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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 11-12
1. 편집 작품으로서의 산상설교

속칭 산상수훈은 서기 90년에서 100년 사이에 형성된, "마태"에 의해 복음서 5장에서 7장에 수록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수록된 것은 모두 언록으로서 연대나 장소 따위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채 한 데 묶여진 것이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함께 공관복음서라고 불리운다. 이 셋이 공동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된 것이 마가복음이다. 마태와 누가가 이 <마가복음>을 대본 중 하나로 채택한 것은 그 셋을 비교하면 곧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의 자료를 빼면 또 하나의 공동자료의 층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어록들이다. 이것을 학문상으로 Q(독어 Quelle=Source의 약칭)라고 한다. 산상설교는 바로 이 Q자료에 속하는 것이다.

이른바 양식사적 연구방법으로 밝혀진 것은, 복음 기자들이 저술가들이 아니라 편집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그 복음들을 쓸 때 자료들을 들은 바와 아는 것들을 작가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풀이한 것이거나, 또는 전기가들처럼 한 인물의 언행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정한 양식(Form)으로 응결된 자료들을 전승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저들은 이른바 문학인들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석자들도 아닌 단순한 편집인들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데는 어떤 입장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해석이 따르게 마련이며 또 단편적인 자료들을 배열, 연결하는 데 문학적 노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래에는 이른바 편집사적 연구를 활발히 진행, 편집자로서의 그들의 사상적 입장과 문학적 성격을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산상설교는 이미 일정한 양식을 갖춘 자료(Q)에 의존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그 자료가 문서화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구전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중에 적어도 일부는 문서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전승 자료의 전승 모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였다. 그것이 바로 초대 그리스도교회다. 이 교회라는 공동체가 전승된 예수의 말씀을 받아 전승함에 있어서 일정한 양식을 형성하는 데 이른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저들이 받은 예수의 교훈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 자리에서 "지금 내게 주어진 산 말씀"으로 전승했다. 따라서 자연히 이들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편집자로서의 복음 기자는 교회의 전승 자료들을 편집할 때에도 단순히 과거의 자료를 전승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자로서 오늘의 "주"의 말씀으로 전승했다. 그러므로 "오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전승 자료들의 취사선택에 있어서나 악센트를 두는 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마태의 산상설교가 전승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복음(6, 17-19)과 비교해 보면 안다.(누가의 것은 "들의 설교"라고 한다.) 둘 다 함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로 시작해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로 끝난다. 그런데 그 내용을 비교하면 마태의 것은 누가의 3배나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 대신 누가는 마태의 산상설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는 자료들 중 전혀 다른 연관 속에 편집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마태의 산상설교 이전에 "산상설교"로서 묶여진 자료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 저자는 편집상에 있어서 단편적인 어록은 존중하나 편집 배열에 있어서는 폭넓게 재량을 구사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누가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그 특성의 일부를 소개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2. 산상설교의 구성과 그 내용

산상설교는 "복이 있다"(makaris-희랍어)로 시작된 양식이 아홉 번 반복되는 내용으로 출발된다. 그 문장에는 리듬이 있는 독특한 문체로서 이미 마태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것은 누가의 그것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누가에는 네 번밖에 없다. 누가에는 복있는 자로서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피 우는 자", "박해를 받는 자"를 든 데 대해서, 마태에는 "온유한 자", "자비한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더 추가되어 있다. 이것을 누가의 그것과 비교할 때 소외된 자들, 박해를 받는 자들 외에 윤리적 가치를 지닌 내용이 부과되는 것을 뜻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구의 부가, 또는 수정으로써 그 의미를 내면화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누가는 "가난한 자"라는 직선적인 말에 "마음이"라는 것을 덧붙임으로써 물질적 가난을 정신적 가난으로 했으며, "굶주린 자"에 "의에"를 덧붙임으로써 육체적 기갈을 정신적 기갈화한 것 등이 그 예다. 이런 예들은 위에 첨가된 윤리적 행위를 나타낸 축복의 대상과 관련이 있다. 축복의 대상은 단순히 이 시대에서 박해를 받는 수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윤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이 세계를 개조할 의무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어록을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누가에는 전혀 다른 연관 속에 수록되었다. 14, 34-35).

그 다음에는 유대교의 교훈 또는 전통과의 대결의 어록이 따른다. 유대교의 교훈은 "율법"으로 포괄된다. 마태는 우선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는 어록으로 출발하여 예수는 유대 교훈의 완성자임을 밝히면서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고로써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저 유명한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이라는 상반구 형식으로 시작되는 여섯 가지 대결의 어록들을 수록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 노하고 욕하는 것에, 간음하지 말라에 대해서 음욕을 품는 것에까지 확대함으로써 밝은 율법을 철저화하며 이혼 반대맹세 반대보복 반대,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을 명하는 말씀을 실었다.

그런데 누가에는 보복 반대와 원수 사랑의 명령만이 있을 따름이며 이혼 반대의 명령은 다른 관련 속에 수록되었고 그 외의 것은 없을 뿐 아니라 누가에는 유대의 교훈과 대결하는 형식은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말씀을 유대교의 율법과 대결시킴으로써 그것을 지양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한 이로 예수를 부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여섯 가지 내용을 보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전제와는 달리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들이 있다. 최소한 이혼 반대보복 반대원수 사랑 명령은 반유대교적이다. 이것은 비록 편집자의 의도가 있었으나 전승 자료들을 강제로 왜곡할 수 없었던 입장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미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의 지도자들보다 우월해야 할 것을 전제했다. 그러므로 율법과의 대결 다음에 유대교의 종교생활의 3대 실천 요강인 구제기도금식에 관한 교훈을 배열한다. 그 셋의 공통점은, 그 자체의 의미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런 행위가 형식주의에 빠진 것을 공격하는 점이다. 그런데 누가에는 기도에 대한 교훈과 더불어 새로운 기도문이 다른 관련 속에 수록되었고 그 밖의 둘은 전혀 없다. 그 다음에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눈이 몸의 등불이듯이 속의 빛이 삶의 등불이다",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의식주를 위해 걱정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등등 전후의 연관이 없는 단편적인 교훈 아홉 항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물질적인 것에 집착한 경고, 높은 윤리 구현 촉구, 그리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는 교훈들이다. 그런데 누가에는 그 중 둘(남을 심판하지 말라.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외에는 다른 관련 속에 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누가에서와 같이 이상의 말씀 위에 삶을 형성할 것을 권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마태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복음서를 쓸 때의 그리스도인들을 안중에 두고 이 말씀의 내용이 바로 오늘을 사는 저들에게 현재적 교훈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뚜렷이 한다. 그것은 그 내용 중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습니다"라는 머리말에서 볼 수 있다. 여기 "무리"라는 것과 "제자들"이 대조되는데, "무리를 보고", "제자들이 그에게 나왔다"는 서술법으로 그 말씀의 청중은 바로 제자들임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뜻한다. 그러므로 양식사적 연구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산상설교를 "세계 안에 있어서의 기독교인다운 자세를 종합적으로 나타낸 양식으로 성경화된 도큐멘트"이며 "기독교인다운 삶의 방향과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증거를 위한 큰 심벌"이라고 한다.

3. 저항문학으로서의 산상설교

단편적이나마 산상설교에 담긴 어록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기존 가치를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요소와 기존의 것을 철저화해서 그 근원에로 소급하는 어록들이 상호교차되어 있다고 하겠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박해를 받는 자 등이 축복의 대상으로 선언된 것은 기존 가치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가진 자, 행복해서 웃는 자나 또는 남을 누르는 승자의 우월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또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기존의 법이나 윤리 질서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인과율적 원리를 거부하며, 나를 해치고 저주하는 적대자에 대해서 보복을 금할 정도가 아니라 무제한의 자기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오늘의 체제 위에서의 생존권마저 포기하라는 극단적인 어록 등이다. 이러한 선언적인 어록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질서를 전제하지 않고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말씀들은 이른바 묵시문화의 계보에 속하는 것이다. 묵시문학적 사고는 예수 당시, 특히 소외된 자들에게 있어서 지배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역사의 종국을 의식함으로써 형성된 문학을 통한 자각운동이었다. 예수는 분명히 이 계보 위에 섰던 이로서, 그의 설교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이 바탕에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 선언은 기존질서의 종국적 선언임과 동시에 전혀 새로운 현실의 도래를 뜻하는 것이다. 그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기존권이나 가치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더불어 "앞선 자가 뒤지고 뒤진 자가 앞선다"는 "전복적"인 선언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를 종말론적 말씀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서 온유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이나 기존율법에 대한 원칙적 승인 등은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하고 그것을 보존, 또는 개선하기를 권고하는 어록들이다. 특히 눈이 몸의 등불이듯 내적 빛은 삶의 빛이라고 하는 말, 또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등등은 문학 형태로 보면 이른바 지혜문학에 속한 것으로서 역시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한 처세의 지혜를 가르치는 어록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기존 질서의 규율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가령 살인과 증오를, 구체적인 성적 파계와 내면적 성적 욕구를 똑같이 심판의 대상으로 동일시했을 경우 현질서를 유지하는 데 재판질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고로 산상설교는 성서 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이면서도 사실상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소외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까닭은 현질서를 전제할 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세계에 발을 디디고 현실에 저항하는 데서 삶을 찾는 자에게만 용납될 수 있는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대적인 문학 성격의 분류로 성격짓는다면 저항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편집자로서의 마태는 지혜문학의 계보에 속하는 어록들을 종말론적인 어록의 틀 속에 배열하는 데 있어서 많은 고심을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가령 "가난한 자", "우는 자", "굶주린 자" 등이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거기에는 이른바 윤리적 가치 따위는 고려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은 온유하거나 마음이 깨끗한 것 같은 윤리적 가치를 지닌 상태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마태는 "가난한 자"라는 말 위에 "마음에 있어서"라는 것을 덧붙임으로써 물질적 가난을 정신화하며, "굶주린 자"에 "의에"라는 것을 첨가함으로써 윤리화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반윤리화된 것은 아니다. 마태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 "심판"이라는 큰 전제 안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하므로 윤리의 일상성을 종말적 성격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마태는 예수를 기점으로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들을 새로운 존재의 새 윤리 선언 프로그램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 윤리는 낡은 윤리에 대해서 저항적으로 그 면모를 드러낸다.

(1974. 12. )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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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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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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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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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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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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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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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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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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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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