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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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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보 2, 1-11

창세기의 인간의 비극성은 자아의식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나"를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낙원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나를 의식했을 때 그 낙원은 사라졌다. 하나님께 대해서 나를 대립시키는 순간 한 몸인 아담과 이브도 나와 너의 관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격리가 생기게 되고 마침내 네 책임, 내 책임을 묻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인간 역사의 발달은 이 "나"의 의식이 점점 더 뚜렷해진 과정이다. 가령 우리 나라의 경우만 봐도 전에는 최소한 가족이이라는 영역 안에서 "우리"라는 의식 속에 나의 의식은 희미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심지어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나의 의식이 강해지면서 점점 "우리"는 후퇴 되어 가족제도는 무너지고 이른바 핵가족화되어 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도 내 것 네 것의 한계가 자꾸 분명해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 자아 의식을 이른바 주체성이라고 해서 강조하며 그것을 책임사회 형성의 가장 기본 조건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날로 멀어진다. "나"의 강조는 "너"와 다르다는 의식을 조장하고 그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대립이 있게 되며 그것이 심하면 충돌을 초래한다. 그래서 인간 세계는 생존경쟁이 되며 약육강식이 마치 삶을 위한 필연적인 것으로 전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마당에서는 인격의 직접적인 관계는 성립되지 않고 오직 타협, 협상이라는 기술에 의해서 유지될 뿐이다.

교회란 대립된 나와 네가 다시 만날 수 있는 통존의 자리다. 까닭은 대립된 나와 네가 한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인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사랑의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과 사귀고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느끼고 동정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것은 그때 교회생활과 예배 때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들은 한 그리스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 17-18).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관계를 단적으로 잘 나타낸 것으로 너와 나의 대립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축복 아래 있으면 으레히 "한 마음", "한 사랑", "한 뜻"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 여전히 분열이 있고 대립이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나의 의식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일에 있어서나 "다툼"이나 "허영"으로하지 말라고 한다. "다툼"이란 이기심에 의한 경쟁(eritheia)을 뜻하며 "허영"이란 있는 것 이상 또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심리로서 모두 자아의식과 직결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길 뿐 아니라 자기 일만 생각 말고 남의 일도 생각하라고 한다. 겸손은 자기 주체성을 포기한다는 뜻에서 악덕으로 간주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거나 자기 일에만 충실하지 않는 것도 결코 미덕으로 보지 않는 희랍의 윤리사상에서 볼 때 이 권 고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 차이는 희랍사상은 자아의 존엄성에 윤리의 근거를 둔 데 대해서 바울은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윤리의 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뒤를 이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오"라고 하고 6절부터 이른바 "그리스도 찬가"를 서술한다. 이것은 바울의 표현이 아니고 당시의 교회에서 이미 전승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철저한 자아포기이다. 그의 본래의 자아는 신의 본체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철저히 "비웠다." 그것은 자기 권리를 포기할 뿐 아니라 스스로 노예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인간됨이다. 이것은 그가 "인간성"을 입었다는 뜻이기보다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데서 참 인간성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그는 십자가에 자기를 내 맡겼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인간의 권리마저도 포기한 행위로서 그 안에서 인간의 있어야 할 본래 모습을 계시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6-8절까지 자기를 철저히 포기한 그 주체성이다. 자아를 주장하는 주체성보다 자아를 포기하는 그 주체성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버림으로 자기를 살리는 원리이며 죽어야 산다는 역리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6-8절에서는 자아를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체성이다. 그런데 그 다음 9-11절까지는 그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체로 그 주도권을 잡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겸허해진 그를 "올리셔서" 모든 것이 그에게 무릎을 꿇게 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그가 자기를 비웠다 함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나를 위하는 데서 존재했다"는 뜻이며 "나는 너를 살게 하고 너는 나를 살게 할 때만 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바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의 현실이다.

이 그리스도 찬가는 바울의 말대로 하면 첫 아담에 대한 둘째 아담의 모습이다. 첫 아담은 "나"를 찾기 위해 항거하므로 너를 잃고 또한 나를 잃은 데 대해서, 이 둘째 아담은 나를 버림으로써 너를 찾으므로 대립 이전의 자아인 아담을 도로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배우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 같은 권고를 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은 어떤가? 이 물음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를 암시할 것이다. 바울은 저들이 "하나로 뭉칠 것"을 권고하면서 그럼으로써 그의 "기쁨을 차고 넘치게 해 주시오"라고 한다.

그는 저들의 바른 삶에서 자기 삶의 보람과 희열을 찾는다. 우리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의 처지를 회상하면 이 말이 우리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그는 지금 억울한 처지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지탄을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가 자기에 집착했다면 그가 사느냐 죽느냐에 그의 기쁨과 슬픔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저들을 걱정하는 속에서 완전히 자기를 "비우고" 있다.

아니 저들을 생각하고 위하는 속에서 참 자기를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배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그의 민족을 향한 정열에서도 본다. "내게는(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인 형제를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히려 나는 한이 없습니다"(롬 9, 23). 이것은 너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예수의 십자가의 뜻을 몸으로 배운 마음이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하게 "다같이 나를 본받으시오"(빌 3, 17)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한다(고전 11, 1). 이것은 모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그의 고백처럼 너를 위해 살므로 자기를 비운 자의 자세다.

끝으로 다시 물을 것은 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자들이 왜 오히려 분열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3절에서 말한 "이기심"이나 "허영"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저들에게 있는 별을 말한다. 즉 종교적인 측면에서 생긴 우월감과 이기주의다. 가령 "하나님은 내 편에 섰다"고 확신하는 경우에 그는 벌써 너와 구별한 자아의식에 사로잡혀 교만해진다. 또 나의 구원을 최대의 목표로 생각할 때 그의 이기심이 종교의 탈을 쓰고 연장된 것이다. 또 내 믿는 믿음만이 유일한 정도라고 고집할 때 그는 벌써 진리의 소유자처럼 환상하여 다른 사람 위에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런 것은 한결같이 종교의 이름 밑에 이 자아를 더 강하게 무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른바 종교의 이름 밑에서 더 심한 분열과 대립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들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를 반역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것이 걱정이 되어 교회에 속한 빌립보인들에게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세워 그것을 배우라고 한다.

(1972. 4. 『새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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