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보물이 담긴 질그릇
바울의 생활 비밀
고린도후서 4, 7-18
1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눌리지 않고 당황하는 일이 있어도 아주 실망하는 일이 없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몸을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 안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가 처해 있는 어두운 상황과 고된 시련을 통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상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 자신의 고백이지만 개인의 일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체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본연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신앙의 자세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우리말 번역으로 된 <욱여쌈을 당한다>는 말은 원문에선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합니다.

짓눌리다: 어떤 구석에 대고 꽉 밀거나 땅에 놓고 밟는 것과 같은 억눌린 상황.

앞이 캄캄하다: 이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답답한 상황.

궁지에 몰린다: 동양적인 표현을 하면 사면초가와 같은, 돌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

박해를 받는다: 직접적으로 정신과 육체에 피해를 주며 부당하게 간섭을 당하는 입장.

바울은 이와 같이 자기가 선 상황을 밝힙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생애를 정확히 서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 다른 두 곳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4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을 간추리면, 그는 온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천대받는 자가 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학대를 받으며, 집없이 유랑하며, 멸시와 박해와 능욕을 받으며, 마치 이 세상의 폐물, 인간이 찌꺼기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대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가 받고 있는 대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심한 고역을 당했으며, 감옥에도 많이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그리고 스물 네 시간 동안을 아득한 바다 위에 헤매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 강물의 위험과 도둑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사람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 번 밤을 세우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기나긴 수난사의 축도입니다. 그의 수난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오는 것으로, 파선을 당해 표류하거나 사막에서 목마르고 굶주리게 되거나 들짐승의 위협, 강도를 만나는 … 등의 일들이며, 다른 하나는 의식적으로 적의를 품고 그를 괴롭히며 여러 모양으로 박해하는 일들입니다. 바울은 지금 발로 내리밟듯이 되고,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사면초가에 홀로 서서 계속적으로 정신적, 육체적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수난은 2000년 전에 된 일이고 상황에 있어서도 오늘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당한 것과 같은 수난이나 난관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오지 않고 바울에게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바울과 같이 특수한 소명감에 자기가 가진 것을 배설물같이 내버리고 세상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역류하는 삶을 선택한다면 과연 바울이 당한 처지가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때로는 특별한 소명감에 불탈 수 있을 것이며, 세계 또는 내가 사는 사회에 부정이나 불의가 횡행하는 것을 보면 자기 살 길이나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회의 작은 집단이나, 한 민족이나 세계의 미래를 위해 특수한 각오를 한다면 바울의 수난은 오늘에도 틀림없이 우리의 수난이 될 것입니다.

2

세계는 지금 이 다음을 예측할 수 없도록 급변해가고 있습니다. 급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치관의 급속한 변동이나 이동을 말합니다. 오늘의 국제정세나 국내 기상도를 보아서 "이것이며" 하고 우리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극단으로 말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은 마치 릴레이 선수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리 내가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쥐고 있으면 곧 무효화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 이 변해도 그때 그때 적응하는 법을 배우며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개발 이래 기계가 인간의 상상이나 생각보다 빨라져서 이제는 기계에 의한 현실에 인간이 적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미래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진단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 몸이 내 생각이나 의지를 따르지 못하는 데에 한탄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 급속한 기계의 작용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몸이나 사고라는 것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정착하도록 되어 있고 또 그것이 필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감으로써 마침내 사람의 생리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착에의 중력과 계속 달리는 동력 사이에서 인간은 균형을 잃고 마침내 극심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대로 템포로 나가다가는 인간은 마침내 뒷문이 없는 차에서 뒤로 내버림을 당하듯이 기계가 휘모는 세계에서 축출되어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벌써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이같은 낙오자들이 속출합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거나 또는 내동댕이질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많은 수가 이른바 좋은 가정에서,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은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은 자의거나 타의거나 간에 이 세계에서 버림받고 밀려나 마취제로써 의식을 몽롱히 하여 세상을 잊으려고 합니다. 지금 서구인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로 정신착란증의 병자가 이렇게 늘어난 때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서구의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도 점차 짙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며 내부적으로 보면 벌써 상당히 만연되어 있는 현상일 것입니다.

정계 안의 권력의 이변이나, 경제계의 이변도 얼마나 충격의 연속인지 모릅니다. 이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는 분명히 바울의 처지와는 다른 양상에 있기는 하지만 짓눌리고 궁지에 몰려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에 진일보해서 만일 사회의 정의나 자기 양심의 관철을 끝끝내 주장하고 실현하려고 한다면 결국 박해를 받고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믿고 살았는지 깊이 반성해 볼 일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동안에 사실상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정신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교육에서도 앞이 캄캄하고 궁지에 몰리고 한없는 박해를 당해도 오뚜기처럼 재기할 능력을 길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있으나 교육은 없다고 말한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오늘의 학교는 어떤 제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일지는 몰라도 인간을 기르는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까닭은 거기에 진리가 없고 산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교육을 받은 인간은 그런 대로 이 기존질서가 존속하는 한 쓸모가 있을지는 몰라도 만일 그것이 변해버린다면 모든 일에 의미 없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분명히 자본이라는 것에 의해 구성된 아성과 대중운동에 의해 형성된 정치조직의 아성이 튼튼히 서 있습니다. 소위 지성인은 이 두 아성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고립화 현상입니다. 결국 연명이라도 하려면 어느 아성에라도 아부해서 문지기 노릇이라도 해야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3

바울은 짓눌러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궁지에 몰려도 버림을 받지 않고 얻어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는 오뚜기입니다" 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오뚜기 같은 힘을 그는 어디에서 어떻게 얻었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엄청난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교육에서 나온 것도, 대학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외적인 인간은 날로 낡아져 가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성을 짓눌리면 쉽게 깨지는 하나의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불사조라 하지 않으며 장생하는 비결을 가졌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리면 아프고 굶주리면 쓰러지는 나약한 인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표현해서 물 한 방울에도 죽어버릴 수 있는 나약하고 가련한 존재라고 했으며,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안에 오뚜기 같은 묘기와 비결이 있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고백하며 이 능력을 질그릇에 담긴 보화라고 합니다.

이 보화는 학교나 책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주는 것은 질그릇을 보수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보화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심으로써 자신을 무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몇 가지의 중대한 신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자각입니다. 그는 자신이 깨질 수밖에 없는 하잘 것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나 다시 일어날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전형적인 논리입니다. 자신은 역시 제한받은 한계적인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칠전팔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가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랑처럼 내놓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담대히 박해를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찾아갑니다. 그는 "질그릇 같은 나를 짓누르고 궁지에 몰아넣고 박해를 가해라, 그러면 나는 깨져도 그 대신 내 안에 담긴 보화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에서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질그릇 같은 나약한 삶이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의 생명처럼 변질된다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일단 깨어지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남으로써 깨어진 나도 다시 살아나리라 하고 그 새 몸을 가리켜 '영광의 몸' 또는 '부활의 몸'이라고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죽으므로써 산다는 예수의 진리를 바울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의 신념은 결국 너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므로써 살아나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입니다. 이 같은 싸움을 장구하게 계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이 같은 용기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더 중요한 신앙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박해와 이 현실은 역시 과도적인 것이요 일시적인 것이라는 신념입니다. 아무리 구조화되었고 아무리 영구화되게 보일지라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면에서 가볍게 봅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상황은 반드시 변하고 끝장이 난다는 종말신앙입니다. 이 종말신앙이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백절불굴하고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종말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혁명사상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터득되나 그것은 참여할 때만 얻어지는 사상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는 바로 이 종말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은 언젠가는 깨집니다. 그러나 혁명의 대열에 섰기에 깨져도 죽지 않습니다.

(1973)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