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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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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오복음 13, 44; 마르코복음 4장

오늘 본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씨를 심은 농부가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이 돋고, 이삭이 나오고, 낱알이 맺혀서 추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 농부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통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인가?

요점은 지극히 간단하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나타낸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세상에 도래하느냐"를 가르친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씨가 땅에 심어진 것처럼 이미 심어져서 침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는 이 역사 안에서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 즉, 이 역사는 점점 무지에서 밝아지고 암흑의 속박에서 풀려나고 기근과 병고가 없어지고 사회모순이 제거되므로 마침내 아무 걱정도, 문제도 없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확실히 오늘의 세계는 과거와 비교할 때, 편리해졌다. 점점 미신에서 해방되고 민주사회가 되어가고, 의학의 발달로 질병의 위협이 줄어들고 과학의 발달로 식량의 문제가 밝아졌으며, 문명의 혜택으로 쉽게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 민족 사이의 담이 낮아져 가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 발전의 흔적인가?

그러나 반면에 이 역사는 결코 밝은 데로만 발전하지 않고 점점 망해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기계문명이 발달되면 될수록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 사이가 멀어지고 세계는 한 운명체처럼 되어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될 수 있는 핵무기의 위험 아래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근경에는 생태학적 위기로써 마침내 지구전체가 유기체로서의 기능이 완전 마비될 날이 머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노동에서 해방되고 신속히 그리고 편리하게 움직이고 살 수 있으면 행복한 세계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물질의 풍요, 기술 때문에 이제는 천재지변에 의한 지구의 멸망(노아 홍수같은)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에 의해서 전체가 망해버릴 수 있는 위기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 세계는 들끓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에 와서는 기술과학의 발전으로 Utopia가 올 것이라는 낙관론이나, 이대로 발전하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리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성서에서는 이 역사 자체 안에 그 나라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근대화가 그 나라를 가져온다는 약속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른바 선진국의 고민에서 보고 있으며, 공산주의 사회에서처럼 어떤 이데올로기로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약속도 믿지 않는다. 벌써 공산세계는 그 많은 희생을 하면서 수세대를 한 골수로 밀고 나왔으나, 하루 아침이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이 될 수 있는 현상을 보며 고민에 봉착하고 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떻게 온다는 말인가? 영원히 안 온다는 것인가? 이제는 그런 약속은 하나의 잠꼬대로 접어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체념에 앞서 상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러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전체로서나 개인으로나 질식하여 고뇌 속에서 자학하면서 일찍 죽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나라는 확실히 온다. 이것은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들의 신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세계, 특히 우리 나라가 되어 가는 꼴을 보면, 우리의 희망은 어두워진다. 오늘 우리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공황은 우리를 이토록 고갈 상태에 빠지게 한다. 이승만 때는 GNP 100만 달러, 그리고 수출 3억 달러만 된다면 했는데, 오늘은 그보다 몇십 배의 통계숫자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희망은 더 어두워만 간다. 그런 탓인지 누구를 만나도 어떤 상황에 가도 그저 답답한 분위기고, 아무 의욕도 보이지 않으며, 점점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불신풍조만 늘어간다. 그러면 이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는 무슨 뜻이 있는가?

한국에는 이농현상이 극도에 이르렀다. 시골의 농부들은 완전히 실의에 빠져 있다. 저들은 땅에 곡식을 심는다. 애를 써서 가꾸어도 원가가 나올지 말지 한다. 그 애씀의 삶에 새로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삶에 대한 기쁨이 있을 까닭이 없다. 심은 씨앗과 자기 노동력, 그 결과에서 올 결손에만 꼭 매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볼 눈도, 겨를도 없다. 그렇다고 새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도시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슨 영업을 생명을 단축할 만큼 혼신을 바쳐 한다. 그러나 물가는 오르고 세금은 뭉턱뭉턱 잘라가고, 아이들은 학비로, 잡비로 막 잘라간다. 그래서 언제나 겨우 적자를 면하거나 아니면 적자에서 허덕인다. 결국 남는 것은 고생 뿐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주변의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식까지도 모두 뜯어가는 아귀처럼만 보이게 되고, 이웃은 적대자로만 보이게 된다. 날로 삶이 피곤해진다. 절망에 빠진다. 결국 삶의 파산선언을 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가실 날이 있을까? 극히 회의적이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저 이러다 말지!"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아니! 그 나라는 반드시 온다. 네 힘으로 써가 아니라 너도 모르게 반드시 온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 말씀만 믿고 그저 미래만 쳐다보고 있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이 상태에서도 그 기쁨을 체험하는 일이다. 하늘나라의 비유 중에 보물이 묻힌 밭의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보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교에 이 비슷한 비유가 있다. 그것은 그런 밭을 발견하고, 집의 재산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서, 그 보물을 팔아서 큰집을 짓고 종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의 중심은 그 마지막 행복된 결말이 아니라 그 보물을 발견한 그 기쁨에로 이동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기쁨이다. 물론 이 기쁨은 미래를 전제함으로 와지는 것이지만, 이 기쁨은 그것 자체로 독립된다. 이런 기쁨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것은 올(미래) 그 나라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진 증거다.

오늘의 비유를 보자. 농부는 씨를 심었다. 그것은 장차 커서 수확을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되면서 독립된 것은 바로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어떻게 싹이 되고 자라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 되리라든지, 그러므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등등 상상한 기쁨이 아니라, 내 이해와 상관없이 그것이 땅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는 일, 즉 내 노력과 상관없는 뜻밖의 일이 진행되고 있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한 경탄, 그것을 믿고, 그것에 참여하는 환희! 이것이 바로 오늘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지는가?

프래그머티즘이 우리에게 독을 주었다. 무엇이나 실용가치, 이용가치로만 생각하게 되었기에 언제나 이익과 더불어 기쁨은 예속되었고, 독립된 기쁨 자체는 완전히 잃게 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진리 자체, 아름다움 자체, 미 자체를 위한 기쁨은 없어졌다. 이것은 "그저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기쁘다"라는 이런 기쁨이—이것이, 참 사랑의 기쁨. 신앙의 기쁨인데—없어져 간다.

그래서 젊은이가 "아! 달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부모들은 "달이 밥먹여 준다더냐? 공부나 해라"고 말하게 되며, 음악에 도취해 있는 젊은이에게 "야! 음악이 널 대학에 넣어 준다더냐! 밥먹여 준다더냐!" 식으로 대응한다. 이런 현장에 신앙의 자리가 있을까?

이 곡식이 저렇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 그것은 분명히 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 생명의 약동! 거기 어떤 다른 손길을 느끼는 이 감격이다. 그러나 그것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그 감격을 모른다. 그는 매일 김을 매고, 흙을 북돋으며, 물을 준다. 부모로서 자식이 자라는 것을 보고 감격할 수 있다. 나야 그저 낳아 놓은 것뿐인데, 그게 자라고 생각하고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흐뭇하다. 그런 경우 그 아이가 나를 먹여 살려 주리라는 전제 없이 그저 그 자체가 기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가는 것은 내 노력의 결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바로 그래서 경탄스럽다.

이처럼 내 노력, 내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보고 기뻐하고 경탄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을 때, 거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그가 돈주머니로 보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가 생명의 위기에서 자기의 조그마한 손댐에서 소생될 때, 그 한 생명이 살아난다는 그 일 자체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그 기쁨!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앞당긴 기쁨이다. 교사가 그 하잘것없는 사회적 지위와 박봉의 측면에서 볼 때, 초라한 자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형편없는 아이들이 차차 정신을 차려 지적으로, 인간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저 그것 자체를 보고 기뻐하는 기쁨, 한 예술가가 심미경에 빠져서 "이것이 돈이 되냐, 남에게 인정받아 출세하는 작품이 되느냐"와 상관없이 새로운 미의 세계에 심취할 수 있는 그 기쁨, 하여간 내가 조금 관여했거나 말았거나, 어느 누가 끝까지 더러운 데 물들지 않고 깨끗이 살거나, 또 갸륵한 일을 하는 것을 보는 경탄과 그런 기쁨! 사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힘을 넘어서 불멸의 여신처럼 살아가는 삶에서 <영원한 이>의 손길을 느낄 때, 바로 그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의 기쁨을 앞당겨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기쁨이다. 돌아오는 아들을 무조건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에서, 한 푼 돈을 찾고 기뻐하는 여인의 기쁨에서,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오히려 더 많은 짐승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그 기쁨에서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기뻐하는 감격이다. 이런 기쁨, 이런 감격이 그 나라 도래의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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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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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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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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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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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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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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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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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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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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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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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도(夜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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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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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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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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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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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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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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