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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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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
요한계시록 21, 6-8
1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다.
목마른 자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에서 거저 마시게 하겠다.
그러나 …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희랍어 알파벳의 첫 자와 마지막 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처음>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알케>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있기 이전의 공허 상태와 같은 것, 이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어떤 것을 말합니다.

다음에 <끝>이라고 번역된 <텔로스>는 <끝>이라는 뜻도 있지만 <목적>이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이요 끝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성서적인 말로 바꾸어 보면 "나는 창조의 근원이요 심판 또는 종말이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일반적인 시간개념에서 풀이한다면 "나는 과거요 미래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고 말한 현재시형을 포함해 보면 이 말은 "나는 과거요 동시에 미래다, 나는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처음이거나 끝이거나 창조 또는 목적 … 무엇이라고 하든 그것을 말하는 "나는 …이다"고 하는 현재의 그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재에서 말씀하는 이 현존, "나는 …이다"고 하시는 그분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2

지금 우리는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낙엽이 지고 잔디는 노랗게 퇴색합니다. 이런 걸 보면 쓸쓸합니다. 이 쓸쓸하다는 것이 현재입니다. 그런데 이 현재는 봄과 여름이라는 과거의 결과입니다. 즉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가 이 시점, 이 현재를 규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어떤 느낌을 갖거나 또는 어떤 뜻을 찾을 때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지금이 쓸쓸하다고 생각하든 기쁘다고 생각하든 간에 현재가 어떤 면에서나 내게 의미를 주는 것은 과거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미래와의 관계에서 와지는 것입니다. 즉 내게 어떤 슬픔이나 쓸쓸함을 안겨 준다고 할 때에는 이제 모든 것이 시들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추운 겨울이 오리라는 사실을 앞당겨서, 그 거울로써 현재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가을의 모습이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밭을 볼 때 생기를 잃어 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이 무르익는 것을 보고 추수할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추수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추수한 것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것을 생각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현재는 미래와의 관계에서 한없이 기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무엇으로 기대하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삶은 판이하게 두 갈래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만일 미래를 "끝"이라고 보면 현재는 미래와의 관계에서 앞당겨 공허한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또 두 가지 삶의 태도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는 앞당겨 현재의 무의미성에 매여 비관할 수 있는 경우와 또 하나는 현재를 최대한으로 즐기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삶 속에는 애수가 더해 갈 것입니다. 그러면 날이 지날수록 삶의 의욕은 점점 감퇴되고 마지막엔 아직도 남은 자기마저 포기하기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에겐 지금이 더 바쁜 때입니다. 이 마지막 고비를 잘 지켜야지, 익은 곡식을 새들에게 뺏기지 말아야지,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간수해야지 … 이래서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가 비록 힘겨운 일로 차 있다고 해도 추수하는 미래 때문에 이 현재는 기쁨으로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위의 두 경우 중에 현재의 삶은 송별하는 쓸쓸함을 달래는 행위가 되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것이 기쁨에 찬 환영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겠지만 우리의 현재는 유아기, 유년기, 소년기 … 등, 과거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간, 현재를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은 과거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미래와의 관련에서 생깁니다. 젊은 나이에는 많은 계획을 세우고 화려한 꿈을 꿈으로써 현재를 이끌어 갑니다. 그에게는 미래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꿈에 부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면 미래는 가능성이 아니고 오히려 내게 <끝>으로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끝>이라는 의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현재는 내게 폐쇄적인 것이 되고 슬픔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 미래를 끝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의 완성의 때요 목적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래는 오늘의 나의 완숙을 가져온다. 나의 과거나 현재는 이 미래를 위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현재는 순간순간이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젊은 때보다 나이 든 지금의 삶의 의미가 더 귀합니다. 그것은 목적에 더 접근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마치 가을을 맞는 농부의 그것처럼 기쁨과 기대로 부풀 수 있습니다. 나는 노인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추의 밤나무 아래에는 저절로 떨어진 알이 있는데 그것이 많은 잎 속에 묻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로 그는 "보잘 것 없는 한 늙은이에 불과하나 혹시 저절로 영글어서 완결되어 떨어질 것이 있을 지도 모르니 좀 내 주변을 찾아보시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게도 완결의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루 하루의 삶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몇 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고 몇날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늙음에 따라 점차 그의 삶의 날을 시간으로 바꾸어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 시간 한 시간이 그렇게도 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끝은 내게 하나의 완결이 될 수도 또 새로운 출발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미래와의 관계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미래를 무엇으로 기다리느냐에서 현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반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관련시키는 경우입니다. 그것도 역시 현재에서 출발합니다. 현재의 삶이 막힙니다. 그런 경우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자기를 개방함으로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도 내게 절망(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는 그는 이래서 되겠느냐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 과거에로 소급합니다. 그때 그는 현재도 미래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경우 과거는 원인이고 현재와 미래는 그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경우 그는 이 과거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종래 그럴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할 때 그는 과거를 저주합니다. 그런 경우에 욕처럼 나를 낳은 모태와 그 날까지 저주하게 됩니다. 이래서 그는 현재도 미래도 상실하게 됩니다. 또 미래를 단순한 "끝"이라고 보는 사람 중에는 과거를 미화하여 추억으로 과거에 머물므로써 현재도 미래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미래를 끝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의 완성이요 목적이라고 보는 사람에게 과거는 다르게 보입니다. 그에게는 과거는 슬픈 것이거나 실패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고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하게도 됩니다. 그것은 완성의 미래에 대해서 개방된 오늘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이거나 계절 또는 삶이 지나갈 때, 나는 미래와 과거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대체로 미래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텔로스>라는 단어가 끝이라는 뜻과 아울러 목적이라는 뜻을 갖듯이 우리의 미래는 목적일 수도 있고, 유한의 끝이 바로 무한에의 항구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과거라는 것이 오늘과 내일을 낳게 하는 축복의 근원일 수도 있고 동시에 빠져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저주의 뿌리 같을 수도 있습니다.

3

그런데 이 과거, 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현재가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보람을 느끼고 내 삶에 충일되어 있으면 미래도 보람과 환희와 희망의 가능성이 되지만, 나의 현재가 불만으로 차 있고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면 미래는 필연과 같이 폐쇄되고 과거는 단지 만회할 수 없는 화근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기본사상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희랍어로 '과'라는 말이 있는데, einei en이 eineiek를 결정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기본 사상입니다. 즉 내가 <어디에(in) 있느냐>하는 것은 <어디에서(from) 왔느냐>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현대말로 바꾸면 existenz가 essens를 결정한다는 말도 됩니다. 나의 미래가 뚜렷한 청사진으로 내 손 안에 들어와서 현재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의 나의 행위와 결단이 내 미래를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라는 것도 고정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의 삶이 그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현재를 시간의 차원에서 볼 때 이같은 일은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믿는 것은 망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안에 있는 나는 과거를 만회할 수도 없으며 미래를 앞당겨 올 수도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나 그 결과는 지금에 연속됩니다. 또 미래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동시에 끝을 의미합니다. 시간으로서 현재는 양쪽의 영향을 받으나 그것에 손을 뻗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으로서의 현재에 있어서 과거와 미래는 "끝"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제한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가 버렸기에 시원한 듯하나 나에게 애수를 남기고, 미래는 새 가능성이나 끝을 의미하기에 불안하게 합니다. 이 안에서는 원인과 결과라는 엄연한 질서가 나를 구속합니다. 그런 뜻에서 과거는 "원죄"요 미래는 심판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다"라고 하는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했습니다. 시간의 개념에서 보면 처음(과거)이면 처음(과거)이고 나중(미래)이면 나중(미래)이지, 처음이 나중일 수도 미래가 과거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과거요 동시에 미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간개념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나는 아브라함보다 전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때의 동사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시형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시간개념이 아닙니다. 나는 영원한 현재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실 때도 시간적인 틀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시간의 숙명성입니다. 거듭난다는 뜻도 영원에서부터 영원한 현재를 아는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리스도를 약속과 성취라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 하며 동시에 그는 우리의 심판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씀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과거에서 풀어 주셨고 새로운 가능으로 미래의 문을 여셨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과거에서 탈출하라는 말이고, 심판주라는 말은 미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고 그에 의해 열린 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열쇠를 그 손에 쥔 현존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는 말입니다. no more인 과거와 not yet인 미래를 현재로 환원하는 이, 그래서 영원한 현재로 만드는 이가 곧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에 발을 디딜 때에만 이 과거와 이 미래에서 참 자유할 수 있습니다.

현존의 그리스도가 내게 충만할 때에만 나는 과거에서 해방되고 미래는 언제나 내게 희망과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한탄하고 미래를 피안의 위로로 동경하는 것은 현재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공허한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구원은 현존의 그리스도를 찾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현존의 그리스도와 내가 깊은 관계를 맺고 함께 있는 것을 가리켜 성서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의 영원이게 합니다.

그러면 알파와 오메가이신 이 영원한 현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교회의 이해 로는 현존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는 내게 현재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설교를 들을 때를 말합니다. 둘째는 성례전에 참여할 때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서 그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 셋을 합하여 결국 우리는 교회에서 그를 만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살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란 제도적인 것, 즉 교리가 있고 교파가 있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와 시간과 형식이 제정되어 있는 바로 조직된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 신학은 일찍부터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참 교회의 모습은 미래적인 것이며, 궁극적 미래에 비로소 참 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에 있어서는 누구도 교회라는 영역의 한계를 금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 로마교회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이 말을 일소에 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에 와서도 해야 할 말씀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또는 말씀에 의한 그리고 말씀에 복종하는 공동체라고도 합니다. 오늘에 와서도 이같이 교회 밖에서 영원한 현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로마교회라거나 어느 교파라거나 기성 조직교회라고 하는 말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참 교회는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선 자리에서 참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찾는다고 할 때 기성화된 집을 찾아 입주하듯이 그렇게 기성화 된 것에 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XX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며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이는 "목마른 자에게는 생명수를 줄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찾는 자는 반드시 영원히 현재에서 살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1972. 1. 『현존』)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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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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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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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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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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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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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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