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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복음 19, 37-41

예수께서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그러자 군중 속에 끼어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누가 19, 37-41)

1. 수도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현군이며 패왕인 다윗에 의해 건설된 도성이다. 그는 남북조를 통일함에 있어서 남북조 왕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하여 중간 지대인 폐허 위에 새 왕도를 건설했는데, 이 왕도가 곧 예루살렘이다. 그가 거기에 궁전을 세우고 법궤를 모심으로써 예루살렘은 명실공히 권력과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성전을 세우겠다는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렇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성전은 바로 유대 민족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영광과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했던 곳이다. 이미 B.C. 587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되고, 여기에 있는 수많은 지배자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을 비롯하여,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페르시아, 팔레스틴, 이집트 등을 정복한 뒤 그의 후계자의 한 사람인 프톨로메 아가 팔레스틴에 다시 진격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 때가 B.C. 300년 무렵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치욕적이었던 것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3 세가 로마에 진격하다 실패하고 마침내 체포되어 인질로 잡혔다가 귀 국하게 될 때,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그는 스스로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는데)가 팔레스틴에 폭군으로 군림하여 로마의 정책을 따르고 반유대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가운데서는 유대 사람이 가장 신성 시하는 성전 지역에 "아크라"라고 불리우는 군본부를 세우고, 성전제단에 제우스 신전를 세우고, 매월 25일에는 축제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축제는 실은 안티오쿠스 4세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결국 자신을 <신격화>해버린 셈이다.

에피파네스의 이러한 여러 가지 횡포에 군중들이 분노하여 궐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당대의 대제사장 오나야스 3세가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동생 얏손이 폭군 피라우스에게 아부하여 요새를 얻고, 심지어 대제사장직을 은 440달란트에 샀던 치욕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쉽게 이어지는 법인데, 이 일에 이어 그보다 더 간교 한 짓이 벌어졌다. 메니엘라우스는 제사 족속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뇌물을 바침으로써 제사장직을 샀던 것이다. 이렇게 더럽혀진 예루살렘 그리고 예루살렘성전, 여기에 더 참을 수 없어 일어났던 운동이 이른바 마카비아 반란이었다. 마카비아 가가 일으킨 이 게릴라 운동은 20여 년의 항쟁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을 다시 찾을 수가 있었고(B.C. 164), 제우스 신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이른바 "수전철'을 8일 동안이나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에 들어오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이 없다"는 잠언의 말처럼, 마카비아가도 집권하자 마침내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스몬 왕가를 건설할 속셈을 폈다. 이 때, 하스몬가의 중심인물이었던 시몬 이 자기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B.C. 140년에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장악하고, 군사령관과 왕의 지위를 굳힐 것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의 아들 하르칸 1세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로마를 등에 업고 모든 권력을 잡고 그 판도를 넓혀 갔다.

그러나 이처럼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지자, 이 집안에도 내분이 격화되어 저절로 붕괴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일개 제정관으로 등용되었던 신하 헤롯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말게 되었다. 헤롯 대왕은 바로 헤롯 안티파의 아들이 된다.

헤롯 대왕은 로마에 의해서 미리 왕권을 수여받고 팔레스틴에 진격해서 권력을 장악하고, 강제로 하스몬 왕가의 공주와 정책결혼을 하는 등 온갖 권모술수를 자행했다. 특히 그는 헬레니즘의 광신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다만 이스라엘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직도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던 예루살램 성벽의 재건을 꾀하고, B.C. 22년에는 착수해서 수년을 거쳐 마침내 솔로몬 당시의 면모로 복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종교귀족들은 이 헤롯의 심중을 모르는 바 아니었는데, 이 헤롯의 특혜에 그저 감루해서 그의 온갖 불의와 부정을 덮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둔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에 의하여 더럽혀진 것만은 아니었다. 시리아 치하에 있어서나 로마 치하에 있어서나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는 이른바 지도층, 특히 종교귀족들의 태도가 언제나 문제였다. 로마의 식민정책은 대체로 점령국의 고유한 종교나 풍속은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고, 실리주의를 취하여 군사권과 경제권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했었다. 이 때문에 팔레스틴에 있어서도 군사권과 경제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재래의 신분 계급들을 그대로 인정해서(이것은 실은 그들을 이용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들의 식민정치를 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제사계급이나, 제사장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이나, 또 그 때 권력권 안에 속하는 종파들, 예를 들면 바리새파 등은 예외없이 친여적인 태도를 취했고, 반면에 국민감정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냉혹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서슴없이 착취를 감행해왔던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의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더욱이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십일조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을 위시한 여러 축제를 창설해서, 이방에 흩어진 유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성전의 순례를 강요했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성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함으로써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야훼의 현존에 참여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순례를 생명처럼 알게 만들었다. 그들이 일년 동안 모은 돈을 먼 예루살렘 순례의 경비로 쓰게 됨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경제적 착취방법은 참으로 악랄했다. 우선 외국돈은 부정하다고 하여 그대로 받지 않고, 성전에 설치된 은행에서 환금을 강요함으써 그 이득을 착복했다. 성전에 바치는 짐승은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성전 자체가 짐승 전매권을 점유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하여 종교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우롱해왔다. 민중들은 여기에 분개했으나 그들에게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미 마카비 전쟁에 동참했던 카시빌 일파의 하나인 엣세네파는 벌써 권력과 종교가 야합해서 부패해가는 예루살렘을 더 볼 수가 없어서, 탈예루살렘을 함으로써, 새로운 수도기관을 구성했는데, 그 마지막 목표는 다시 예루살렘을 숙청하는 데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목표 밑에서 외세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을 반대한 제롯당들이 갈릴리 일대를 중심으로 칼을 간 것은, 무엇보다도 썩어진 예루살렘에 진입해서 성전 주변에 모든 더러운 것을 숙청하는 데 첫 목적이 있었다. 예루살렘, 이것은 민중에게 오래 심어진 이스라엘의 심장부요, 또한 희망이었다. 언제나 다윗 왕조를 그리워하던 민중들, 많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메시아는 만드시 다윗의 권좌를 계승하고 승화시킨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그들 새로운 이스라엘의 세계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메시아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군림할 것이라는 신념이 그러한 민중에게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 세계, 새로운 패왕은 예루살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민중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되는지 그 운명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루살렘, 치욕과 동시에 영광과 희망이 담긴 예루살렘을 지금 예수가 조그마한 어린 나귀를 타고, 하잘 것 없는 몇몇 군중 들을 거느리고 입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 예수의 입성과 민중

패왕직인 메시아를 기다리는 전통을 지녀온 예루살렘 주민의 눈에 또는 권위주의에 입각한 사람의 눈에, 나귀 그것도 아직 사람이 타보지 못한 어린 나귀를 타고, 초라한 우민들을 몇몇 끌고 들어오는 그 장면은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입성할 때에 그를 환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것은 지혜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무지하다고 멸시받는 민중들이었다.

우리 동양에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이 민심은 양면을 갖고 있다. 일면은 <우매하다>는 것이다. 민심은 바람부는데 따라 이리 휘고 저리 휘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민심처럼 믿지 못할 것은 없다. 민심이란 바로 군중심리를 가리킨다. 군중심리란 정말 우매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중의 인기에 몸담은 사람은 언제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그러나 민심, 즉 군중심리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백절불굴>인 것이다. 아니 <백굴불절>이다. 그런 뜻에서 그처럼 강하고 질긴 것은 없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초목은 그 방향으로 흰다. 그것은 주체성 없는 군중과 같다. 그러나 굵은 나무는 뿌리가 뽑히거나 부러져버리는데, 나약한 풀들은 그렇지 않다. 그 바람이 자면 거목은 영영 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풀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줏대를 살려서 꽂꽂이 선다. 오랫동안 사가들은 역사를 형성하는 동력을 굵은 나무들의 <백절불굴>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한다. 한국 사학자들도 이 나라의 명맥이 유지된 것은 이른바 엘리트들에 의한 것으로 여겨 거목들에게만 시선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 거목들은 다 쓰러졌다. 중국 대륙에서 신흥세력들이 일어 날 때마다 이 땅의 거목들은 왕들을 비롯해서 그 세력과 야합하거나, 아니면 항거하다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어떤 바람이 불든간에 아무 저항도 못하고 그리로 기울어진 듯하다가, 그 바람이 지나면 다시 줏대를 세워왔다. 그러기에 이 민족사는가날프게나마 그들에 의해서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역사의 줏대는 민심 곧 <민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민심은 기회의 면에서도 이용되었다. 일면 무사상하고, 무사려하고, 지조가 없어 보인다. 그저 무엇에나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 민심처럼 역사의 현실과 방향을 민감하게 인식하는 것도 없다. 민속학자들도 민요나 민속설화의 특이성을 보면 놀랜다. 그 중 민요를 보면 이른바 논자들이 찍소리 못하고 뿌리가 뽑힌 듯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간단한 만요형식으로 그때 그때 상황에 대한 저항을 표시했고, 또는 이제 올듯한 불길한 미래를 경고하는 노래를 퍼뜨렸다. 누가 지었고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게 퍼져서 삽시간에 전국을 휩쓰는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민중의 힘이다.

저들은 관념이나 이념 또는 분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감에 의한 것처럼, 몸 전체로 역사의 귀치를 포착하는 안테나인 듯이 예리하다. 오히려 이들의 무사상성이 그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이미 인위적인 것인데 대해서 사상화 이전의 순수한 리얼리티(Reality)를 민감하게, 순수히 반영한다. 그런 뜻에서 "민심은 천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민중들이 예수의 입성의 초라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알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를 영접했던 것이다. 그들 민중이란 바로 그 때 민중을 지도하고 있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항거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 민중들이 무엇을 감지했기 때문에 예수의 입성을 이렇게 환영했던 것인가? 복음서마다 그들의 함 성의 배후를 설명하는 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지시하고 있다.

3. 민중들의 환성의 의미

세 복음서, 즉 공관복음서는 민중들이 예수를 환영한 모습아나 그들이 부른 노래가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 공통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시편 118편과 저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편 118편은 한마디로 말하면 개선의 노래다. 이 시에는 이방의 침략, 아니 침략한 이방인과 거기에 가세한 이스라엘의 귀족들이 그 성을 더럽히고,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 반영되어 있다(9-10). 민중은 절규했다. 수난 속에서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절규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손이 뻗치어 모든 악당을 물리치고, 이제 성문을 활짝 열고,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의로운 사람들의 집집에서 터져나오는 저 함성,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즉 이런 새 주인의 입성을 앞에 두고, "정의의 문을 열어라,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이 들어가리라" 이렇게 외친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 있는 대로,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가 야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 줄이 회당을 돌며 춤을 추리라. 당신은 의의 하나님이시오니 당신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이것이 시편 118편의 골자다.

그러나 이 민중들은 이 초라한 예수의 입성에서 그 외면을 넘어서 그의 깊은 뜻을 보았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선의 입성"으로 그들은 본 것이다. 그들의 모든 절규가 응답되어서, 이제 곧 현실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지도급들의 눈초리, 무시무시한 그 공포분위기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시편 118편에서 "야훼께서 내 편이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다" 하는 그대로 그들은 환호성을 올렸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제는 낡은 세력들이 지나고, 새로운 주, 새로운 지배자가 입성한다. 새 시대에 대한 이런 대망, 이것이 그들의 환호성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예수의 입성을 이사야서 62장과 관련시켜서 민중의 마음을 대변했다. 이사야 62장에 이런 말이 있다.

야훼께서 외치는 소리 땅끝까지 퍼진다. 수도 시온에게 일러라.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러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11절).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정의가 동터 오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어찌 잠잠할 수 있으랴(1절).

즉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눌린 자와 압박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동하고, 이제 불의하고 더러워진 예루살렘에 정의를 구현하러 오신다. 이 사실을 예루살렘 온 백성이 외쳐야 되겠다고 본 것인데, 바로 그것을 민중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것은 전체에 관련된 것인데, 바로 예수 자신이 왜 하필이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상징이란 언어가 봉쇄되었을 때, 이미 그 사실의 내용을 아는 사람끼리 서로 통용하는 신호와도 같은 것으로, 그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다. 상징적 언어, 은어라든지 아나로기아, 묵시 문학적 용어같은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스가랴 9장에 그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거기엔 이렇게 씌여져 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 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이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예브라임의 병거를 없애 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것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할 새 세계, 새 주인을 영접하는 그런 노래인 것이다.

여기 분명한 것은, 아까 이사야서에서 나온 것 같이, 이제 이 땅 위에, 이 부패된 예루살렘에 정의를 세운다는 새로운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귀를 그것도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이 <평화>를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군국주의의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현장에서, 군마를 없애버리고, 활을 꺾고, 포로를 해방시키고 평화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뜻이다. 민중은 이것을 알았던 것 같다. 적어도 이 기자들은 그 면에서 민중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고 있다.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다. 이 민중들이 이러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것은 지혜에 의해서도 아니고 글자 그대로 천심에 감동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하늘과 내통하여 얻는 감지, 또 거기에서 오는 희열, 환희,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민중의 적이요, 현실에 눈을 감으려고 하는 자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민중의 지배층을 상징한 바리새파들이 저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다가 견딜 수 없어서 예수에게 항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불의한 자, 혹은 집권자는 진리를 혹은 사실 자체를 보면 몹시 경계한다. 까닭은 사실 자체, 진리 자체가 무섭기 때문이다. 까닭은 사실 자체를, 또는 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거짓, 위선, 부정이 그대로 폭로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참을 무서워하는 것은 불의와 부정을 숨어서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참을 말하는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자기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력권 내에 있는 자는 언제나 새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지금 기득권이 그것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막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중의 환호 성은 바로 그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같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지배층을 상징하는 바리새파들은 민중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니까 그들의 선동의 장본인인 예수에게 항의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4. 돌들의 절규

저들은 예수더러 왜 저들의 입을 틀어막지 않느냐고, 왜 저들을 내버려두느냐고한다. 이 서술의 배후에는 "네가 바로 선동하는 거지" 하는 뜻을 암시하고 있음이 짐작된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중대한 폭탄선언을 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폭탄적인 말씀의 뜻은 여러 가지로 확대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사실 자체는, 참은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 밝혀져야만한다는 것이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야만한다. 참은 가두어둘 수 없으며 억누를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폭력으로, 혹은 뇌물로 그들의 입을 봉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잠잠하면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 저들이 입을 다물면, 저들이 밝혀야 할 것을 밝히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치고야 말 것이다. 정체는 밝혀져야만한다. "돌들이 입이 있나, 그런 소리는 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들은 그 전체가 입일 수 있다. 그 돌은 역사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다.

증거는 입으로 한다. 입으로 하는 증거는 귀를 열어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끝끝내 귀를 꼭 닫고 있으면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눈에, 그것도 안 되면 다른 데에라도 대드는 것이다. 사실은폐는 소용이 없다. 증거물을 사람의 눈에 띄이지 않도록 은폐하고, 증거할 입을 틀어막고, 목격자의 눈을 가로막아도 소용이 없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그의 입은 한마디 말도 못한 채 증거하지 못한 채 땅에 묻혔다. 목격자의 귀도, 입도, 눈도 없다. 증거물이 없다. 그러므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하는 소리에 "난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요", "난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여기에 하나님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는 폭발적인 선언을 했다. 그렇다. 진리는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 돌이 외치는 것은 증거하는 것이다. 외치는 것의 의미를 밝히는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의 호소를 알아 듣고, 역사에 증거했다. 하나님은 공정하다. 그러므로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둘째로, 여기에는 "너는 너의 잘못을 은폐하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는 뜻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심판이다. 특별히 그것은 요한복음의 주장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예루살렘에의 심판이다. 요한은 "빛이 어두움 속에 바치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이 예수를 박해한 원인이다. 빛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의 죄의 폭로 때문이다. 받아야 할 수술을 싫어하고 한사코 병의 진단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의 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고 해보고 싶다. 그러나 들은 사실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하는 한 심판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친다. 하박국 2장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이렇다.

화를 입으리라, 저만 잘 살겠다고 남을 동쳐먹는 것들아. 재앙의 소용 돌이에서 벗어나려고, 높은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너희가 꾸민 것은 패가망신할 일뿐, 뭇 백성을 망치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 담벼락 돌이 원수 갚아 달라고 울부짖으면, 집 안에선 들보가 맞장구치리라(9-11).

말하자면 아무리 내가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재앙을 도피하기 위해서, 높은 데, 깊은 데 튼튼한 데 나를 감춰도 소용이 없다, 바로 나를 가리운 그것이 나를 쳐 없애는 것이 된다는 그런 신념이다. 결국 이상의 의미를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되겠다.

목격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히 증인이 될 것을, 되어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참을 참이라 못하고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죽어가는 그것을 누가 증거하나?

억울한 누명, 그것은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이 폭발을 한다. 돌이 소리를 지른다. 말하자면 이변이 생긴다. 해야 할 말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독이 된다. 역사에는 유혈의 폭동이 생긴다. 이 책임을 증거해야 한다. 증거를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여, 입이 있으면하지 못할 말들의 대변자가 되라. 나귀타고 입성하는 그이가, 바로 궁극적인 희망임을 증거하라. 진리의 왕은 여기 있다. 새로운 시대가 그와 더불어 동터온다. 나를 증거해라. 그렇지 않을 때는, 돌이 소리를 지를 때가 온다. 그러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역사는 거슬러 갈 수가 없다. 예루살렘은 오고 있는 새 시대를 맞기 위해서 민중들과 함께 새 시대의 주인을 영접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최후까지 낡은 도성을 딛고, 오고 있는 새 역사에 항거하려고 하였다. 무엇이 오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마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하고 있다. 하나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각오를 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가 예루살렘에 다가오고 있는 운명을 만회시키려고 온 사랑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아면 내 일을 마친다고 전하여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누가 13, 13-33) 이것은 누가만이 전하는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죽음의 결심을 표시한 것이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 들을 모으려 하였던가'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누가 13, 34) 이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닥쳐올 운명을 슬퍼한 일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또 한 곳에는 그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눈물로 한탄하면서 "오늘 내가 평화의 길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고, 그러나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누가 19, 13)고 말하고 예루살렘이 당할 일을 예고 한 것으로 전해져 있는데, 마가 자료에는 예루살렘성전이 마침내 돌 위에 돌 하나 첩 놓이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는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특히 성전 주변에서 일어나는 추태에 분노의 채찍을 들었다는 보도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같이 예루살렘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부패한 예루살렘을 숙청하려는 그의 자세는, 예루살렘의 어용종교인들에 분개하여 탈예루살렘한 엣세네파나 제롯당들의 염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저들은 분노와 환희, 동시에 희망에 찬 민중의 절규하는 그 입을 틀어막았을 뿐 아니라, 평화의 새 시대의 주인을 폭력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십자가에 처형해 버렸다. 그러므로 결국 저들이 잠잠하면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어 그 로부터 불과 40년만에 돌들이 소리를 지르므로 돌 하나 첩 놓이지 않는 종말을 고하여야만 했다.

(1977. 8.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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