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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
(Imitatio Christi)
고린도전서 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1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고전 11, 1), 또는 "여러분은 우리뿐만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살전 1, 6)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Imitatio Christi(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옛 교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중요한 테마가 되어왔으며, 그 이해 또한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이그나티우스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을 그의 고난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본받음의 절정은 <순교>에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본성을 배운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이 때 지상의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구분이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와서는 인간 예수를 그 모범으로 하고 그 중심을 인내와 복종에 두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을 청빈이라 보았으며, 따라서 수도사의 길만이 그리스도의 최고의 모방이라는 풍조가 퍼졌다. 그 가운데 성 프란시스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생활양식대로 살려고 하였으며, 그 목표를 청빈에 두었다. 청빈하게 삶으로써 그는 예수를 닮으려고 애썼다. 그 중에서도 모방의 핵심은 예수의 고난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고행주의자들이 생겼는데, Heinrich Seuse 같은 사람은 8년 동안이나 서른 개의 못을 박은 십자가를 지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의 모방은 공로사상과 결부되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고행을 본받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믿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이 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든 경향은 루터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데 그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을 소홀히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안일한 저들에게 도전하여 "진리의 증인"의 <고독과 수난>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대인관계는 별로 관심하지 않고, 자기주장의 관철에만 철저했었다.

근년에 이르러 본훼퍼는 값싼 은혜만을 말하고 예수를 좇는 자의 임무를 소홀히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가장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독소라고 지적했다. <십자가 없는 은혜>, 그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십자가는 어디에서 지나? 그것은 바로 이 세상 한복판에서 진다. 로마와 유대의 한복판에서.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가? 고난 그 자체를 위하여? 아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진다. 그럴 때 십자가는 의미가 있다. 너희를 위한다고 할 때, 특히 그것은 눌리고 가난한, 제 권리를 찾지 못하는, 그래서 수난하는 <너를 위하여>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결국 행동이 따르고,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난의 이해에 있어서 <무엇 때문에>가 뚜렷하지 않으면, 결국 신비적 고행주의에 빠지고 만다.

2

바울은, "그분(그리스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고후 8, 9)고 하였다. "그가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의 뜻은, 우선 빌립보서 2장에서 이해되는 것이 상식이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품으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중심 개념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또는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이 마음을 본받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선재적 존재, 비움(케노시스)의 사상, 그리고 전권적 존재라는 도식으로 되어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케노시스" 곧 <버리고>, <비우고>, <사람이 되고>, <자기를 낮추고>, <종의 모습이 되고>, <죽기까지, 즉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복종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바로 이와같은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하나가 되라는 전제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모두 남(이웃)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는 것을 권하면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를 위하여 나를 비운 예수를 닮으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신적 존재인 그리스도의 일로 미루어버리고,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모방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하며, 신학적 근거에서 보아 바울은 역사의 예수, 곧 인간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기에 단순한 모방을 뜻할 수는 없다고 한다.

사실 바울 연구에서 많이 문제되는 것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바울의 태도이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는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은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는데, 이상한 것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말씀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육체로"(kata sarka)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자들은 이 말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무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 바울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분리해서 생각했을까? 그는 예수는 인간이 된 것(수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과 싸웠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와 관계없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수를 뺀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자체가 예수의 생애를 <전기적>으로 전하거나 그의 삶의 양식을 모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점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삶과 말씀을 극히 단편적으로 고백했지, <전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수 자신이나 그의 생활 모습은 거의 모른다. 그의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미남인지 추남인지 …

그러나 저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결정적인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면 나는 버림을 받아도 할 수 없다"는 자세이다. "나는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는 말은 그것을 단적으로 밑받침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부요하였지만, 여러분의 부요함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말을 예수의 삶에서 얻는 그의 예수 이해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까?

필자는 최근에 바울의 기록에서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까 하고 분석해 보았는데, 뜻밖에 많은 자료를 얻어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있는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는 말을 보면 바울은 적어도 예수의 겟세마네의 고뇌나 십자가의 최후의 비명을 가슴에 지니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우리는 예수를 초인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예수의 현실과 유리되기 십상이다. 바울은 확실히 잘 봤다. 예수는 약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것은 "힘이 없어서", "도피할 기회가 없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약했던 것이다. 그가 소중히 생각하는 구약 그리고 그가 유대의 생명인 전통적인 율법마저 파괴함으로써 범법자가 되었던 것은, 그가 환호하는 군중에게서 마침내 버림받아 고독해진 것은, 그리고 그가 종당에는 하나님마저 나를 버린다고 할 정도로 약해졌던 것은, 모두 "너희들 때문에, 너희들을 살리기 위하여,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적어도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예수를 본받으라고 한 뜻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고행도, 순교도, 완성된 인간성도 아니다. 그것은 "너가 부요해지기 위하여 내가 가난해지는" 삶이다. 너를 위한 삶,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7절에서 "우리는 버림을 받은 자처럼 될지라도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고 했다. 같은 책 11장 7절에서는 "여러분을 높이기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했다"고 했다.

이처럼 바울은 "너를 위한 일이라면 죄인이 되는 일도 불사하겠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것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다"는 심정으로 나섰다.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일을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사양치 않겠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바울은 정말 예수를 본받은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른바 <죄인>들과의 사귐을 위해서라면 어떤 욕을 먹어도 좋게 여겼다. 그는 율법의 범죄자라도, 아니 하느님께 버림받아도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살았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감히 살인을?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임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미친 사람이 운전을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터라고 믿게 된 마당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너를 위하여> 나는 비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좋다는 비장한 각오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길의 절정인 것이다.

3

세상이 질서정연하려면 각기 주어진 자리를 지켜야하는 것이다. 봉건사회란 바로 각기 정해진 제자리를 고수하게 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사회이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국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제도를 앞세운 방편적 사고의 자기 합리화라 할 수 있다. 질서란 곧 신분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분업적 기능사회를 위한 듯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법은 있어도 인간은 없게 된다. 특히 그 질서란 것이 근본적으로 제 신분에 알맞게 만든 지배층의 주장인 경우, 그것은 그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패이지 어떤 윤리적 가치가 되지는 못한다.

요사이 "교수가, 종교인이, 학생이 제 신분을 망각하고 무슨 그런 짓을 …" 하는 소리가 높다. 그것은 자기 본분과 영역을 지키라는 강조이다. 더욱이 정교분리에 대한 엄격한 정의도 내리지 못하면서 사회부정이나 정치타락을 말하면 본분을 벗어났다고 한다. 이런 식의 주장은 봉건적 사고에 뿌리박고 있는 소치라 할 수 있다. 안정 우선주의는 현재의 부조리 따위에 둔감하게 하고, 다만 기득권 수호를 위한 몸부림의 하나로 나타난다.

분업화 시대에 능률적으로 대처하려면, 자기 분야를 한정하는 게 좋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다 잘 될 때, 모든 사람이 자기권리를 누리고, 또 그것을 제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폭력으로 인하여 남의 권리침해가 없는 사회일 때, 다시 말해서 그것은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잘 되어가는 환경일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남을 위한 존재>의 정신과 자세를 본받는다는 것은 남의 권리, 남의 재산, 남의 생명을 지켜 주고 옹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럴 경우 남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가능할까? 아니 필요하다면 사랑을 내세워야 할, 원칙 위에 선 자가 주먹을 휘두를 경우도 생길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질서의 한계를 깰 수밖에 없게 된다. 정말 <남을 위한 존재>를 본받으려면, 배덕자, 탈선자, 나아가서는 범죄자로 규정받는 일도 불사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남을 위한 존재>란 한갓 구호에 그치고 말게 된다. 성서에서 imitatio Christi라고 할 때 그것을 수난의 십자가와 결부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수난도 불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나의 필요, 나의 주장, 나의 원칙, 심지어는 나의 믿음까지도 <너를 위하여> 이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남에게 조롱거리도 될 수 있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남은 구하고 자기는 구하지 못한 자"라고 침뱉음을 당했듯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위기를 부르짖는 오늘의 교회,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위대한 그리스도 인, 참된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77. 9. 『현존』)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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