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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의 삶
마태복음 6, 25-34
문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위로가 되는 것도 없으나 동시에 이것처럼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도 드물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는 네게 아무런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네 염려는 새와 꽃을 조건없이 먹이고 기르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래도 염려가 되느냐? 내가 네게 권한다. 최소한 내일 모레 될 일까지 앞당겨 염려하지 말라. 오늘의 염려는 오늘에 차단하라. 까닭은 오늘 해야 할 염려도 네게 벅차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불안에 떠는 어린애를 품은 엄마의 자장가와도 같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으면 이렇게도 들린다. "오늘의 이 삶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이냐! 네가 오늘 여기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하라. 네가 지난날 당한 많은 어려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계곡을 지나던 일을 생각하라.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했느냐? 네 힘으로 했으냐. 아니 네가 오늘 살고 있는 것은 네 힘으로 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오늘의 삶에 충실해라! 그것이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네 삶은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다정한 말씀이 자장가가 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고개를 든다. 어떻게 염려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제거되야 하지 않겠나? 염려없이 어떻게 생활을 책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염려가 오히려 삶을 이루어 나가는 데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내일의 일을 앞당겨 염려하지 않으면 미래에의 설계는 불필요하다는 것인가? 입을 걱정, 먹을 걱정, 마실 것 걱정도 역시 몸 또는 목숨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새나 풀처럼 그저 아무 준비 없이 낙천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 말씀은 제 힘으로 제 삶의 권리를 쟁취하고 건설해 나가려는 투지를 마비시키는 아편과도 같은 말이라고 반발할 만도 하다.

염려하는 것과 구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항의로써 이 말씀을 쉽게 떠나 버릴 수는 없다. 까닭은 우리는 모두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염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무수한 경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벌써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현실적 인간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염려하는 것 자체를 책망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염려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장가가 아니라 인간이 해결해야 할 기본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인간을 전제하면서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를 명령형으로 받는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받으면 이것은 게으른 자들에게 주는 준엄한 책망일 수 있다. 오늘의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걱정하는 것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없는 증거다. 또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려면 오늘에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받아들아면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책임을 묻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염려하지 않을 만한 준비를 하려는 의욕이 있고 또한 그것을 찾아 헤매도,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선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강제밖에 될 것이 없다. 우리는 현재 일을 하려고 해도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아서, 또는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도 생존의 최저선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날 그날의 끼니 때문에 염려해야 하는 많은 군상들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응수하려면 이 말씀은 또 하나의 문책으로 변한다. 그것은 일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 주어지고, 일할 만큼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책임을 묻는 물음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책이 아니라 위로다. 그러므로 공중의 나는 새나 들의 꽃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힌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동을 하라는 호령일 수는 없다.

그러면 인간은 새나 들의 꽃처럼 그저 될 것만을 기대하면 된다는 말인가? 우리더러 자연물이 되버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을 자연물의 하나로 간주하고 그 평면에서 권고하지는 않는다. 공중에 나는 새, 들의 꽃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힌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사실이나 "하물며 너희야"라고 함으로써 인간을 자연물과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므로 새나 꽃처럼 심거나 거두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에로 돌아가라는 현인의 말로 들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왜 새나 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라고 했는가?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모방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나,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쌉도 하지 않는 꽃은 그저 그 존재성(存在性)을 서술하는 것뿐이고 거기 어떤 당위(當爲)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꽃이나 새가 염려하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는다. 새나 꽃을 말하는 것은 실은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르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의 무위(無爲) 속에 숨은 유위(有爲)를 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인위적 영화(榮華)에 비길 바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자연 자체가 문화(인위적 영화)보다 낫다는 자연주의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배우라는 뜻으로 받을 수도 있다. 솔로몬은 유대의 청자(聽者)들에게 인위적인 모든 영화와 지혜의 상징이었던 것이며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의 아름다움 앞에 격하시킨 것은 인간문화에 대한 비판의 편모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뿌리고, 거두고, 곳간에 모아들이는 노동, 수고하고 길쌈을 하는 삶의 영위를 위한 인간의 노력이 과소평가된 것은 아니다. 또한 비록 인간이 구축한 영화를 격하시킨다고 해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에서 보는 대로 인간을 자연물보다 열등하다고 하지 않는다. 이 <너희>는 물론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새나 꽃을 보라고 했나?

그것은 그것들의 능력이나 자질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근거다. 새나 꽃은 무위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저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장만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저들의 생의 근거를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저들을 기르고 입히는 이에게 직속(直屬)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는 염려라는 것이 없다. 한두 푼에 팔리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떨어진다고 했다. 이것은 그 운명이 그의 손과 뜻에 직속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삶을 위해 염려한다. 이것은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먹을 것, 내 입을 것은 내 힘으로 장만해야 하겠다고 알기 때문에 염려한다. 그러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책임적인 존재 의지에서 꽃이나 새처럼 무위의 존재에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그러나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선 책임적 존재, 그에게 응답해야 할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미 말한 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새나 꽃에게 한 말씀이 아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는 말씀이다. 책임적 존재인 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는 무슨 뜻이 있는가?

사실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거기 단서가 있다. 그것은 "목숨을 위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목숨이니 몸이니 한 것은 곧 삶을 뜻한다. 삶이란 꽃이나 새가 존재하듯이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한갓 생리적인 생명을 의미한다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옷보다 중하다는 강조를 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수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듯이 인간의 삶의 근거도 하나님께 있다. 그런데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만 있으면 삶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것의 노예가 될 때 그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잘 반영한 것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다(누가 12, 13 이하). 풍년을 만난 부자가 곡식과 물건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비유는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의 재산이 그의 목숨을 늘여 주지는 못한다"라는 말씀을 전제한 것이다. 이 비유는 재물에서 그의 삶의 보장을 찾고 염려하지 않는 자에게 오히려 염려해야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방인>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소유에서 자기 삶의 보장을 찾는 자를 말한다. 입기 위해 또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삶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말 참 삶이라는 것인가? 단순히 염려에서 해방되면 참 삶이 된다는 것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여기에서 전환점을 본다. 그것은 <말라>에서 <하라>는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꽃이나 새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며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에서 해방되려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의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할 까닭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의 나라나 그의 의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다. 그의 나라나 의는 기존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는 <그의 나라>라고만 전한다.

새것을 구하는 것, 새로운 하나님의 주권과 의가 지배하는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 또는 탈출을 뜻한다. 그러므로 염려말라는 것은 현실 도피나 체념 따위를 종용하는 권고가 아니라 바로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에 대한 도전의 결단이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려고 해도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며 뼈가 빠지도록 일해도 일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부조리에 찬 현실, 권력과 경제력이 야합하여 약자의 생존권이 약탈되는 현실, 양심껏 살기 위해서 인간의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이 범죄로 간주되는 현실 속에 살면서 단순히 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한 염려 때문에 점점 그런 것에 꽁꽁 묶여 연명하는 것은 사람의 삶이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나만이라도 깨끗이 살겠다고 은둔적이거나 체념적이거나 도피생활에 몰입하려는 개인주의도 참 삶이 아닌 것이다.

분명히 전체의 난국이요 위기라는 것을 의식했으면서도, 일신상의 문제로 염려에 사로잡히거나 그 염려에서 도망하기 위해서 현실을 도피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려는 자는 영원한 염려 속에서 신음하다가 죽으리라!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미끼로 유혹하거나 강요하는 힘에서 해방이 되라는 것이다. 까닭은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나 아닌 너,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문제를 위해서 투신할 수 있는 것이다.

생활의 지혜?

현대인은 <염려>가 인간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느냐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카네기는 염려가 신병의 20%의 원인임을 지적하면서 그 해결의 길로 ① 나는 무엇에 관해서 염려하고 있나를 분석하고, ② 그 결과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밝힌 다음, ③ 그것을 결정, 행동하라고 했다. 윌리엄 오슬러는 "매일의 칸막이" 생활을 제의했다. 그는 스위치를 누르면 철문들이 배의 각 부분과 기계실을 차단하여 일부분이 침수되더라도 전체가 피해받지 않게 된 기선의 구조를 보고 배운 삶의 지혜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와 내일에서 오늘을 차단할 줄 아는 기술 훈련이다. 이것은 "내일이여 멋대로 오라. 나는 오늘을 잘 살리라"는 처세술이다.

이와 같은 것은 염려에서 해방되려는 기술이다. 그러나 왜 그것에서 해방되어야 하는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철두철미 이기주의적 처세의 길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는 것은 오늘의 내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데 필요한 자세다. 그러나 오늘에 충실하는 길은 그들을 합리화하는 일이 아니다. 아니! 오늘의 수고, 오늘의 걱정, 오늘의 기도 그리고 오늘의 행동은 그의 나라와 의가, 내일 이 땅 위에 실현되기 위한 싸움이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이들로 차 있다. 평상시에는 정의니, 새 존재니 하다가고 어떤 위기가 일신상에 미치는 듯하면 먹고 입을 수 있는 자리나 일이 침범될 것을 염려하는 데 노예가 되어 마침내 <그의 나라와 의>마저 왜곡하여, 먹고 입을 일신상의 염려에 바탕을 둔 위장된 주장을 마치 의를 위하는 듯이 내세운다. 그들은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염려해라! 그러면 그 나라와 의는 실현된 것이다"라는 입장으로 탈바꿈한다. 아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리스도인으로, 아니 사람으로서는 살 수 없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옷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고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에 누가 걱정함으로 키를 한 자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에 대해 염려하느냐?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 것으로 넉넉하다.

(1975. 7. 『성서적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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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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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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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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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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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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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성문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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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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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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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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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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