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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굽기 3, 1-12

오늘 본문은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선택했다.

교회에 대해서 그 뿌리를 캐는 데 두 가지 모델이 있다. 하나는 성전이다. 성전은 하느님께 예배, 구체적으로 제사 드리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책임자는 사제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회당이 있다. 이것은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 이방에 포로된 이스라엘에 의해서 시작된 집회이다. 회당은 토라를 읽고 하느님을 기억하고 민족적 단결을 도모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회당의 주역은 랍비다.

이 둘 중에 교회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가톨릭은 성전 전통을 계승했다. 그러나 신교는 회당 전통을 밟았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성당, 신교는 교회이다. 그것은 성전이 아니다. 따라서 목사는 사제는 아니고 교사역할에 더 비중이 있다. 그러면 교회는 회당인가? 그렇지는 않다. 회당은 토라, 즉 말씀을 풀이하고 되새기는 데 그 중심역할을 찾았다. 그러나 교회는 한 사건을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교회의 시발과 또 그 내용을 나타낸 초석같은 두 사건이 있다.

첫째는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상 일에서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명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였다.

부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 즉 죽음의 사건의 한 면이다. 십자가 사건은 <불가능한 힘>이 곧 진리라는 것을 과시한 사건이다. <죽음>은 그 불가능한 힘의 전가의 보도로 …(?)되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 진리, 생명은 위축된다. 그런데 <예수는 부활했다>는 이 증언과 그 증인이 모인 교회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아니,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너 불의한 힘의 협박에 절대로 굴하지 않는다>는 증거의 실체인 것이다. 이것은 회당과 다른 첫째 내용이다.

둘째는 교회의 출범일을 누가가 오순절 사건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사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오순절은 모든 인위적인 것을 단절하고, 정치경제문화종교 등으로 계층화되고 있는 것들 (그) 사이의 담장이 무너지므로 그런 차이점을 극복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이룩한 사건이다. 그것은 말의 사건으로 표현되었다. 이로써 백인과 흑인,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눌린 자와 누르는 자, 종과 주인이라는 담은 무너졌다. 그러므로 메데에서 아라비아까지, 메소포타미아인에게서 로마인에게까지 모두 하나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둘째는 그런데 이러한 하나되는 사건의 주역은 예루살렘 사람도 아니요, 바로 갈리래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리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모두가 듣기에 저 사람들이 우리네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

여기서 교회의 두번째 중요한 본질이 제시된다. 그것은 기존 가치관에 의해 이루어진 '질서'라는 이름으로 된 담이 무너지는데, 그것은 바로 상층, 고급, 엘리트 따위가 주도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갈릴래아, 즉 민중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민중의 언어가, 즉 민중의 한과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는 사실이 체험된 공동체가 출현된 사건이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 공동체는 <가난한 자, 눌린 자> 위주의 공동체임을 일찍 인식해서 그것이 슬로건이 되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해방하는 공동체로 인식했다. 그리고 바울이 "하느님이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했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했습니다.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했습니다"고 한 것은 역사적 현실의 교회의 모습이요, 그것의 신학적 증거이다.

위의 두 사건으로 무력하여 불의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가난하고 힘 없어 눌린 자가 주역이 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길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모세의 소명사건에서 배우려는 것인데, 그것을 단적으로 <제가 무엇인데 감히>라는 모세의 반응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교회는 강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도 하지 않으며,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메시아의식 또는 영웅주의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아니다. 무력한 자들, 손에 무기도 머리에 죄도 못가진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것을 전통적으로 죄인이 모인 공동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겸허한 겸손이나 무력감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추상같은 명령에 직면한 데서 온 무력감이요, 겸허이다.

모세에게 세계 제국의 제왕 파라오와 대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손아귀에서 히브리를 해방하라는 것이다. 무엇으로? 손에 바늘 한 개도 못 가진 판에?

현금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읽은 성서의 요구, 그것에 의해 설교하는 목사의 요구가 목사 자신을 포함한 교회 구성원의 현장과의 사이에 괴리가 엄청난 데 있다.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구호를 홀로 외치다가 지친다. 그게 만성이 되어서 아주 거짓말, 식언하는 자신 앞에 허탈해지거나, 체념 아니면 허세만이 남는다.

수도교회가 바로 그런 딜레마에 빠진 교회 아닌가? 배운대로 옳다고 긍정하고 교회 밖으로 나섰는데, 번번히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을 얻고 또 교회에 온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좌절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좌절하고 있다, 즉 <제가 무엇인데 감히>라는 의식도 없어져 가는 경우이다.

모세는 실현 불가능한 요구 앞에서 좌절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갔다! 그 뜻에 복종했다!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적 지상과제가 하나되어 나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는 하느님의 그(나)가 바로 모세 자신이 되는 경우이다. 즉, 하늘의 뜻과 땅의 사건이 한 정점에 모여지는 것을 경험했기에 그것은 모세를 도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도피할 아무런 다른 길도 막았다. 눈앞에 우리의 구원을 절규하는 손이 보이는데, 그걸 외면하고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더욱 이 바로 저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이른바 사회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른바 사회참여, 사회정의, 인권을 내세우는 그리스도인, 교회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런 것들이 바로 사회현상의 사회 과학적 관찰에서만 알고 배우고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 이야기에서 배울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는 말씀을 듣는 현실이다. 나는 이것을 '지성소의 경험'이라고 한다. 지성소! 내 발에 신을 벗어야 하는 엄숙한 장소, 때! 이것은 어떤 경우도 양보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지고의 자리! 이런 절대의 경지가 있어서 상대적인 데 빠지지 않는다.

수도교회에 그런 게 있나? 정말 기도하나? 정말 예배드리나?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게 있는가? 제가 무엇인데 감히? 그러나 그가 명령하는데 이 거룩한 자리에서 발에 신을 벗고 섰는데, 그래서 더 피할 길이 없는 존엄한 이의 앞에 섰으니 결국 그 길을 갈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 모세의 길이다.

이 점에서 아모스도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동이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일 따름이다. 그런데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라고 한다.

야훼께 잡힌 사람!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가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느냐?"

그래! 이게 야훼께 잡힌 자! 그러니 제가 못났어도, 힘이 없어도 나갈 수밖에!

이는 바로 피할 수 없는 지성소를 가진 자의 길이다.

교회의 길도 "제가 무엇인데 감히"라는 자의식이 철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잡힌 자되어 부득이,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하는 말하는 행위! 이게 참 있어야 할 모습이다.

결론

수도교회가 세워진 지 30년이 흘렀다. 이제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었다. 수도교회의 상징으로 지게로써 십자가를 대신 한 것은 이 교회의 숙명을 제시한 것이다. 지게는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즉 민중의 한국적 상징이다.

30년에 조로해 버리지 말아야지! 이제 정말 성인이 되어 바로 남이 지지 않는 지게, 문명의 이기에게 밀려나는 이 지게를 지고 어처구니없이 우리 주님에게 잡혀서 앞을 향해 가야지!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이 날, 이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닌가?

(1984, 수도교회 30주년 기념예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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