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두 인간형
누가복음 18, 9-14

사람을 "무엇이냐"(Who)라고 묻는 것은 희랍(철학)적인 흥미지 히브리 "성서적"이 아니다. 성서에서는 무엇이나 "어떻게"(How)라고 묻는다. 이것은 그 질을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을 묻는 것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실재를 "관계"에서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인생관으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유아독존"이라는 것은 성서가 모르는 존재양식이다. 성서에서는 창세기 맨 처음에 사람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에서 사람을 보는 본질적 입장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두 질문은 공간적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묻는 것이다. 즉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와 "가인아 너는 네 아우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이다. 이 두 가지 물음에서 성서의 인간관은 "하느님 앞에 이웃과 더불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전제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을 살피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파 사람은 율법의 생활화를 목표로 민족 운동을 편, 스스로 엘리트로 자부하는 그룹이다. 저들은 초기에 집권자들에게 박해를 받은 일이 있으나 마침내 저들의 주장이나 설계가 집권자에게 받아들여질 때부터 저들은 기존질서를 지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과 파수꾼의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분류하여 심판하는 경찰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저들은 우월감에서 교만한 상징적 인간형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세리는 "민족 반역자"의 심벌이다. 저들은 그 직업 때문에 그 민족사회에서 소외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세리"라는 하나의 특수유형으로 매도해 버렸다. 그러므로 세리는 이른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더불어 비인간으로 접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세리라면 모든 면에서 으레히 나쁘다는 전제를 갖기 때문에 그 행동을 주목해 보려고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의 기도하는 자세나 내용에 주목한다. 이것은 "바리새"나 "세리"에서 일단 인간으로 환원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주목하는 예수는 "하나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새파사람이 아니었다"고 선고한다. 어떤 근거에서?

바리새파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도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고 한다. 이것이 기도인가? 그것은 자기 시위가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앞선 문제가 그 인간형이다.

이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계속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자부심에서 산다. 극단적 표현으로 "저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감사한다"고 하는데 이 말에서 지시대명사 "Hutos"는 아주 멸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저 따위"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이 바리새인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업적을 시위하며 자신을 자랑한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자세다. 그러면 비록 기도한다고 해도 그는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과의 관계에 섰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자기 시위가 가능하겠는가? 한 걸음 나가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웃은 이미 사람이 아니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기 위한 상대적 기준 이상이 아니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의식하므로 자기에게 몰입해 버린다. 그는 바리새라는 "구별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과 꼭 같은 자세를 구체적으로 노출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산 관계에 서 있지 않다. 그는 제 멋 안에 감금되어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하고 말했을 뿐이다.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치며 죄인으로 자백하며 자비만을 기대하는 그야말로 하나님과 산 관계에 있음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참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기 때문에 감히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변명하거나 시위할 생각을 못하고 자신이 그 앞에 부족한 것을 의식하며 오직 그의 자비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고 의식한 증거다. 세리가 죄인이라는 규정은 바리새파를 선두로 한 유대 민족사회가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변명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전제한다. 이것은 사랑은 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원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웃과 산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써 예수는 바리새사람이 아니라 그 "세리"가 "하나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갔다고 선고한 것이다.

사람을 범주화하는 것은 이웃과의 산 관계를 깨는 것이다. 지위나 직업 또는 그의 업적이라는 의복으로 정장하고 자기를 시위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사람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과의 산 관계에서는 떠난 사람이며 또 사람을 그런 상태에서 판단하는 것도 사람을 이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벌거 벗은 알몸이다. 스스로 그렇게 알고 또 남을 그렇게 볼 때만이 사람은 사람으로 바로 평가된다.

어떤 이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설교할 때 "당신들이나 여기 그리고 저기서 당신들을 지키고 있는 유니폼에 싸이고, 금테를 두른 저 교도관 나리들도 옷을 벗기면 꼭 같은 사람일 뿐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곳에 초청을 못받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 이웃과 더불어 진실하려는 사람은 사람을 알몸으로 벗기고 판단해야 한다. 사람을 범주화해서 매도해서도 안 되거니와 스스로 자신을 기득권자로 내세우는 자는 절대로 옳은 기도를 드릴 수도 없거니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사람을 계층적으로 구분, 선택하고 평가하는 풍조가 만연하는 것은 웬일인가! 교회가 크면 클수록 이같은 현상 이 정비례하니 커진다는 것은 예수의 뜻에서 멀어진다는 다른 표현인가?

(1968)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