한 것이 구조적으로 판을 치고 그 어느 한 사람도 감히 이 구조악을 물리칠 수 없다고 느끼고, 꼼짝없이 휘 말려든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두렵기만 하여 점점 우리의 용기도 위축되며, 체념 속에 시들게 된다.

아니,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기 이 교회와 함께 계신다. 아니 악마적 소굴에도 함께 계신다. 그가 함께 계신 것으로 우리의 생사, 회락, 복, 불의, 수난, 영광의 차이의 담이 무너져야 한다. 혹은 배가 전복되더라도! 그가 함께 계신 한 그것도 좋다! 이 같은 확신이 없는 자가 바로 믿음이 없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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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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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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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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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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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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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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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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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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