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 18, 9-14

스스로 옳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스스로 혼자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한 사람이 아니며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 옳다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세리였고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이 본문은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정확히 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리와 바리새파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흔히 바리새파 사람하면 악한 심벌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바리새파 사람 자신은 결코 그런 사람들이 원래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가 로마 식민지가 된 후 어떻게 하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을 할까 하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소위 많은 메시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날의 게릴라들과 같습니다. 폭력을 가지고라도 이스라엘을 회복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마카비 독립운동 같은 것이 그런 전형적인 스타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런 운동이 다 패해 버리고 다시는 군사적으로 외세에 독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이스라엘 지도자층인 제사장들, 사두개파 등 종교지도자들은 마침내 그들의 삶의 자세를 바꾸어 친로마적인 소위 친여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런 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택한 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과 같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제국을 치려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 귀족들처럼 친로마적인 그런 비겁한 상태에 빠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한 일은, 외적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도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굴종하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선 민족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할 일은 내적 정비부터 해야겠다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식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강화하고 보편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주전 135년경에는 이들의 운동이 큰 영향을 끼쳐서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는 청교도적인 도덕과 종교생활이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평민들에게는 율법을 중심한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을 세밀히 연구해서 인도하여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세리는—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세리가 있고 세리에 관용한 듯해서 간단히 용납하지만 사실, 세리라고 하면 지금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 당시의 세리는 로마 정책에 의존한 친로마파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금 받는 일을 간교하게 해서 자기들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그 나라의 주민들에게 청부를 맡겨 일정액을 걷어 로마에 상납토록하고 그 이상은 세리로 하여금 먹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 정부에 일정한 계약금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수입이 되므로 돈을 거두는 데 혈안이 되어 악착같이 거두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직업은 그야말로 인간을 정당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리와 바리새파 사람을 대조시켰다는 것은 우선 이 말씀 자체가 그 때 그 예를 볼 수 없는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이들은 대조시켰을까? 우린 얼른 이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바리새인의 교만한 태도가 싫다. 그 교만한 것이 딱 질색이다. 반대로 세리는 무엇보다도 그 겸손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게 이해해 버리면 너무 간단화하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 안 되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까? 만일 "바리새인이 안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는 순간 여러분은 바리새적 교만에 빠져버립니다. 반대로 "나는 바리새인은 질색입니다. 차라리 저 세리와 같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여러분은 처리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지금 처해 있는 어떤 죄악이나 혹은 세리의 처지와 같은 그런 데 빠져 있는 데 만족하겠습니다"라는 결론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좀더 우리는 이 내용을 세밀히 들여다봐야 이 의미를 알겠습니다. 가능한 대로 우리는 이 비유가, 이 말씀이 정말 주님의 말씀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믿기 때문에 좀더 정확하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지금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그는 "나는, 나는" 하면서 또 "이런 것을 했습니다. 저런 것을 했습니다"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업적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내가 흠잡을 것이 없게 산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의식할 만큼 산 일 자체를 예수는 결코 과소평가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를 자명적으로 인정해 줄 것이라는 전제 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점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공로의식인데, 그 공로의식이 어디서 형성되었는가 하면 분명히 이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고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원문 자체로 봐서도 가장 비웃는 표현입니다. "저 따위 종류와는 다르게…" 하는 이 말이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 사실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남과 비유함으로 얻어지는 공로의식입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기를 찾는 것은 비극입니다. 비교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처럼 허무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나 자신만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기점을 잃어버렸다는 것, 또 반면에 남을 대할 때도 남은 언제나 나를 재확인하기 위한 수단,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 약점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 이렇게 내세우는 것은 자기의 기준을 자기 안에 갖지 않고 밖에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일종의 불행한 인간입니다. 기준을 밖에 둔 사람은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일종의 중간존재—"내가 무엇과 비교하는 데 따라서 나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는 그런 존재로 타락합니다. 이렇게 내 자신을 어떤 기준을 못정하고 무엇과 비교하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되어 버립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정면으로 보지 않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종당에는 남과의 관계에서 남을 헐뜯고 무시해 버리는 데서 자기 긍지를 찾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남의 가치를 무시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 이런 인간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하는 이 말 자체,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신의 윤리적인 자아이거나 종교적이고 경건적인 생활이거나 간에 그런 위치에 선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희망이 없고 보잘 것 없는 그런 자랑일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세리를 보십시오. 기도할 장소에도 제대로 못들어가고 멀리서 눈을 감히 하늘에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 이것은 전부 외적인 행동 표현인데, 말은 극히 간단한 한마디만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여기엔 첫째로, 아무 변명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렇습니다. 저러니까 저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 바리새인과 같이 남과 비교해서 "나는 이 바리새인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또 그는 "이 잘못을 했습니다. 저 잘못을 했습니다" 하는 것처럼 "이것을 못했습니다" 하고 하나하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분이 아닙니다. 전체로서 '죄인입니다' 하는 자세, 이야기할 것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자비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뿐입니다. 바리새인과 비교해서 세리의 입장을 본다면 그는 참 자기에 선 사람입니다.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놓았습니다. 밖에 의해서 자기를 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섰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맞서서 옆이 없습니다. 비교할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전체로서 하나님과 마주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정말 기도를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의 자기 찬양을 한 데 비해서 세리는 참 기도를 했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전체를 내맡기는 기도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의 비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에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는 이 판결입니다. 이게 무슨 판결인가? 우리는 간단히 처리해 버리지만 세리는 세리로서 지은 죄를 보상하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앞으로 세리를 그만 두겠다고 서약한 일도 없는데 어떻게 그를 당장 의롭다고 판정을 해서 자유하게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하는가? 우리는 이 판결에 승복할 수 있습니까? 지금 오늘 한국 교회는 절대로 이 판결에 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가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극히 간단한 판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더 종교적으로 되었다거나 경건해졌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이것은 완전히 조건 없이 해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바로 제 집, 자기 참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갔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욱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우리의 교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이천 년 전의 이 같은 혁명적인 선언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끝으로 이 본문에 주의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맨 처음 구절입니다. "자기네들만 옳은 줄 알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한 비유"라는 말입니다. 주(註)로 되어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누구에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만 옳은 줄 알고 남을 비판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한 일만 옳은 줄 알고 여기에 옹호하는 것을 문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이라는 여기에 바리새의 초점이 있습니다. 이 독선자에게 하신 말씀, 옳은 일을 하려는 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하는 것만을 유일의 것으로 알고 남을 멸시하는 생각! 이것이 바리새적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바리새적인 인간의 문제는 바로 '잘 믿는다' '경건하다'고 하고 '열심히 기도한다'는 무리들 스스로에게 거의 다 배어 있습니다. '자기들만'이라는 사람, 우리는 모름지기 그런 데 빠지지 않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은 전혀 다른 새로운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저런 것은 애당초 희망이 없다, 기대할 여지가 없다' 하는 바로 그런 지역, 계층, 부류의 인간들 속에 오히려 교회적인 인간보다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리부터 외적인 금을 그어 놓고 여기는 찾을 여지가 없다고 판정해 버리는 데 대해 아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밖에 오히려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규정해 버리는 일을 지금 해도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벌써 구별했는데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문 밖이냐, 문 밖이 아니냐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그 지역을 우리는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바리새즘적 사고가 이런 것을 찾으려는 우리를 막아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영역과 교구는 이 세계 전체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세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1973. 3. 20.)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