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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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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서 산다
빌립보서 1, 18-26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언제나 고쳐 물어야 하는 숙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버리기 쉽다. 그래서 삶이란 죽음이 오기 이전에 지속되는 생물적인 기능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놓고 하는 생각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심장이 정지된 순간일까, 아니면 의식이 도절되는 순간일까? 뇌일혈을 일으켜 아무런 기억도 없고, 사리는 물론 사람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혼수상태에서 수십 일을 인공호흡으로 시간만 끄는 동안도 살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상태를 살았으나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상태가 있다. 그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도 같은 자기를 의식하고 그저 관조하고만 있는 상태다. 무의식 상태는 남의 눈에는 비참할지 모르나 당사자는 의식이 없기에 비참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삶에 아무런 보람도 의의도 못 찾은 채 절망 속에 시드는 자기를 보고만 있는 상태는 가장 비참하다. 그런 뜻에서 인간은 생물 중에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한다.

사람은 생물적인 삶 자체만 관조하면 그것은 죽음과 마주 서 있음을 본다. 그러면 삶은 결국 죽음에로 향하는 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죽음만을 응시하면 그것은 끝없는 수수께끼일 뿐 아니라 결국 지금의 삶도 죽음화해 버리고 만다.

참 삶이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때만 이루어진다. 즉 죽음의 극복 없이 참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생물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생명을 무한 연장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 이미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의 극복이란 삶과 죽음의 대립성을 극복할 때만 가능하다. 어떻게? 이제 바울의 경우를 보자.

바울은 지금 투옥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사형을 당할 가능성도 알고 있으며 어쩌면 석방되어 살아 날 가능성도 보고 있다. 하여간 그는 그의 생사권을 그 손에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투옥 된 그의 상태만을 생각한다면 그 삶은 사형을 기다리는 속수무책의 허무한 시간의 연장 이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형될 가능성만 생각하면 이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같이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20절).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나는 이 둘(세상에 머무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서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23-24절).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 바울은 이미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동경한다. 둘째 그러나 그는 살아야 할 것임을 염원한다. 그러나 그 삶은 삶 자체에의 집념에서가 아니라 "여러분" 즉 "너"를 위한 의무를 위한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삶과 죽음이 대립적인 것으로써, 구분되어 있지 않다. 즉 생물적인 삶과 죽음은 이미 그에게는 상태적인 것으로 그를 구속할 아무런 힘이 없다. 어떻게 이처럼 사람이 삶과 죽음을 이 방과 저 방 사이의 문턱을 넘듯이 그 앞에서 태연할 수 있을까?

바울은 자신의 소원대로 하면 빨리 죽고 싶다고 한다. 이것은 우선 그의 땅 위에서의 삶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를 반영한다. 그의 고백대로(고후 11, 23 이하 참조) 그의 생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에의 동경은 안식에의 동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육체적 삶의 종말이 그리스도와 궁극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향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향수에 주저앉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서 오는 종교적 향수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눈길을 돌림으로 삶과 죽음의 구분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의 존재 근거다. 그는 한때 존재 근거는 제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보장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 그 율법적인 노력은 제 힘으로 이룩한 돈이나 권력 또는 명예 따위를 존재 근거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업적에서 궁극적인 보장을 찾던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새 삶을 출발했다. 그런 뜻에서 그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11, 20)라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이 대립된 자기에서 그런 한계를 철폐한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삶과 죽음에서 자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 난 삶이다.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미 나의 삶과 죽음의 대립 속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 속에서 내 삶을 가지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제 산다는 일만 있다. 이 삶은 이미 육체적인 삶과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오직 "너를 위해서"라는 염원 위에 세워진다. 그는 사랑하는 저들을 위해서는 땅 위에 더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석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에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너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보면 즐겨 죽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나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생사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한 목적에서 그의 존재 근거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적인 삶이 아니라 소명에 의해서 사는 삶이다.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동물성의 지속을 뜻하지 않는다. 참 인간은 "XX을 위하여" 살 때 비로소 사는 것이다. 즉 목적이 뚜렷할 때 인간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전혀 모르는 이가 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다. 또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는 이들이 있다. 가령 돈을 벌기 위해 산다는 경우, 돈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참 목적은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참 목적 아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돈을 번다는 것은 목적일 수 없다. 그러기에 돈을 벌수록 죽음의 공포에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란 바로 삶의 목적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삶 자체며 그러한 죽음은 이미 그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소명에서 살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도의식이다. 그에게는 "나"와 "사도됨"의 구별이 없었다. 사도로서 사는 바울의 임무는 바로 복음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그가 그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것도 바로 이 복음을 그들 안에서 실현하려는 이 사도 의식이다. 복음이 그를 통해서 실현되는 한 그는 살아있다. 따라서 "살든지" "죽든지"는 이미 그에게 문제될 게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석방되면 그의 땅 위의 삶이 매개가 되어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만일 그가 사형을 받아 죽는 경우에는 그의 죽음 자체가 매개가 되어 또 복음의 실현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그의 원대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자살이라도 했다고 한다면 그는 소명을 스스로 포기함으로 육체적으로 죽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소명의식에서 되살아난다. 반면에 단순히 죽음이 무서워 감옥에서 탈출했다고 한다면 그의 목숨은 연장되었을지 모르나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그곳에서 숨져 안식하고 싶은 욕구를 뒤엎고 석방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형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대책도 없이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즐거워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즐거워할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가 소명감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며 소명의식이 뚜렷한 그는 참 살고 있는 것이다.

(1972. 2. 『새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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