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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낙인
갈라디아서 6, 11-17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

우리가 바울에 관해서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다음의 의문들은 그런 것들 중에 속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주장이 유대 전통적인 자랑인 율법을 깨뜨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대사회에서 율법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 사회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에 철저한 유대인인 그가 분노를 터뜨린 것은 정당하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바로 그 그리스도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치되 목숨까지 바쳤을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전 생애를 오직 그를 위해서 바쳤는데도 막상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주로 쓰고 역사적 실재를 나타내는 '예수'라는 칭호는 거의 쓰지 않았으며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거의 묵살하다시피 하여 그의 말씀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는 그리스도를 육을 따라(kata saza)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후 5, 16)는 묘한 선언까지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흥미없다는 뜻이라면 도대체 그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처럼 도취할 수 있었을까? 그와 내통하는 어떤 신비한 방법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바울의 편지는 복음선교라는 것에서는 다른 데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사회 정치적 불의에 대해서 거의 침묵할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듯이 탈출한 노예에게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라고 권할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는 계속 박해를 받았으며 그의 최후는 로마정권의 손에 의해 죽었다. 로마의 법에 의해 죽었다면 그는 예수처럼 정치적으로 처형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교회화된 종교적 교회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의문 앞에서 "예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녔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교에 전환한 것은 역사의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전승된 예수의 생애나 교훈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언급이 없고 분명하게 십자가의 사건밖에는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함으로, 그가 전향한 까닭은 그의 십자가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주장은 인간의 업적(율법의 행위까지 포함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준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부인가? 그것 뿐이라면 관념에서의 전향에 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만 볼 수 없게 한다.

"From hencefort let no man trouble me, for I bear in my body the brand of Jesus."

예수의 낙인(stigma)이란 무엇일까! 스티그마란 육체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시하는 표식이다. 희랍-로마 사회에서는 가령 자기 가축을 구별하기 위해서 쇠 인장을 불에 달구어 엉덩이에 지져서 표시하는 것을 스티그마라고 했다. 또는 노예 또는 전쟁 포로를 영구히 점유하기 위해서도 그 이마나 팔에 스티그마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등 특히 파렴치한 범죄자의 어깨나 이마에 스티그마를 찍었다.

고 중동 아시아 일대에는 자기들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종족 또는 군대들의 손바닥에 낙인을 찍으므로 그 소속임을 표시함과 동시에 의무와 권리를 부여했다. 이런 습성을 구약에서도 볼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원시민족이나 인도 같은 계급사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면 예수의 낙인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바울이 일부러 자기 몸에 "예수"라는 표시를 쇠인 장으로 찍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중세기 수도사들의 경우와 비슷했으리라는 상상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몸이 복음전파의 활동에서 쇠잔해진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도 하며, 내적인 고통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스티그마는 구체적인 것이다.

바울은 무수한 고난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만도 두 차례나 구체적인 체험을 나열한다. "극심한 환란", "곤경",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폭동을 겪고", "괴로운 노동을 하고" 등등(6, 4 이하). 좀더 구체적으로는 "유대인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반", "몽둥이로 세 번", "돌로 한 번", "파선이 세 번" 등등을 예거한다(11장).

이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몸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고 불치의 병을 얻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하여간 그가 지닌 스티그마는 구체적으로 육체에 지닌 것을 말하며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얻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누가 낙인을 찍었을까? 표현대로 하면 예수의 낙인 아니 예수가 직접 찍은 것이 된다. 그런데 본문은 할례 이야기로 시작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했는데 바울을 주축로 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건은 율법의 끝이라는 입장에 할례의 무용론을 폈다. 그런데 그것은 이방인에게도 문제되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도 할례를 요구하는 파들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했느냐는,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박해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았다. 그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저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비난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동족>의 손에 의해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적인 선언만이 아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간다고 했다(고후 4, 10). 이것은 관념적인 것을 뜻하지 않고 그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다. 그처럼 그의 낙인도 십자가를 자랑하므로 자신이 당한 상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수난)를 전하다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불법의 상처를 받은 바울! 만일 그것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억울한 일이다. 그 상처는 불의한 자들의 악의가 허용된 자리다. 의로운 자들의 행위가 불의한 자의 손에 의해서 이런 고통의 흔적을 남겨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 낙인은 복수심과 적개심을 일으킬 구체적 요인이 될 것이며 마침내 복수 행위로 정의의 싸움과 일치시킬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의 낙인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실은 불의자의 손에 의해 받은 상처이다. 그러면 가해자의 낙인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낙인이라고 한다. 만일 이 낙인이 불에 달군 쇠 인장으로 한 것이라면 불의자들이 한 것을 예수가 몸소 불에 달군 쇠 인장으로 바울의 몸을 지졌다는 말이 된다. 바울은 고난 속에서 얻은 이 스티그마를 그리스도가 지금의 자기의 삶에 간섭하고 자기를 구별하여 그의 종으로서 수난하도록 한 표시라고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공동체 의식을 바로 그를 위하는 수난 속에서 얻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하나의 의미로 파악해서 사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윤리적인, 또는 심미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 그는 그를 위한 육체적 고난 속에서 예수의 현실적인 고통에 동참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항용(恒用)하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낙인"이라고 한 것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자기 몸에 걸머지고 산다고 할 때도 "예수의 죽음"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역사의 예수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사건만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어떻게 고통당했느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역사적 고통에서 예수의 역사적 고통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오늘의 우리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다. 첫째는 우리는 이천 년 전의 예수를 어떻게 내 삶에서 현재적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가? 둘째는 우리는 불의한 힘과의 투쟁을 명령받고 있는데 어떻게 원수마저도 끝끝내 사랑하라는 예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천 년 전의 예수의 사실을 어떻게 내 삶에서 실감할 수 있을까? 성서를 읽음으로? 문학작품이나 예술품에 나타난 천재들의 직관에서? 아니면 신비적 체험으로? 또는 우리의 실존적인 분석으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매개물이 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에서 심미의 대상을 넘어서서 나의 삶을 거기에 참여시킨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서술이나 예술품이 이천 년 전의 삶을 거기에 참여시킨다는 보장은 없다.

반 고호의 작품 중에서 '겟세마네'와 '나사로의 다시 삶'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런데 둘의 특징은 거기 주인공인 예수는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겟세마네'의 그림을 구상할 때 예수의 의복을 푸른색 또는 오렌지색으로, 그가 말하는 천사는 누른색, 그리고 올리브나무와 땅은 적색으로 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구상을 하는 그는 "이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정이 격동한다. 우선 중단하자.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돌아오리라"는 메모와 더불어 중단했단다. 그러나 다시 착수한 그는 예수의 얼굴은 도저히 그릴 수 없어 마침내 올리브 나무만을 그림으로 거기 예수의 고민을 나타내려고 했다. '나사로의 다시 삶'의 그림에서도 예수는 끝끝내 그릴 수 없어 그 대신 태양을 그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진실했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로도 그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니 예수의 현재화란 관념으로도, 교리로도, 심미적 상상이나 종교적 환상으로도 될 수 없다. 아니! 그는 오직 내 몸으로! 내 몸에 어떤 형태로나 예수의 낙인을 받음으로 가능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의 공동체가 되는 일이다. 참 사랑하는 이는 내가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떼어내는 아픔, 그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당하면 당할수록 그가 내 안에서 생생해진다. 얼굴이 말할 수 없이 흉하게 된 어머니가 있었다. 그 자식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그 엄마의 얼굴이 부끄러워 함께 외출하거나 그의 또래들에게 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 엄마는 그 얼굴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곤 했다. 그 얼굴은 화상에 의한 것이었다. 밤중에 집에 불이 났을 때 자는 그 어린 것을 구출해내다가 받은 것이다. 그는 비록 어린 것이 멀어져도 그 상처를 자식의 낙인처럼 흐뭇해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무슨 수난을 당하고 있나? 그를 위한 수난은 구체적으로 형제를 위해, 정의를 위해서 후퇴나 타협이 없을 때 반드시 온다. 그것은 억울함, 오해, 폭행을 가져올 수 있다.

십자가가 내 현실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배신당하고 박해를 받고 마침내 투옥되고 처형된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면 그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 바로 그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가하는 것이 되지 않겠나? 세상과 담을 쌓고 밀폐된 분위기 속에서 위험한 것은 다 피한 안일한 자리에서 십자가를 아무리 노래한들 그것이 어떻게 자기의 현실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야 어떤 불의가 난무하든 내 영혼이나 구원하려는 종교적 이기주의자에게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자기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바울은 그런 십자가를 모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 몸에! 그의 낙인을 제 몸에 짊어짐으로써만 알고 있는 십자가를 말한다.

부정과 불의를 대항하는 싸움을 그리스도인만이 홀로 담당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걸지 않는 휴머니스트들도 이런 싸움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런 투쟁에 저들과 제휴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 분계선이 있다. 한쪽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수난을 당할 때 점점 적개심과 복수심에 호소해서 증오심을 조장하는데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수난을 통해서 예수의 스티그마를 체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받은 수난의 흔적은 바로 그 불의한 것에 사로잡힌 자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에게서 선택된 감격을 더한다. 그것은 동시에 예수와의 공동체 의식을 더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럴수록 좌절을 모른다. 여기 불의와 싸우면서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의 거점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처음 출발했던 고상한 동기가 계속 배신되므로 마침내 적개심의 화신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낙인>의 체험을 못한 증거다.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할 때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의 낙인>이란 뜻은 중요하다. 우리가 당하는 수난의 상처가 내게 공로의식 아니면 적개심이나 조장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영으로 출발했다가 육으로 끝내는 것"이 된다.

내 당하는 고통이 <그>를 위한 결과라면 숭고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의 낙인>임을 의식할 때 그 뜻이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1974. 3. 『현존』)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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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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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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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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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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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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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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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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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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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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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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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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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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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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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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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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