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요한복음 2, 13-22

공관서에는 성전 숙청과 성전 파괴의 선언(예언)이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 둘이 함께 취급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관서에는 성전 숙청이나 그 파괴의 예언이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에 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는 데 대해서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에서 감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공관서는 단순히 이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것인데 대해서 요한에는 <이 성전을 헐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은 절대 불가결의 선결 문제처럼 표현되어 있다. 왜?

공관서에 의하면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의 착잡한 심정이 눈물겹게 보도되어 있다. 예수는 죽어도 고국에 들어가 죽겠다는 어떤 추방된 혁명가의 소원이 아니면 최후의 결전장을 수도로 삼고 돌입하는 돌격 대장과도 같이 최후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답할 목적으로 그곳을 향한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그의 모습을 마가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다. 제자들은 놀랐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두려워했다"라고 묘사하며 이러한 엄숙한 예루살렘 향도에서 수난을 예고했다고 한다. 이 길은 누구도 막아서는 안 되는 길이다. 따라서 그 길을 만류하는 제자를 사탄이라고까지 책망한다. 예루살렘에 입장한 후 감람산에 오르셔서 예루살렘을 굽어보면서 탄식한다. 마태와 누가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보라 너희의 성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말해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으리라고 할 그 때까지 네가 결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전한다.

공관서에는 그가 성전 주변을 돌면서 그 운명을 슬퍼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기사는 없고 단지 성전 숙청했다는 기사만 있다. 성전을 숙청한 것은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전의 종교

야훼는 원래 지역이나 장소에 고정된 하나님이 아니었다. 야훼는 유목민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아브라함은 그가 나타난 장소들, 벧엘, 헤브론 상수리나무 아래, 세겜, 브엘세바 등에서 단을 쌓고 정착하려다가는 또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에 이르는 곳마다 앞장선 그런 동적인 하나님이다. 하비 콕스는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법궤를 메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야훼의 동성을 말한다. 그는 일정한 곳에 정좌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역사의 이동 속에 아니, 그 앞에 가는 이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법률주의가 발생하므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달라졌다. 모세의 법률을 시내 산과 결부시키는 해석이 생겼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정하고 거기 성전을 짓고 법궤를 정착시킴으로써 이 하나님은 지역과 과거에 고착되었다. 그 후부터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비끄러매인> 하나님이 된 셈이다. 그럼으로써 동적이고, 역사적인 신은 추방되고 정착적이며 반복의 신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그 신은 비역사적이다.

정착신과의 관계는 제도와 의식뿐이다. 야훼에 대한 신앙은 제사종교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예수, 당시에는 그 동적인 역사의 주인인 여호와 신앙은 고갈되고 성전의 <지역>과 모세를 통해준 율법의 <과거>에 고착된 신과의 관계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예언자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반영된다.

성전!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앙의 잔재다. 그러니 소중하다면 더없이 소중하다. 그것은 그래도 그 위대한 신앙의 마지막 교두보다. 그러니 이 성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성전을 중심한 성도 예루살렘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전을 중심한 신앙마저도 병들었다. 그러니 그 부름은 병든 자식을 붙잡고 우는 어버이 마음에도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암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하는 말씀에 반영되어 있다. 성전 숙청은 이러한 마음이 하는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동시에 임종 앞에 있는 그것에 대한 마지막 경의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성전은 헐려야 한다. 없어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공관서) 헐어야 한다고 한다. 거룩한 것이 썩으면 그 악취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없어져야 할 것은 빨리 없어져야 한다. 참 산 신앙은 낡은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설화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눈이 떴을 때 하나님은 그를 도로 옛 상태로 복귀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그 길이 반역이요, 수난이라도 그 다음의 길로 재촉한다. 이 성전도 옛 모습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헐어야 한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더 중요한 까닭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신앙이 이 성전에 고착되므로 과거 안주의 교두보가 될 뿐 아니라, 미래 차단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써 동적인 역사의 앞을 이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함으로 새 가능성의 길을 막기 때문이다.

성전 종교에서 역사 속으로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46년간 지은 것을 사흘만에 지을 수 있느냐고 조소한다. 그러나 그러한 응수는 어리석은 것이다. 이미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다시 세우려면 왜 그것을 헐라고 하겠는가? 헐라는 것은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분명한 판단과 전혀 새로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임은 자명한 일이다. 저들은 현재 상태에서 자족했으며 새 가능성에 스스로 차단했었다. 그러기에 지금의 것 이상의 새 것에 대한 상상의 길은 막혔다. 우리말 번역은 "다시" 세우겠다고 되어 있다. 이 다시라는 말은 쉽게 개혁(reform)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원문에는 "다시"라는 말이 없고 단순히 "내가 그것을 일으킬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일으킨 담은 낡은 성전을 숙청하는 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복귀가 아니라 혁명을 뜻한다.

그러면 46년간 지은 그 집을 헐면 혁명이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헐라"고 저들에게 말하지 말고 몸소 그것을 헐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서의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몇 차례로 헐렸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시 건립되었다. "헐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러면 새 일이 일어난다. 새 일은 헐라고 하는 주인이 할 일이다. 헐기만 하면 새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 가능성을 차단한 저들의 마음과 관계된다. 그것은 내적인 것의 표상에 불과하다. 그 성전을 헐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있는 성전을 헐 때만 가능하다. 그게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종교심이다. 그들의 종교심이 성전으로 발로되었을 따름이다. 그 종교심은 보이는 것과 직결된 것이다. 그 종교심은 역사 현실을 차단하는 비닐 주머니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두 영역을 설정하고, 아무런 모순 없이 이중적 삶의 평행선을 그을 수 있게 한다. 헐라는 것은 바로 성전이 상징하는 종교 영역이며, 종교 관념이다.

이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그것을 일으키겠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새로운 "종교"는 아닐 것이다. 종교의 아성을 헐면 남는 것은 적나라한 이 역사밖에 없다. 그러면 새로 세워진 것은 이 역사 한복판에 그대로 적나라하게 선 채로 이루어질 <성전>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게 무엇인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사실이 잘 밝혀져 있다.

포로에서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대로 헐려진 성전의 재건을 착수했을 때 사마리아 지방에 그대로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그 일에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저들은 사마이라인들이 그 동안 혼혈되고 종교적으로도 타락했다고 보아 거절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에 있는 유대인과 예루살렘 일대에 있는 유대인은 원수와 같게 되어버렸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대신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그것은 본래 약속된 성소라고 고집했다. 서로의 주장은 성소에 대한 것인데, 저들이 서로 자기들이 주장하는 지역에만 하나님이 머문다고 한 것은 저들의 신관을 반영한다. 마카비 때의 "힐키너스" 군대가 그리심 산의 성소를 파괴한 것이나 또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성전을 부정한 것 등은 다 이러한 신관에서 온 갈등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이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서 드러난다. 예수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화마저도 거부하던 이 여인이 그가 <예언자>라는 결론을 얻자 예배의 장소가 그리심 산이라는 주장과 예루살렘이라는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 즉 종교 문제를 지역 문제와 직결시킨다. 이에 대해서 예수의 주장은 혁명적이다. 즉 이 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데 매인 종교심을 배제한다. 그 대신 <너희 아버지에게 예배드릴 때가 온 것이라>고 한다. 지역에서 때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때는 과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연한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서 있는 "지금"이요, "여기"다.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아닌 지금 여기란 각 사람이 처한 현실이다. 즉 예배의 장소는 바로 역사 한복판이다. 이것은 바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참 예배는 지역에 매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선 어디서나 가능해야 한다. 까닭은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는 말은 또다시 종교의 특수 영역에 귀착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려는 것도 아니요, 따라서 그에 향한 예배도 특수 행위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영이라고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냐 그리심 산에서냐라는 물음에 대한 부정을 나타낼 따름이다. 즉 하나님은 어떤 지역이나, 특수영역에 매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역사 안에서 철저히 자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어떤 지역이나 영역에 비끄러맬 수 없다. 이러한 뜻은 요한복음의 예수에게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루살렘성전을 부정한 예수는 자기도 <가야 한다>, <들리워야 한다>고 반복한다. 이것은 공관서에서 고난받아야 한다는 말과 본질상 같다. 이것은 하나님을 역사의 예수, 즉 과거의 한 시점에 비끄러매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을 부정한 것이다. 역사의 예수도 헐려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언제나 현존하는 하나님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바울도 "전에는 우리가 육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후 5, 16)고 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한 시점에 매인 예수가 아니라 현존의 그리스도만이 그 신앙의 대상이란 말이다. 그런 뜻에서 요한복음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16, 7)라고 한다.

그 나는 과거의 예수며 보혜사는 바로 현존의 그리스도 이상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관서에서 고난당하여 버림받고 부활하리라는 예언과 본질상 같다. 그러므로 요한 기자는 "그 성전을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라고 하며 그것은 그가 살아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아진 사실이라고 한다. 이 이해에는 비약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는 말이 역사의 예수에 대한 종교심을 헐라는 데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러므로써 역사의 예수를 중심한 또 하나의 성전 종교의 형성을 거부한 것이 된다. 이로써 기독교는 성전 종교가 아님을 밝혔다.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전해진 아테네의 바울 설교다. "우주와 그 안에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 24). 이것은 희랍의 신전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종교 일반을 부정한 선언이기도 하다.

이로써 거룩한 땅, 거룩한 성소라는 것은 영원히 지나갔다. 지역적인 성속의 구별은 영원히 없어졌다. 이제는 성속을 구별하는 영역은 없다. 성전을 헐므로써 종교라는 집에 은신한 사람들은 그대로 역사의 현실 한복판에로 내몰렸다. 그러므로 참 예배의 장소를 바로 역사 자체가 되게 했다.

오늘의 성전

성전 종교를 헐고 그것에서 탈출한 기독교는 권력구조와 야합함으로써 또다시 성전 종교로 전락되었다. 서구 중세 천 년 역사가 그것이다. 종교개혁은 다시 이러한 성전 종교에서 탈출한 운동이다. 그럼으로써 성전에서 성서로 옮겨지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 종교가 될 길을 열어놨다. 그래서 성서 축자영감설이 주의화 됨으로써 성서를 비역사화했고 그 결과는 또다시 새로운 법률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비판적인 연구로 다시 성서 종교가 탈출할 수 있게 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이나, 발트의 종교성 배격론은 그러한 결과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이라는 개념 속에 특수한 종교전당의 영역이 마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헐어버리기 위해서 마침내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극단의 소리를 지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 성전을 헐라고 명한, 바로 그를 헐던 2000년전 유대인의 행위를 재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헌 것은 낡은 성전의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성전을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신의 죽음의 신학의 소리도 결국 인간의 손에 들어온 낡은 성전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유대인처럼 반역자다. 낡은 관념의 종교를 파괴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기 안의 성전도 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의 부정이다. 그런데 이 자기부정은 성전을 헐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미 있는 세계관, 그것에 은둔하고 있는 자기 성전이 대치될 따름이다. 말하자면 신이 죽었다고 하는 사람은 나를 죽여라 하는 신의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기가 신의 자리에 앉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참 성전을 헐므로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 자기를 헐고 부정해야 한다. 그럴 때만 성전에서의 탈출이 가능하다. 십자가를 짐으로 자기부정의 길에 들어선 예수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한 말씀이 바로 이러한 뜻일 것이다.

현금은 높이 쌓아올렸던 교회의 성을 무너뜨리고 성전(교회)을 헐며 쳐들어오는 망치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서 교회 자체 안에는 여러 가지 반응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에 호응해서 안에서부터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다. 어떤 이는 집성의 형태를 분산할 것을 제의한다. 디아스포라 교회라는 표어가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모든 교리에 전면으로 도전한다.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화된 낡은 사고의 성전을 헐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오히려 낡은 성전의 파수꾼이 되기 위해 십자군 궐기를 호소한다. 그래서 부흥을 외치면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신비주의를 내세워 그 안에 침입해 들어가 버리는 이들도 많다.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회 참여"라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성전 안에 은둔한 사람들을 끌어내려 했다. 일부 인들은 그 소리에 호응하려고 성전 문을 열고 나와 봤다. 그러나 들이닥치는 세파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도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법률 아니면 신비주의의 성을 더 높이 쌓는다.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물결이 들이닥치므로 일부 사람들은 낡은 교리 성전의 문을 열고 나와 봤다. 그러나 다른 데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도로 낡은 교리의 전당에 되돌아가서 피스톨을 뽑아 든다. 그러나 그들이 고수하려는 <성전>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성전을 헐라는 명령은 주의 명령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성전을 헐라는 소리는 세계 물결에 놀란 자의 피동적인 소리다. 그러므로 그 소리는 정말 낡은 성전을 허는 작업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로 끌려가는 자의 자기 변명이다. 성전은 헐려야 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주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 성전 헐기 운동에 참여한 자는 참 그의 소리를 분명하게 듣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 다음에 세워질 것은 사람의 전당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즉 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1971. 3. 『현존』)

TAG •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