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삶을 보는 데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삶을 한 경주장에 나선 선수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에 바쳐질 제물로 보는 것이다. 이 두 관점은 바울의 인생관을 잘 드러낸다. 스포츠 경기는 헬라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린도의 지역 경기대회, 에베소의 이오니아 전체의 경기대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의 전국 경기대회다. 이 경기대회에는 헬라 내의 국가도시가 모두 참가하는데, 그때는 비록 전쟁 도중이라고 해도 한 달 동안 휴전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로 지녔다. 이때는 그 대회의 상을 얻기 위해서 각 나라가 총동원해서 훈련을 한다. 경기의 목적은 물론 최후 승리에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반드시 경쟁의 승리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경주하는 사람이 아무리 뒤떨어졌어도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목표에까지 달려서 "골인"해야 한다. 바울은 이 같은 헬레니즘 영역의 스포츠 경기를 구경한 듯하다.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헬라사회에서도 물론 제물을 드리는 의식이 성행했다. 그들은 어떤 축제 때나, 제물을 성별하게 제단에 바치려고 그 위에 제주(祭酒)를 부었다. 그뿐 아니라 식사 전후에도 그런 예식을 했다. 유대교에서도 물론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예배 시에 제물을 드린다. 그 제물에 대한 규례는 엄격하다. 제사장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일정한 기간은 성생활도 하지 않고 죽은 시체도 보지 않는다. 제물은 무엇보다도 깨끗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상처가 있어서는 안 된다(레위 21, 17-11. 22, 2; 민수 19, 2; 신명 21).
제물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린다. 그것은 바로 자기 생명을 바친다는 상징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상(像)으로 삶을 위하는 데 무슨 뜻이 있는가? 우선 공통된 것은 삶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은 "무엇"을 위해 있을 때 참 삶이다. 그것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지는 꽃이나 풀과 같은 자연현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과의 관계를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삶은 "나"를 위해 존재할 때만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해 오던 그대로 … 지금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오"라고 한다. 이것은 경주장에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잘 뛰었다. 마지막까지 쉬지 말고 방심 말고 계속 뛰어라"고 격려하는 코치의 말과도 같다. 삶은 전진이다. 골인하기까지는 이만하면 되었다가 없다. 거기에는 휴식이나 중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경주하는 자에게 "순종"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순종이란 바로 믿음의 내용이다. 바울은 믿고 순종한다(로마 1, 15)고도 하며 단순히 "순종"이란 말로 믿음을 대신 하기도 한다(로마 15, 18).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바로 엄숙성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심정을 나타낸다(출애 15, 16; 이사 19, 16). 경주자는 승리를 확신해야 한다. 확신 없는 경주자는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확신은 동시에 그의 맡은 임무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그가 전체를 대표한 것임을 알면 그의 맡은 일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삶에 대해서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바울도 이 삶이 순풍에 돛 단 것 같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장애물 경주장과도 같다. 그럼 바울은 인간의 능력을 과시해서인가? 아니, 그가 말하는 믿음(순종)이란 바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의 믿음을 뜻한다. 이 철저한 구원의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로마 10, 16; 고후 10, 5).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철저한 은혜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러므로 그것은 수동적이며 개방적인 행위다. 그런 뜻에서 믿음 대신 순종이라고 했다. 인간은 이 영원한 뜻 앞에서 있다. 그러므로 그 삶은 엄숙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현실이다.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다. 그 엄숙성 앞에서 떤다.
바울은 "여러분 속에서 활동하셔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활동한다"(에넬게인)는 헬라어로 우주 또는 자연의 힘의 발휘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바울은 이 말을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데 전용하고 있다(고전 12, 6). 하나님은 사람에게 활동할 의욕을 일으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고야 만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삶의 좌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삶의 보장이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렵고 떨릴 수밖에 없다.
바울은 "흠잡힐 데 없는 순진한 사람",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한다. 제단에 바쳐질 제물을 연상케 하는 권고다. 신명기(32, 5)에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흠이 있는 비뚤어진 종류"며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역으로 이용해서 그들의 바른 삶의 자세를 권고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라는 말 과는 다르다. 도덕적 완벽이란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 불과하다. 제물이 아무리 성별된다고 해도 짐승을 죽여서 바치는 한 그 자체로 깨끗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인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의 완전성이 그대로 하나님께 인정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이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며 그의 뜻에 자기를 철저히 개방하는 삶이다. 바울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로마 12, 1). 이것은 내 삶을 그를 위해, 그에 의해 살 것을 권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일 자기 완성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면 저주받은 존재일 것이다. 까닭은 그럴 수 있는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로마 8, 14)라고 한다. 이것도 결국 그의 구원의 뜻을 믿는 삶을 뜻한다.
삶을 경주로 봤거나 제물로 본 것은 모든 과거나 현재에 의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표는 골인하는 날, 그 제물이 인정되는 날, 즉 미래적 희망에 의한 삶을 뜻한다. 그 종극적인 날, 그날이 바로 "그리스도의 날"이다. 이날은 경주자 앞에 목표가 확실히 있는 것처럼 확실하며 그날을 목표로 할 때, 그때 인간의 삶은 "생명의 말씀" 안에서 살며 또한 "세상 안에 빛"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권고하는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결심을 하고 있는가? 그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선배처럼 이런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같은 경주장에 달리고 있으며 스스로 제물로써 그 삶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하면" 자기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되며 그날에 자랑아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다 높은 차원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너"의 구원을 찾는 삶이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그 때문에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들 때문에 그에게 자랑이 더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믿는다. 그는 원을 위한 염원으로 차 있다. 따라서 그의 참된 삶은 감옥도 좌절시키지 못한다. 만일 그가 그대로 사형당하고 만다고 해도 그들이 달리는 대열에 그대로 참가하고 있다. 비록 그가 처형되더라도 그들이 흠없는 제물처럼 산다면 그는 그 위에 붓는 제주(祭酒)로서 그 위에 부어져 제물로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의 순교의 각오를 말한다. 그러나 그 순교가 홀로를 위한 것이면 헛되다. 그러나 그의 순교의 각오는 그들을 위해서이기에 죽음 앞에서 그는 기뻐하며, 그 기쁨을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이로써 바울은 진정한 사람의 좌표를 죽음의 각오와 더불어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