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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사도행전 7, 23-35
비종교화

최근에 와서 "종교"라는 개념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미 자유주의신학 시대에 계몽주의의 회오리바람에 몰려서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이성이라는 척도에서 보기 시작함으로써 마침내 성서에서도 이른바 "종교적" 또는 "신비적" 요소는 모두 본질적이 아닌 것으로 보고 이른바, 윤리적인 것만에 주목함으로 예수까지도 하나의 새로운 윤리교 사로 전락시켰다. 이것에 맞선 이 중에 대표적인 이가 칼 바르트다. 그것은 "종교"라는 것은 결국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간의 요청과 욕구의 표현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교의 비종교성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의 기조는 <하나님이 말씀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역사나 인격을 중심으로 보고 그것의 중추는 이성이라고 보려는 자유주의신학과 정면 대립된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비종교화한다는 데서는 공통된다는 사실이다.

그후 본훼퍼의 옥중서신으로 다시 이 문제가 재비화되어 종교라는 범주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고 이 뒤를 이어 세속화신학, 나아가서는 신죽음의 신학이라는 기묘한 신학까지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모르는 동안 그리스도교의 수직적 성격은 점차 잃어져가고 평면적인 면만이 강조되므로 그 거점을 잃어버려 가는 경향이 농후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심 또는 활동의 양상이나 동기도 일반적인, 운동전략적인 것 이상의 것이 없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 성서는 어떤 현실을 보여 주고 있나?

소명의 단계

성서를 보면 무대는 언제나 이 역사의 한복판이다. 구약은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사가 바로 하나님의 활동의 장이다. 거기 성속의 구별은 물론 영육이라는 구별도 없다. 그렇다고 윤리나 도덕 또는 종교라는 특정한 범주만이 신의 영역이 아니라 전쟁, 승리, 패배의 장도 그의 주관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구약에서는 어떤 사건에 언제나 중심인물이 있다. 그런데 등용 된 저들에게는 대체 다음 네 단계의 경험이 있다. 첫째는 혈기적인 의문에서 궐기했다가 철저한 체념에 빠진다. 둘째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그가 신비한 경험을 한다. 셋째로 그러한 경험에 다음에 <거룩 한 것>(Das Heilige)을 경험한다. 넷째로 그러한 경지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그 명령의 내용은 역사상의 구체적 사건과 직결된 것이며 바로 그 장으로 가라는 명령이다. 이런 단계를 체념종교경험지성소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몇 가지 예를 보기로 하자.

첫째는 모세의 경우다.

첫째,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적 혹사를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의 의문을 일으킨다. 그는 이스라엘을 혹사하는 이집트 군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어서 혈기로써 그를 때려 죽여 버린다. 그것이 폭로되어 그는 도망쳐서 미디안에 이르러 아내를 얻고 자식을 두고 양이나 치는 체념의 생활에 정좌한다.

둘째,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 호렙 산 가까이에서 양떼를 먹이 다가 신비한 경험을 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기에 가까이 가보았으나 불은 붙어도 나무는 타지 않는 신비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할 뿐 거기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셋째, 그 다음에 그는 신성한 경험을 한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평소의 생활과 구별된 절대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끊고 절대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경지이다. 이것은 지평선 상에 수직적인 것이 개입하는 사건의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종교적 용어로 하면 지성소의 경험이다.

넷째, 그러나 그것에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지고한 경지, 절대의 장에 섰을 때 구체적인 지시를 듣게 된다. 그것은 결단을 촉구하는 소리, 결단의 단계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았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보내어 너로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리라." 이것이 바로 모세의 소명 체험이다.

그와 유사한 또 하나의 예를 보자, 그것은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다.

첫째, 엘리야는 이방신인 바알종교의 팽창에 분노하여 마침내 바알종교의 사제 450명과 싸워 이기고 혈기에서 그들을 모두 한 칼에 죽여 버린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란 이방에서 온 여왕이 그 앙갚음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초인같은 그의 기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양이를 본 쥐처럼 광야로 한없이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채 기진하여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모세의 의용(義勇)이나 그 뒤의 체념과 같다.

둘째, 그러한 그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광경, 지진이 지축을 흔드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붙는 떨기나무를 본 모세의 경우처럼 단순히 신비할 뿐 거기 하나님은 없었다.

셋째, 그 다음에 <세미한>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경험, 절대의 경험이라는 것은 그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렸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모세가 "여기는 거룩한 곳이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다.

넷째, 그런 경지에서 그는 비로소 한 명령을 듣는다. 그것은 아합에게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명령이었으며 아직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천 명이 있으니 낙심말고 그들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애굽으로 가라는 모세의 소명 경험과 같다.

신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다. 그 중의 바울의 경우, 변화산의 이야기의 서술 내용이 그렇다.

바울은 자기 나름의 의분에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선에 나섰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으로 향하는 도중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에게 두루 비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신비한 경험이다. 그것은 그 지대에서 가끔 생기는 자연현상일 것이라고 풀이한 이들이 있으나 사도행전 기자는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신비한 사건의 경험이다. 그는 "땅에 엎드렸다." 이것은 지성소의 경험, 절대자와의 해후의 순간이다. 그것은 바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와 더불어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였던 것이다. 그는 예수를 절대자로 만난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지시를 듣는다. 그 내용은 아나니아에게 고했다는 말에서 볼 수 있다. "가라! 그는(바울)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나의 택한 그릇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그가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도 내가 그에게 보여 주리라"(행 9, 15-16)는 데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소명의 내용이다.

또 하나의 예는 변화산상의 사건을 서술하는 마가의 편집적 배열에서 볼 수 있다. 8장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게 되리라는 선언을 듣는다. 베드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단호한 책망을 듣는다. 이 책망 속에 그의 반대가 하나의 혈기적 의문(사람의 일만 생각하는)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동시에 절망적인 상태다. 그 다음에 변화산상의 경험을 한다. 예수의 변모, 엘리야, 모세의 출현 등은 신비의 경험이다. 그것은 황홀하여 그곳에 안주하기를 원할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말을 들으라"는 것으로 지성소, 절대자를 만난다. 그 예수는 그들의 소원과 상관없이 산하로 내려간다. 이것이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의 장소다. 거기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어린이를 해방시켜 주어야 하는 현장이다.

이상에서 체념에서 소명에까지 이르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보자.

신앙인이 가는 길

우리는 일반적으로 평면적인 일상성을 자명적인 것으로 알고 산다. 그 안에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본다. 그 안에서 부조리를 보면서도 못본 척 사는 것이 보통이나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더 참을 수 없어서 의분에 떨다가 마침내 제 있는 힘을 다 동원해서 그것에 저항하기로 궐기한다. 이러한 노년기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골충이다.

그러나 평면상의 현실은 사필귀정이니 정의나 선은 반드시 이긴다는 평소의 신념을 비웃는다. 결국 힘센 자가 이기고 힘없는 자가 깔려 죽는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제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을 몇 차례 거듭하는 동안 평면상의 힘의 위력을 인식한다. 여기서 아주 좌절하여 체념에로 들어간다. 적당히 살자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한때 모세처럼 체념 속에 살거나 한때의 엘리야처럼, 철저히 절망하거나 아니면 힘 앞에 굴복하고 그 줄을 타는 곡예사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지평적 현실만을 알고 수직적인 개입을 계산에 넣지 않는 자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길이다. 이른바 419 의사자들이 다 어디 갔나? 결국 그러한 골목에 안주한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필연성만을 알고 우발적인 개입,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차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고 해도 하면 할수록 점점 모를 것, 즉 신비한 것이 더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자연이나 역사에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부동의 법칙이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도 점차 모든 것의 존립이나 계속은 필연의 연속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의 점철이라는 것이다. 물론 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신비한 것으로 알고 그것 앞에 노예가 되는 데서 그 정체를 폭로시킴으로 그 이상 신비하거나 또 기적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어느 단계에 가서는 신학이 도달하는 세계와 우리가 말하는 신비, 또는 기적적인 것이, 일치될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신앙생활의 관문은 지평선 밖으로부터 개입해 들어와서 역사의 방향을 전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기적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사실을 믿게 되는데 기적의 경험은 절대로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와같은 기적의 경험은 우리 삶 전체에서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그 많은 전쟁과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 긴 것은 필연이라는 이가 있다. 성서는 그런 사실을 무수히 전하며 바울같은 이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한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큰 타락에로 이끌어 갈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 <초자연적> 경험을 한 자가 그것을 마치 자기의 소유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다. 가령 어떤 일부인들이 산중에 들어가서 어떤 특수한 경험을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가 입신한 무당처럼 자신이 어떤 신력을 지녔다고 믿고 자기의 독력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팔아먹기 시작할 때 그것은 결국 사람을 속이는 악마가 된다.

사람의 손에 들어온 것은 벌써 신의 것은 아니다. 괴테의 말처럼 사람의 손에 들어오는 것 치고 썩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이 참 신비한 경험이라면 오히려 나, 나의 존재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한계존재라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내가 절대라고 생각하고 노예가 되었던 것에서 해방이 되어야 한다. 신비한 경험! 그것은 나의 초라함을 발견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실은 아니다. 신비한 경험, 그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재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 다음 단계란 바로 절대자, 다른 말로하면 지성소를 만나는 일이다. 신앙이란 바로 이같은 궁극적인 것 앞에 선 삶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극히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모세의 경우대로 하면 가까이 있다! 여기는 구별된 곳이다. 그러므로 일상성의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경지다. 엘리야가 두려워서 제 얼굴을 가리운 상태, 바울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하늘이 무너져도, 내 생명이 끊어져도 또는 한 번에 천만금이 생기는 일이라도 <이것만은> 절대로 부정하거나 침범할 수 없다는 <절대> 앞에 서는 일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그 이름을 자기 위기의 모면,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놈은 인간적으로도 믿을 수 없거니와 물론 크리스천이 아니다. 지성소는 어디까지나 복종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지성소적 경험을 그것이 이미 자기에게 속해 버린 것으로 알고 자가 뜻과 일치시켜버리면 결국 아집과 독선을 낳아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 다음 단계란 절대자의 궁극적인 뜻을 듣는 일이다. 모세나 엘리야 또는 바울이 지성소적 경험 다음에 들은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 경험이 아니다. 거기에는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은 하늘, 피안 등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며 또 존 번연이 본 환상 같은 것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이 역사적 현실(지평선상)에서 지금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민족, 민중의 절규와 더불어 들리는 소리다. 모세가 들은 소리는 바로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소리에 호응하여 해방하겠다는 결의였다.

이 하나님의 뜻은 모세나 엘리야 또는 바울이 섰던 상황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들의 내적인 소리와 유리된 것일 수 없다. 가령 모세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소리는 그의 내적 고민과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버리고 온 자기민족의 수난의 환경을 계속 봤을 것이며 그 신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눈을 가렸고 귀를 막았다. 난 못해, 그러나 그의 도피가 결단을 강요받는 그의 변명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

그러한 그에게 바로 이 신음하는 수난자 군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절대의 소리가 명령으로 들린 것이다. 말하자면 모세의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뜻은 둘이면서 하나며, 명령하고 듣는 것이면서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결단해야 할 막다른 골목에서 예!하고 나서는 것이 바로 소명에 응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이럴 때, 스스로를 위한 어떤 <황홀경>에서 <너>, <이웃>, <눌린 자>를 위해서 자기를 투신할 때 거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양의 천명(天命) 또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 있다. 또는 숙명과 행위의 동시성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결국 역사적 상황과 하나님의 뜻과 결단, 이 셋이 동시에 부합 될 때 비로소 죽음도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제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형제와의 관계를 외면한 하나님께 향하는 직통로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궁극성 없이 끝까지 진실한 이웃을 위하는 행위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생애였고 바로 그가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 나선 것이 바로 바울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신비경험도 했고 <종교적 환상>도 봤으며 심지어 <방언>도 안다고 했으나 그런 것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절대로 그런 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결의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 몸에 그리스도와 같은 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숙명처럼 받았다.

(1976. 3.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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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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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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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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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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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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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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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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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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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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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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