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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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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생명력
마가복음 1, 15

세상이 혼란하고 백성이 전쟁이나 재난 또는 악한 지배자 밑에 시달림을 받아서 신음하고 있을 때 희랍 사람들은 하늘이 이 나라에게 현명하고 자비한 왕을 보내 줄 것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 같은 왕이 났다고 외치는 것을 저들은 "유앙겔리온"이라고 했다. 우리가 쓰는 "복음"이란 바로 이 희랍말을 옮긴 것이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설교와 더불어 복음이란 말을 썼다(마가 1, 15). 복음의 뜻은 세상에서 가장 좋거나 선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오는 것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전혀 새로운, 예기하지 못했던 사건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수가 세상에 오심과 더불어 확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태복음(11, 5)에는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고 했다. 이것은 예수의 오심으로 이 낡은 세상에서 숙명처럼 알던 것들이 모두 뒤집혀져서 예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며 그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다.

복음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쓰고 또 복음과 자기의 사명을 하나로 생각하고 복음에 대한 불붙는 확신을 나타낸 이가 바울이다. 그는 복음을 설명해서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서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라고 하고 "그 아들은 인간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그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로마 1, 2-3)고 하면서 자기의 사도직은 바로 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은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의 성취를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와 우리가 꼭 같은 사람으로 보냄 받았으나, 그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그 죽음마저 정복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사람의 최후의 원수요,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의 뜻을 설명할 때 언제나 율법과 대치시켰다. 율법이란 의무와 권리의 세계다. 사람이 어떤 권리를 가지려면 그에 앞서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그 의무를 다할 때만 권리가 주어진다. 종은 맡은 일을 다 해야 먹을 권리가 있고 범죄자는 법에 따라서 처형을 다 치룬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인이 될 권리를 가지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그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 율법의 세계다. 이에 대해서 복음은 내 공로나 내 의무의 수행 따위와 전혀 상관 없이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말한다. 가령 복음서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배신했던 아들이 자기 한 일로 보아 종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명분을 그대로 줄 뿐 아니라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세계인데 대해서 그 맏아들의 불평은 율법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더 중요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의 위력에 대한 신념이다. 바울은 억울하게 투옥되었다. 그런데 그가 투옥됨으로 세 가지 일이 벌어졌다. 하나는 투옥됨으로 관리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둘째는 그를 사랑하는 형제들이 그를 대신하여 복음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인간의 편에서 생각하면 오히려 괘씸한 일일 수 있다. 그를 투옥한 관리들, 그가 투옥된 것을 오히려 기회로 아는 사람들! 그러나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한다. 그는 투옥된 것을 기뻐한다. 까닭은 그가 "당하고 있는 일이 도리어 복음의 전진을 가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빌립 1, 12). <복음의 전진>(advance of the gospel), 이것은 복음의 생명력을 말한다. 복음은 오히려 악조건, 악한 마음까지도 이용하면서 전진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파된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인간들의 마음의 동기와도 상관없이 그 자체로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 신념이 그로 백절불굴의 사도가 되게 했고, 이 사실은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이 되었다.

기독교가 이 세계에 전파된 사실을 빼고 기적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갈릴리 한 구석의 적은 수의 촌부들, 그것도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혼비백산했던 패배의 일꾼들이 어떤 계기로 새 힘을 얻고 전파한 복음이 당대의 학자요, 종교 지도자요, 기독교에 반기를 들고 박해에 혈안이 되었던 바울을 굴복시켜서 이방 선교의 총수로 내세워 마침내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까지 가을 숲이 불에 타서 확산 되듯이 복음이 퍼져 나가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무식한 대중"은 손에 바늘 하나 쥐지 않고 처음부터 닥치는 박해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굴하지 않고 전진에 전진을 계속했다. 저들을 로마의 그 막대한 정치력과 군사력으로도 근절하지 못했음은 물론 불과 3백 년 내에 로마는 그리스도교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같은 외적인 힘의 굴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복음의 힘이었다.

이 복음은 수천 년 유대민족의 배타주의의 쇠사슬을 끊고 헬레니즘의 세계에 진출했을 때 그 사회는 종교적으로는 희랍과 중동의 종교들이 무수하게 난무하여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윤리면에서는 쾌락주의가 철학의 뒷받침까지 얻어서 성적 문란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난마와 같은 사회 속으로 복음이 전진할 때 바울이나 바나바와 같은 사람 외에 별로 알려진 사람도 없는데 이 같은 적은 무리가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서는 곳마다 종교를 정화하고 윤리가 확립되고 쾌락주의적인 삶으로부터 모두 복음 전선에 나서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전향하게 했는지는 바울의 신념처럼 복음 자체의 전진의 힘! 그 생명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바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 하는 양상을 띄었던 것이다.

그러나 득세한 기독교는 천여 년을 지나는 동안 인간적인 타당성으로 복음의 뜻은 소외되고 하나의 권력 단체로 부패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복음의 생명력은 루터, 칼빈 등을 중추로 한 적은 무리에게 새롭게 약동하여 그 천 년의 기독교의 이름을 빌린 권력의 체제를 뚫고 다시 복음에 의해서 죽은 것들이 되살아 나는 기적을 일으켰다. 루터의 복음에의 새로운 선언은 잠자던 것 같던 전체 안에서 곳곳이 죽음을 차고 일어나는 해골처럼 생기를 일으켜 복음을 위한 정열로 봉기하여 이른바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곡절을 거치었으나 복음은 인간들의 약함과 악함을 언제나 극복하고 새롭게 다시 살아 마침내 한국 땅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또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은 그것에 인간을 노예화하고 그런 것에서 오는 행복의 약속밖에 어떤 다른 기쁜 일은 생각하려고도 않게 만들고 있다. 오늘의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이 주는 "편리"라는 것이다. 이 마당에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기쁜 소식"을 믿고 전한다는 우리 자신의 행복의 궁극적 기준은 어디 있는가? 우리는 정치나 자본의 힘을 최종적인 것으로 믿지 않는가? 우리 삶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약속"이 복음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인가?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오늘의 나의 삶에서 궁극적 기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기쁜 소식"에 마음을 뺏기고 또 마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을 들은 귀가 막히고 복음을 보는 눈이 어둡고 복음으로 일어서야 할 팔다리가 마비 상태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새로운 외침으로 외쳐져야 한다. 그것은 복음의 전진, 그 생명력은 믿는 자에 의해서 외쳐질 것이다.

참 복음의 힘을 경험하는 자는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 눌린 자, 가난한 자임을 알 때 가능하다. 어두움 속에 있음을 아는 자만이 빛의 뜻과 현실을 알 수 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만 생명력이 된다. 믿는다는 것은 희망하는 것이다. 믿는 자란 아직 나의 궁극적인 구원은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다. 그런 뜻에서 미래에서 오늘을 사는 자를 복음에서 사는 자라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오신 그리스도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으로써 복음에서 살았다.

복음은 반드시 전진한다. 그것은 어떤 악조건도 극복하고 오히려 그것은 신념이 복음의 생명력을 구현했으며, 우리는 이런 신념의 역사적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암흑의 측면도 마침내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도약대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 복음의 생명력을 체험하는 길이다.

(1973. 8. 『신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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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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