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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실존
빌립보서 3장에 의하여
서언

대체로 사람은 부모의 배 밖에 나올 때 주어진 테두리를 넘어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다. 그것이 숙명(宿命)이라서도 아니고 또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는 난 자리에서 그대로 분간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시들고 만다. 그런데 가끔 역사상에는 자기에게 마련된 테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 소리지르고 쓰러진 이들이 있다. 이들을 사람들은 천재니 영웅이니 하고, 그들의 한일을 혁명이니 독창이니 한다. 그런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 자체를 발견함으로 되는 일이다. 참 자기, 즉 자기실존을 실감했을 때 지난날에는 자기를 위해 있는 것으로 알던 것들이 오히려 자기를 감금하고 혼미하게 하여 마침내 그대로 깨지 못한 채 죽여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숨가삐 찢고 뛰쳐나와 자기가 발견한 실존에 알맞는 새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새로 만든 테두리에 안일하려다가 또다시 그대로 감금되어 결국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상에서 바울 사도와 같이 생애에 있어서 너무나도 극적인 전환을 하되 철저히 한 예는 볼 수 없다. 그는 한때의 자기(테두리)를 뛰쳐나은 것만이 아니라 그는 뛰쳐나와서 자기를 사로잡았던 그 테두리에 대한 실랄한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는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되 그는 뛰쳐나온 자기를 위해 제 손으로 또 하나의 테두리를 만들고 안일하지 않았다. 정말 지치지도 않고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진실로 바울이, 사울 안에서 갇혀 있던 실존이 발견되었을 때 되었던 일이다. 빌립보서 3장은 그의 이러한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여기서 "너희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한다. 옥중의 몸으로 있는 바울은 자기 안의 환희를 억제하지 못하는 듯 여러 차례로 기쁨을 말하고 또 권한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할 경지를 설명하지 않고 뒤이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하여 그들 앞에 투쟁해야 할 대상을 극렬한 말로 가르친다. 그 대상이란 곧 무엇으로든지 그가 전하는 복음의 빛을 흐리게 하거나 또 사실상 복음의 절대성을 짓밟고 자기들의 육체의 자랑거리를 내세우는 사이비한 개인이나 단체를 말한다. 그 중에도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사실상 그리스도의 속죄의 절대성을 흐리게 하는 무리에게 극단의 분노를 머금고 있다.

바울은 저들에 대하여 반발적으로 구원에 할례가 조건이라면 너희같이 육체적 조건에 신뢰하는 그런 따위가 아니고, 오히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우리가 참 할례당이라고 한다.

바울은 인간적인 자랑을 무엇보다도 원수같이 맹렬이 배척하고 있는데 이것은 혹은 그러한 것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허세 아니면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오는 편견이라고 일소해 버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가장 정통적인 공적이 있는 베냐민 지파고, 또 히브리인으로서도 외국에 물들지 않은 순 히브리 말을 하는 히브리인이고, 히브리인으로도 히브리인의 절대 자랑인 율법에 있어서 흠할 것이 없는 자되,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그것과 이질적인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마침내 기독교 박멸 운동의 선봉에 설 정도로 정열적인 투사였다는 것을 토로한다.

바울은 과연 자랑할 것이 충분했다. 희랍의 어떤 사나이가 희랍인의 사나이된 자랑을 했거니와 이는 히브리인 중에도 가장 도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나가서 그는 학문으로는 당시 최고의 학원인 가말리엘 문하였고, 사회적 지위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경제적 실력이 충분했던 것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당당한 바울이 아닌가.

그 자신도 한때 그렇게 생각한 사울이었다. 그런 것만 충실히 갖추면 되는 줄 안 사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무장을 한 사울은 예수라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남으로 동요를 일으켰다. 그가 기독교도를 핍박하는데 선봉이 되어 눈에 피를 흘린 것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증거이다. 절대한 것으로 알고, 자기의 삶의 바탕으로 디디고 있는 그 율법이 새로운 힘 앞에 상대적인 것이 되는 것을 느낀 사울,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그의 생사의 문제이기에 그는 더 지체할 수 없이 기독교 박멸 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율법을 절대한 것으로 수호하는 일이 곧 자기가 사는 길인 줄을 절감했기에 그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선 그가, 생명을 내건 대결을 칼을 들고 다메섹 도상에 오른 그가, 그 길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났을 때 응당 결전해야 할 자기가 어디론지 없어졌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그 자랑거리 히브리인이라는 팻말, 바리새인이라는 권위, 할례받은 육체, 그 지식, 그 공적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없다기보다 그러한 장식품은 그 곁에 아무 쓸모 없어 내어버린 배설물같이 버림받아 쓰러져 있었다. 그 빛 앞에 그것은 너무도 추한 것이었다. 그것은 영원한, 그의 앞에 허무 그 자체였다. 바울의 실존은 히브리인에 있지 않았다. 지식에 바울이 담겨 있지 않았다. 율법의 행위로 꾸민 그 속에도 참 바울은 살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섭고 허무한 일은 그가 그렇게 산 동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일이었는데, 자기가 이날까지 믿고 의지하던 그 믿음, 그 하나님도 자기와 상관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단지에 의해 꾸며졌던 그 황홀한 궁전과 그 영화는 순식간에 어디로 없어지고 자기는 비참히 홀로 빈들에 벌거숭이가 된 것을 발견하고 놀라던 목동과도 같이, 이날까지 자신만만하게 꾸미고 살던 그런 삶의 근거는 순식간에 어디론지 없어지고 바울은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산 줄로 알았던 바울은 실상 산 것이 아니었다. 다된 줄 알았던 바울은 사실 한 발짝도 못내딛었다. 무엇인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자랑스러웠던 바울은 오히려 그 가진 것이 참 사는 것을 방해하는 더러운 것이며 독사 같았던 것을 느끼고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7)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8)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그의 고백인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서 자기 밖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잘 훈련되고 잘 통일 조화된 줄 알았던 자기 자체도 실상은 모순과 분열 속에서 지리멸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라는 로마서(8장)의 애절한 고백은 이런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로 통일된 바울인 줄 알았더니, 실상은 동경하는 자기와 불응(무능)하는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2

한동안 근세를 휩쓸던 낙관주의는 밖으로 세계대전의 비참과 안으로는 키에르케고르를 발단으로 하는 실존철학자들에 의해서 그 기만성이 여지없이 폭로했다. 그 동경의 면으로만 보면 사람은 과연 위대하고 황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동경에 대해서 그것을 성취할 능력의 면으로 보면 끝없이 허무한 존재인 것을 저들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키에르케고르는 끝없이 위대했으나 그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디딜 바탕을 잃어버려야 하는 비참이 또한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불안과 절망으로 떨었다. 위로 향하면 할수록 끝없는 무한이 아득하고, 아래로 굽어보면 볼수록 끝 없는 허무가 아찔한 그 사이에서 허공에 떠 있는 중간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떨고 있는 파스칼이나 동물과 초인이라는 한 몸에 두 머리를 갖은 괴물 같은 것이 끝 모르는 시퍼런 운명의 바다에로 추락되는 자기 실존에 떨고 있는 니체나, "주검으로의 생"이라는 기구한 숙명 앞에 당황해하는 하아데거나, 무변대양(無邊大洋) 위에 파닥이는 한 마리 나비같이 무한 앞에 결국 난파될 자기를 놓고 떨고 있는 야스퍼스나 다 함께 제멋에 겨워 깊은 잠에서 몽롱한 인간에게 야무진 경종을 울렸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저들보다 앞서되 시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체험에 있어서 앞선 이는 바울이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주랴." 이 거금 이천 년 전의 유대인 바울의 부르짖음은 사변으로서가 아니었다. 어떤 반동에서도 물론 아니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비명이었다. 머리로서의 심연이거나 푸른 바다가 아니라, 그것으로 정말 더 살 수 없이 부르짖는 비명이다. 같은 비명을 부르짖으면서도 니체니, 하이데거니, 요새 사르트르 같은 자의 오히려 그 비명, 또는 절망을 어떤 용광로라도 된 듯이 오히려 그것을 거쳐서 "초인"이니 무엇이니 해서 더 괴상한 자기로 변장하여 연명하려고 한 데 대해서 바울의 비명은 그것으로 그대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 비명 앞에 할례받은 것도 학문도 율법도 히브리인됨도 아무 구원의 닻줄을 던져 주지 않으니 그는 죽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즉 누가 나를 구해 달라고 할 때 자기 안에는 아무런 구원의 손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허무한 것을 의지하고 산 바울이었다. 꼼짝 못하는 허깨비인 그것을 믿어 살 줄 안 바울이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는 말이 연달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모두 살아난 사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구절을 그림을 그린다면 "건져내랴"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사이에는 무덤을 그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절대로 연속문이 아니라는 것, 정말 사울의 주검과 바울의 삶이라는 다른 일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백해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라!"(갈라 2, 20)라고 했다. 즉 그것은 사울의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 주어진 생명이었다.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생명이었다. 즉 자기를 버림으로 죽은 사울은 다음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는 자기를 발견했는데, 그 바울은 우뚝 홀로 있는 바울이 아니라 "Paul in Christ"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는 바울, 그것이 참 바울의 실존이었다.

사람들은 바로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 자꾸 두르고, 지니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진 것, 두른 것이 그를 사실 감금해 그대로 시들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한 삶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야 한다고 보아 어떠한 것에도 권위를 주려고 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침없이 내리 쏟아지는 급류처럼 허무에로 몰입되고 말아 버린다. 갓난아기의 삶은 둘러싼 담요에 있는 것도, 홀로 잘 뒹구는 데도 있지 않고 오직 그 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 있다. 어머니를 떠나서 아기의 참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어머니 품에 있는 아기" 이것이 정말 아기의 실존이다. 사람의 참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있는 것이지 그를 떠나서는 없다. 사람의 자유는 이 땅에 무엇을 의지하는 한없는 것과 같이 또 아무것도 디디지 않고 있을 수 없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지구 밖에 지점을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말했거니와 과연 이 땅에서 자유하려면 이 땅 밖에 디딜 지점을 갖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지점인 것이다. 그를 의지함으로써 정말 참 자유한 삶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지점이란 것을 어떤 증거로 알며 또 거기를 어떻게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로서는 능동적인 결단을 했다고 고백한다(8, 9).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기 위해, 그의 부활의 생명에 참예하기 위하여 자기 포기의 결단을 했다고 한다(10, 1). 이러한 결단은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험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모험한 것이다(9). "믿음", 그것이 그에게 유일한 삶의 다리였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뛰어든 거기에 바울의 실존이 있었다.

3

그러나 바울의 실존이란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웠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이 위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1-14). 바울은 이미 얻어진 것에 있지 않았다. 다 되었다 하는 데 그의 실존은 없었다. 그의 품에서 발견된다는 일은 현재이면서 미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도상에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실존은 요전 순간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이루어 놓은 바울과는 상관이 없다. 뒤엣 것만을 회상하고 되풀이하는 데 바울의 삶이 있지 않고, 오직 앞으로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는 데 그의 실존이 있었다. 정말 바울은 쉴 새 없이 달리고 달렸다. 그는 달리되 시간과 공간을 역류해서 달렸다. 그의 몸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몇 바퀴를 도는 동안 그의 혼은 지평선 너머에로 자꾸 달리되 설 줄을 몰랐다. 빚에 몰린 빚꾼처럼, 칼을 든 원수에게 추격당하는 죄인과도 같이 자꾸 달리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참함도 장한 일도 아니었다. 오직 거기에 그의 실존이 있었을 다름이다.

이러한 바울은, 이렇게 달림으로 있는 바울은 달려가면서 우리에게 외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눈물을 흘리면서(18) 외쳐 이러한 자기, 즉 다된 바울이 아니라 달음박질하고 있는 그 자기를 본받으라고 소리친다. 이 바울의 눈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역행하는 여러 사람들(18) 때문에 그러했다. 저들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실상 그 관심은 땅의 것에 부심하므로 모르는 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생활의 한 장식품이 되어, 히브리인이고, 할례도 받고, 지위도 가지고, 돈도 모으고, 가정 재미도 보고, 그리고 예수도 필요하다는 식의 예수쟁이였다.

실상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구상을 위해서나 공상의 유의를 위해서나 생활의 진고를 메꾸기 위해서 종교라는 모호한 것을 생활에 끌어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무리가 교회에도 얼마나 횡행하는지 모른다. 저들은 예수에게 향하 가는 게 아니라 예수를 하늘에서 끌어내려다가 자기의 삶을 변호하는 데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야말로 십자가의 도를 역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의 참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저들의 자랑거리는 그 파렴치에 있고, 저들의 온갖 생각이 뱀처럼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땅에 배를 붙이고 이상(理想)이니, 형이상(形而上)이니, 종교니 하는 것은 다 종교의 원수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외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라고 함으로 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이 땅에서 지나갈, 없어질 것에 의지하고 안일하고 보장받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그 하늘이란 막연한 허공이 아니다. 거기에서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닻줄이 드리워져 있는 곳을 말한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분이 그의 전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2)고 바울은 확신한다. 니체는 지구라는 피부에 한 피부병과 같은 인생이라고 했거니와 과연 이처럼 비참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허무한 비참 속에서 비약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동질적인 것이 되리라는 것이 바울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또한 그의 실존은 이러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으므로 달음질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이 부르짖음에 호응해서 그의 뒤를 달려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 낡고 때묻은 것들은 내버리고, 그 헐고 굳은 굴들은 집어치우고, 그 무슨 도니 그 무슨 종자니 하는 치사한 냄새도 없애고, 그 스데반 때려 죽이는 무용(武勇)도 그만 내버리고, 그런 것을 정말 똥같이 여기고 앞에 것만 향해 함께 달리지 않겠는가? 세력을 펴서 노회(老會)를 지배하고 총회를 장악하면, 아니 천하를 얻으면 무얼 해? 제 실존은 지금 어느 구석에서 임종을 고하고 있는데.

(1955. 5. 『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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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실존 (빌립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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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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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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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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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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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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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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