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보서 1, 12-17

이제부터 일 년 동안 이 난에서 성서를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쓰기 위한 글이 되지 않고 정말 독자에게 성서의 현실의 일단이라도 바로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다.

그 방법은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때 그때의 삶의 정황과 관련되는 구설을 찾아 함께 생각할 수도 있고 성서 중에 중요한 구절들을 골라서 그 전체의 윤곽을 소개하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새생명』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입체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한 산 모델을 중심으로 그의 상황과 사상을 따라가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길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인 빌립보서를 택했다. 그 까닭은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것은 분량으로 봐서 알맞다. 둘째, 이것은 역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울의 편지다. 셋째, 비록 짧은 편지나 바울의 참 뜻이 요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 방법은 한 구절씩 풀이하는 주석 형식을 취하지 않고 순서를 따라서 요점을 파악해서 해석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달 독립된 제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에서 참 그리스도인 바울의 참 모습을 부각함으로 오늘에 사는 우리의 삶에 접근시켜 보려고 한다. 독자는 단순한 독자로 머물지 말고 함께 참여해 주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매 호에 표시된 본문을 찾아 읽은 다음에 이 글을 읽어 주기 바란다.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 그가 가진 사상이나 신념이 정말 참인지 거짓인지 그 진상이 드러난다. 스스로 속고 있는지 또는 남을 속이고 있는지도 역경 속에서 폭로되지만 자신이나 남에게 인식되었던 것 이상의 것도 역경 속에서 드러난다.

여기 한 사람이 투옥되어 있다. 그가 어떤 불법이나 잘못 때문에 투옥되었다면 형을 감수하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할 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일언반구도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믿는 진리를 증거하다가 투옥되었다. 그가 믿는 진리가 선을 행하는 자는 축복받고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정도라면 그는 그의 처지를 원망하고 그가 믿는 진리에 대한 회의를 피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억울하게 역경에 처한 바울은 왜 이 편지를 썼는가? 그는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라고 한다. 그게 무슨 뜻인가?

바울은 그의 투옥을 계기로 이러한 일들을 말한다. 첫째, 그가 투옥됨으므로 그를 투옥한 관권이 그의 삶의 근거와 그의 행동의 동기를 알게 되었다. 둘째, 그와 친교를 가졌던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투옥을 계기로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얻을 뿐 아니라, 그가 부자유해졌기 때문에 그가 못하는 일을 대신해야 하겠다는 것을 행동화하게 되었다. 셋째는 그와 반대로 그를 질투하던 일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주도권을 뺏기 위해서 그의 하던 일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역경에 처했는데 그 주변에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정치나 어떤 이데올로기의 투사였다면 이 사실을 밝히고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들을 진압할 것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편지의 독자들이 알기를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의 전진"이다.

역경에 있는 바울은 그의 역경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같다. 그는 자기를 잊어버렸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도 원망하지 않는다. 까닭은 그의 눈은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권은 그를 불법 감금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존경하게 된 데 대해서 그의 적대자들은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태도의 다양성 속에 한 가지 일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전진이다. 바울은 벌써 개인이 아니라 소집된 병사다. 그는 삶을 하나의 자연적 존속으로 보지 않고 "부름 받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니라 부름 받은 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기에 그는 진군의 전선에서 부상한 병사가 쓰러진 채 전우의 전진을 독려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역경 또는 수난에 처한 사람은 뚜렷하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수난 속에서 자기 애착에 노예가 됨으로 말할 수 없이 비겁해지는 경우다. 사람은 자기의 상처만 들여다 보면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그것은 남을 향한 원망과 저주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의 필연적인 길이다. 이에 반해서 나 위에 또는 나 밖에 그 삶의 목적을 둔 사람은 그 아픔 속에서 너를 봄으로 그것에서 해방된다. 국가의 운명을 나보다 큰 것으로 아는 병사는 자기 상처의 아픔보다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승리를 봄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바울은 자기의 역경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고 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살고 거기에서 그 삶의 보람을 찾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용감한 투사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보다 더 중요한 확신이 있다.

우리는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도리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도리어"(mather)란 예상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실을 말한다. 역경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역경은 그 가는 길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에 개인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투옥된 것은 그의 복음 전선의 좌절을 뜻한다. 그것은 불리한 일이다. 그로 인해서 그의 동료들이 낙심하며 그의 적대자들이 환호를 올릴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예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상을 뒤집어엎고 그를 통해서 관권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동료들이 궐기하고 그의 적대자들이 그 적대 감정을 더 곤두세운 것은 예상대로였으나 그것마저도 복음전파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그는 이 사실을 저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어떤 상황이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일관되는 복음 자체의 승리에 대한 새로운 감격과 확신이다. 복음은 그가 전하거나 또는 누가 그것을 방해하려는 뜻에 구애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역이용하면서도 전진한다. 우리말 번역에는 "복음 전파의 전진"이라고 했는데 원문은 복음의 전진(advance of the Gospel)이다. 이것은 인간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일단 독립된, 복음 자체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알리려는 것은 자기의 업적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의 동료들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그의 적대자들의 업적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 자체의 승리다.

주전 490년에 아덴 사람들은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마라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승리했다. 한 청년은 "우리가 이겼다"라는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아덴의 시장에까지 달려와서 쓰러져 죽었다. 이 청년은 자기가 싸운 업적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덴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이 알리려고 한 것은 바로 이 마라톤의 승리를 죽음으로 알린 이 청년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진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 마지막 승리는 요원하다. 그러나 이 복음은 인간의 모든 조건을 넘어서 전진하고 있음을 역경 속에서 체험했다. 이것은 궁극적인 승리를 앞당겨 보여 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에도 즐거워하고 또 앞으로도 즐거워할 것이라고 한다. 삶 자체가 즐거운 게 아니다. 자유를 생명으로 아는 그가 지금 갇혀 있는데 즐거울 까닭이 없다. 또 앞으로 어떠한 역경에 처할는지 모르면서 반드시 즐거워할 것이라는 확약은 그 삶 자체에는 없다. 그러나 그는 즐거워하며, 즐거워할 것을 확신한다. 까닭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반드시 온 인류를 구원하고야 말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분명한 뜻이 계시된 것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역경에 처하면 쉽게 좌절한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어도 악랄한 현실 앞에서 후퇴해 버린다. 때로는 자기의 나약성을 인식하고 좌절해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나약성을 보고 희망을 포기한다. 또는 세계 역사의 추세 앞에서 복음에 대한 회의에 빠져버린다. 까닭은 바울과 같이 복음 자체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나 박해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수 있었다면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는 끝났을 것이며 평탄한 길에서만 복음이 전진한다면 기독교는 팔레스틴 안에서 이미 근절되었을 것이다.

언제 복음 전선에 순탄한 때가 있었으며 그 전진에 예측이 맞아 들어갔는가? 어쩌면 바울의 수난의 일생은 바로 기독교사의 축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전진했으며 전진할 것이다. 바울이 갇히고 또 악한 자들이 범람했어도 복음은 전진했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아무리 우리가 나약하고 반복음적인 것이 "기독교"를 가두어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은 결코 매이지 않고 전진하리라고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길에 참여한 자의 모습일 것이다.

(1972. 1. 『새생명』)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