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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복음 23, 16-26
서론

23장에 7회 "화가 있다"에서 나타난 예수는 극단의 독설가로 나타나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메고
자기 손가락으로 까닥도 않는 자들아,
탐욕과 방종으로 채워진 놈들아, 이 저주받은 놈들아,
아벨의 피로부터 땅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 갈 것이다.
너희는 지옥에 기고 말 것이다.
너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칼라일은 그의 마호메트 전에서 마호메트의 위대한 점 중의 하나는 그가 진정한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다. 성서에서 나오는 예언자들의 특성 중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저들의 분노다. 이른바 귀한 분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잘하는 것이 그 특징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이 예언자 계열에 속했다고 할 것이다.

당하는 사람, 무능한 사람, 병자, 약자에 대해서 아무런 원칙도 없는 무지한 엄마의 품처럼 무조건 부드럽기만한 예수,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 썩은 갈대도 꺽지 못하는 감상자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기만한 그인 것이다. 그러나 억압하는 자, 군림하는 자, 무자비한 자들, 나가서는 욕심에 사로잡혀 눈이 어두운 경우 같은 것을 볼 때, 그토록 분노하여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자처럼 그렇게 분노하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 중에도 특히 군림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노하셨나.

마태 23장에는 책망의 대상을 1차적으로 바리새파들과 랍비들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당시의 것이라면 유대교 지도층에게 한 책망이 될 것입니다. 유대교라면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두 상징적인 기관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전이요 또 하나는 유대민족의 자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입니다. 이 산헤드린에 대해서 로마제국은 비록 속국이기는 하면서도 국회에 해당되는 대우를 했습니다. 이 산헤드린의 장은 대사제로 되어 있고 산헤드린의 구성은 사제그룹과 씨족을 대표하는 호농들의 장(長)노측과 그리고 법률을 책임진 율사인 이른바 서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대사제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총독이나 때로 카이저 보낸 서한에는 그를 단순히 종교적 대사제라 부르지 않고 유대민족의 영수에 해당하는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이 쓰여졌을 80, 90년도 즈음에는 성전과 더불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반주권 행사를 하던 산헤드린도 폐쇄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제계급은 자동적으로 소멸되고 남은 것은 율사, 즉 율법학자였는데 비록 식민지로나마 종속적인 국권이 무너진 다음에 나라 없는 이 민족을 이끌어 간 것은 바리새파가 주도하는 이 율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에는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파라고 그 대상을 축소시켰습니다.

바리새파가 주도하는 이 율사들은 로마제국의 재가를 얻어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얌나라는 곳에 율법연구소 겸 유대교를 재건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정치를 배제한 종교생활에 구체적인 조항들을 만들어서 그 민족을 계도해 나갔습니다. 마태공동체는 바로 이 종교로 민족에게 군림하는 유대교를 그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새롭게 민중을 기반으로 탄생한 이 기독교는 예수의 본뜻을 바탕으로 저들이 하는 모든 처사를 맹렬하게 비난함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세상에 형성해 나갔습니다.

여기에 "화가 있으리라"로 시작된 일곱 가지의 맹렬한 비판들을 집약하면 다음 두 가지로 되겠습니다.

첫째는 저들이 주변적인 것과 본체적인 것을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 본질적인 것을 깔아뭉개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중심으로 삼은 본문인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24)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들은 오래된 율법을 민족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 생활 세측을 명령 지시한 부분과 금지 내지 정죄한 부분으로 만들었는데 말초신경적으로 지나치게 부분적인 것을 확대해서 사물의 핵심을 무너뜨리는 그런 우를 범할 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군림하고, 나가서는 그들을 억압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가 2장에 나타난 안식일법에 관한 논쟁에서 그들의 그 같은 단면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안식일은 쉬는 것이라는 전제 밑에서 안식일법의 해석을 쉰다는 측면에서 극대화함으로 특별히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나가서는 그들을 정죄하는 덫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이삭을 잘라 그 알을 뽑아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가 저들이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단죄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왜 훔치느냐라고 한다면 몰라도 그러나 배가 고파서 밀알을 훑어서 입에 넣어 씹는 것이 결국 노동이요 추수하는 행동이니까 쉬어야 되는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에 단연 맞섰습니다.

그는 안식일의 본래 정신을 내세워 지엽적인 것으로 본래 정신을 말살하는 저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안식일 법은 실은 가난한 자를 위해 설정된 것입니다. 일생 동안 쉴 새 없이 죽도록 일만 하는 저들에게 쉴 권리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려고 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가진 자, 권력 있는 자에게는 안식일 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까닭은 저들은 쉬어야 할 특별한 날을 설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남을 부려만 먹고 일을 안하니까요. 23장에도 그 같은 저들의 행태를 잘 폭로하고 있습니다. 4절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매두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은 안식일에 쉴 수 없는 것이 더 문제였습니다. 하루하루의 양식도 구하기 힘든데 안식일을 쉴 수 있도록 여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단지 안식일 법은 쉬는 것이라는 데 매이고 왜 쉬라고 한 것인지를 문제하지 않는 저들이 바로 본문에도 나온 대로 소경이요, 무지한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 종교사회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그대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특히 큰 교회면 큰 교회일수록 너무나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예수의 본뜻을 유린하는 것을 권리처럼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사람을 정죄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또 교인들에게 돈을 거두어 낭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이 지엽적인 것이 아닙니까?

본문에도 있듯이 "박하나 회향이나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일일이 이 자리에서 지적할 마음은 없지만, 한국의 크리스천 중에는 바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고집함으로써 또는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편협되고 위선적이고 기만적이고,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바로 그 점이 크리스천 아닌 사람에게 감지 되어 크리스천 아닌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을 추상적으로 집약하면 사랑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크리스천만큼 피를 많이 흘리고 싸움을 심각하게 하는 집단이 어디 있어요. 유대교인들이 오죽했으면 예수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겠어요. 그런데 그런 크리스천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는 저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외워서 말을 유창하게 잘하고 스스로 지도자요 선생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가르침은 실제로 행동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실천하지 못하면 최소한 실천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말아야지, 정죄할 권리가 도대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약점을 아니까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위장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사람의 눈을 가리운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전문가란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향해 예수는 회칠한 무덤같다 라고 하십니다. 속은 썩었으면서 겉만 미끈하게 단장하는 그런 놈들, 그러므로 이 책망들은 간접적으로 그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종교영역에 한한 것이지만 이미 말한 대로 예수는 종교영역 따로 정치영역 따로가 아니라, 민중에 군림하는 자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말은 그대로 위정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복음서에 위정자들을 정면으로 노출한 데는 별로 없으나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의 서술에는 그러한 인간상이 우회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빌라도가 왜 예수를 처형했는 지 그 이유가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재판과정에서 보면 고소한 내용과 죄목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형한 죄목이 끝까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가 위험인물로 보이니까, 로마의 이해 관계로 보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위험해 보이니까, 그를 죽이기로 결정해 버린 것입니다. 로마법으로 보아서 예수를 사형에 처할 근거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그가 예수는 무죄라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대세에 몰려서 처형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를 처형하는 빌라도의 모습은 미련하고 불우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유대민족의 지도 계급들에게 아부함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의 법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가 선 뿌리는 바로 로마인데 그 로마의 법을 배반함으로 자기 자신이 붕괴될 짓을 한 것입니다. 그의 이런 미련한 행동이 없었더라면 모름지기 로마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결국 로마는 어리석게도 예수를 불법적으로 처형함으로 그를 따르는 민중들에 의해서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채로 삼킨 짓을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바로 이러한 미련함 때문에 그처럼 창피스러운 과거를 빚어냈습니다. 옛날로 소급할 것 없이 오늘의 우리 정치현실을 보면 됩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고르바초프를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그토록 온 국력을 기울여 열광적으로 외국 수반을 환영한 모습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환영하는 플래카드에도 크게 쓴 것처럼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대통령"으로 왔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실현시킨 레닌주의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붉은 기와 레닌상을 내건 체제를 대표하는 수반입니다. 그는 레닌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는 자로 자임할지는 몰라도 레닌주의를 부정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공사상을 골자로 하는 보안법은 끝까지 사수하려 하며 그것을 제물로 삼아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듯한 사람은 모조리 하루살이를 걸러내듯 걸러내면서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들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하고, 특히 소련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거의 비판 없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은 낙타를 통채로 삼키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TV를 보면 우린 이미 소련권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친소련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낙타는 그대로 삼키라고 강요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국민들은 사회주의 책을 읽었다거나 사소한 행동에서 사회주의적 냄새가 난다고 이 민족에서 아주 걸러내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노태우가 북한을 향해서도 선의의 동반자라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국민을 속인 채로 인적, 물적, 경제적 교류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마치 직접교역이 이루어진 것처럼 언론이 보도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없는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야 벌써 2월에 아니 작년 12월에 이미 교역을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교역만이라면 주로 장사꾼들이 드나들었을 텐데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욕을 퍼부으면서 상대했을까요.

우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것은 통일이라는 말은 다 합니다. 이 정부도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여러 측면의 교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꾼이나 관료가 드나드는 것은 상관없고 민이 통일 이전에 단절된 국민적 교류를 하겠다는 것은 보안법으로 걸러냅니다. 특히 목사들, 신부들이 통일을 전제로 한 민의 교류를 추진했다고 저들이 감옥에 잡아넣는 것입니다.

조용술, 이해학, 문 신부 등을 잡아넣는데, 홍근수 목사도 단지 이북도 긍정적으로 보자는 몇 마디 발언을 구실로 투옥한 것이 아닙니까.

정말 이 정부는 미련하고 정권 유지에만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어떻게도 설명하지 못할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큰 일을 저질렀을 때 국민들은 처음부터 또 송사리 떼나 몇 놈 잡아 올 것이라고 합니다. 낙타는 통채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낸다는 말이지요. 5공화국의 낙타들은 속속 석방되고 송사리 떼만 남아있습니다.

6공화국에 와 노동자만 1,211명, 하루 1.1명 꼴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낙타인 전두환은 호화로운 주택에서 몇 중대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떳떳하게 살고 있습니다. 수서 사건 그리고 우리 생태계를 거의 전부를 오염시킨 파렴치한 기업주들의 민족적 범죄가 어떻게 처리될 지 두고 보십시오.

이들에 대한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의 심정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이기적인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저런 것들을 보고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매고
자기 손가락은 까닥도 않는 자들아
탐욕과 방종으로 채워진 놈들아
이 저주 받을 놈들아
아벨의 피로부터 땅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너희는 지옥에 가고 말 것이다.
너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분노와 심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예수와 길을 같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민족적 위기의 절정에 와 있습니다. 무엇보다 걷잡을 수 없는 부패상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산하가 모두 썩어가고 각 분야 모두가 썩어갑니다. 이 정부는 계속 경제적 예산도 세우지 않은 건설 목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북방정책으로 이제 강국이라도 될 듯이 선전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사는 민족은 막 썩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기 아이를 이웃집에 맡겨놓고 나들이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의 부주의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 아이를 찾으려고 온 엄마에게 저들은 아이 대신 그를 위해 만든 옷들 장난감 같은 것을 갖고 들어와서 이게 모두 그 아이를 위해 장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 아이는?" 말이 없다. "내 아이! 아이를 내놓아라. 내 아이가 있어서 이 옷, 이 신, 이 장난감이 필요하지, 그가 없는 한 이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건설도 무역도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들을 죽여버리면서 그 따위는 무슨 의미가 있으냐!

병이 골수에 나서 죽어가는데 무슨 옷을 장만하고 집을 꾸미느냐? 모든 식수가 마실 수 없게 되고, 모든 식물은 극약으로 판정된 독약을 마구 뿌려 먹을 수 없게 되고, 살인, 강간 등의 사건은 날로 잔인하게 폭주되고, 기업이라는 것들이 한결같이 "나"만 있고 "오늘"만 있고 너도 우리도 없고 미래도 없는 판국인데 정계, 학계 할 것 없이 마구 썩어 가는데 그 독극물이 각 가정의 아이들에게 침투되어 들어가는데 그런 것을 바로 잡기 위한 소리를 하는 자들은 모조리 하루살이 거르듯 감옥에 쳐넣고 큰 도둑놈이 대로에서 활개치게 하는 이 마당에 기독교인들도 함께 놀아납니다.

이 마당에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각 분야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에 차라리 낙타를 삼키도록 유도해서 불의한 놈들은 모두 죽게(그게 바로 심판이다) 하든가 아니면 우리들이 이 세대와 함께 죽을 각오밖에 할 게 없습니다.

나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시련, 예수의 말씀은 내게 너무 벅찹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면에서 모기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지 봅시다. 그러나 주변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길에 들어서는 노력에 총집중합시다. 성서읽기에서부터 교회생활, 대인관계에서부터 사회생활에서.

(1991. 4. 22. 향린교회)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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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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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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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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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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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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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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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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