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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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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
요한계시록 22, 10-16
이때

계시록 22장 10-16절의 초점은 <때>가 가까웠다는 예언이며, 그런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할 것인가하는 경고와 지시다.

그 <때>란 바로 "내가 속히 오리니"에서 표시된 대로 <그>가 오실 때이다. 그는 속히 오실 것이다. 속히 오마고하는 그는 누구인가?

(1) 그는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라고 한다. 역사의 시작이요, 또한 그 종말을 짓는다. 이것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 역사의 주인이다.

(2) 그 <나>는 세계정신이니 역사의 법칙이니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이다. 그 <나>는 바로 이 역사적 존재로 오셔서 사건을 일으킨이다. 오셨던 그가 오리라는 것이다.

(3) 그 <나>는 "빛나는 새벽별"이라고 한다. 가장 티없이 맑고 빛나는 것이 새벽별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뜻은 "여명"을 업고 오시는 이다.

이것으로 <지금>이 바로 어느 시점임을 밝히고 있다.

역사의 말을 연 이, 역사적 존재로 온 이, 낡은 역사와의 대결에서 역사 악에 짓눌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고 역사의 악순환 속에서 수난하는 인간의 고통을 떠맡은 이, 그러나 최종적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므로 새 역사의 장을 정초한 이, 바로 그가 낡은 역사의 종말과 함께 새 역사의 막을 열기 위하여 "곧 오리라"는 것은 낡은 역사의 종말과 함께 새 세계의 막이 열리는 전야의 새벽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이때는, 곧 종말 직전의 때라고 한다.

그래서 서두에 이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한다. 계시록과 계통상 관련이 있는 다니엘서에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인봉하였다"(12, 4)고 한다. 이것은 그 마지막 때가 안 되었기에 비밀에 붙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이 본문은 "그 말을 인봉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그 때가 문 앞에 다가섰으며, 그러므로 역사의 비밀이 공개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징조

이 때, 이 종말 전야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여 양극화 현상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더욱 불의를 행하게 하고, 더러운 자는 더욱 더 더러운 일을 하게 하라. 의로운 자는 더욱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자는 더욱 더 거룩한 일을 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양극화 현상이다.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개같은 놈들! 마술사들, 권모술수자들! 음탕한 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저들은 더욱 더 미친 개처럼 되어, 더 교묘하고 무자비한 권모술수를 기술화하고 살인자가 되고, 우상숭배자들은 점점 더 자신이 고찰해낸 제도나 이데올로기, 또는 어떤 집단 또는 특정 인간을 철저히 신성화, 신격화하여 그것을 건드리기만 해도 사정없이 처단하게 되며 또 거짓 위장 등을 처음에는 자기방어를 위하여 마지못해 하다가, 그러는 동안 점점 밥먹듯 하게 되며, 마침내 이 전야가 오면 거짓을 자기보존의 방패로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장과 상통한다. 바울은 로마제국하의 죄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린 자(1, 23), 모든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자, 시기하고 분쟁하고 사기를 치고 살기에 등등한 자, 뒤에서 수군수군 음모를 하고 남을 중상하고 하나님을 증오하고, 오만하고, 제자랑만하고 악을 꾸미며 모략만 하고, 조상의 염원을 배신하고 우매하고 무정할 뿐 아니라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살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1, 29-), 이런 자들이 점점 더 난무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나! 잠들었나! 외출이라도 했나!(시편, 니체) 하는 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바울은 아니!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제멋대로 내맡겨 두며, "그런 타락한 상태에 내버려 두신 것"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저들이 자멸하게 되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 더러운 자들은 더욱 더 불의하고 더럽게 되도록 하라"는 명령법을 쓰고 있다. 왜? 어떻게? 그것은 의로운 자, 구별된 자(거룩한 자)들이 이 전야적 암흑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령과 연관된다.

이에 반해서 의로운 자, 즉 구별된 자는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되리라고 한다. 이래서 양극화다. 마지막 날 전야는 흑백이 철저히 구분되고 폭로될 것이다. 철저히 갈라짐이 이 전야의 특징이다. 그것은 추수 때 곡식과 가라지가 뚜렷이 갈라지듯 막다른 골목에서 위장의 가면을 벗고 그 정체를 드러내듯, 다 폭로될 것이다. 한마디로 심판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의 말씀처럼 한 이불 속에서 동상이몽하듯, 한 맷돌을 함께 돌리던 사람들이 한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염소와 양이 따로따로 갈리듯 서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전야 다음, 바로 그날, 속히 오리라는 그가 오는 날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의롭고 거룩한 자들에게 "보라 내가 속히 오겠다. 나는 각각 그 행위대로 갚게 되리라" 하고, 그들에게 각각 상을 주리라고 한다. 무슨 상을, 그것은 새 세계,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다. 그것은 생명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문을 통하여 성(도시)으로" 들어가게 될 상이다.

이에 반해서 불의를 더욱 더 저지르고 점점 추악한 일만 하면서도 기고만장하던 자들에게는 벌이 주어진다. 그 벌은 극히 간단하다. "다 성 밖에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새 세계, 새 시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망하는 세계, 그 시대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래서 성 안과 밖으로 갈라진다. 이것은, 히브리서(13장)의 뜻에 비춰보면, 주객이 역전한다는 말이 된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처형된 사실에 주목한다.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인민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13, 12).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성전제단의 피를 바친 양이나 소의 살과 가죽과 배설물이 처리된 사실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새로 인식한다. 구약에는 인간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하여 바쳐진 저 짐승들의 살과 가죽과 배설물을 오염될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여, 성문 밖에 끌어내어 불살라 버리도록 율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로마의 관권과 야합한 유대 종교지배자들은 예수를 전염균처럼 성문 밖에 끌고 나가서 죽여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기득권자들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성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고 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자들의 갈 길을 지시한다. 이것은 불의한 자, 더러운 자, 즉 낡은 세계의 주권자들은 낡은 성안에 도사려 있고, 예수가 성문 밖으로 쫓겨난 것처럼 그의 의에 살려는 자는 성문 밖으로 추방당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날이 오면 역전되어 불의한 자는 성문 밖에 있게 될 것이며 의로운 자들이 성 안에 있게 되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반된 내용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성을 찾고 있다"고 한다. 즉 낡은 성에서 추방당했으나 실상은 이제 올 새 세계, 새로운 예루살렘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제 망한 낡은 성에서 탈출하자는 것이며, 반면에 기득권을 독점하기 위해 저들을 추방한 불의한 자들은 이제 망한 낡은 성과 운명을 같이 하므로, 새로운 시대 새 세계관에서 보면 그것은 성문 밖에 머문 자들이 된다.

이렇게 나뉘어질 것을 21장 6-8절에서 다음 같이 표현한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다. 목마른 자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에서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자는 이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치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한 자와 음탕한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장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이다.

전야에 해야 할 일

그러면 이 전야에 의로운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의로운 자는 더욱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더욱 더 거룩한 일을 하라"고 한다. 어떻게? 첫째로 "두루마기를 깨끗이 빨라"고 한다. 새해를 맞기 위해서 낡은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입듯이,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해서는 비록 가난하여 새 옷을 못해 입을망정 낡은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입듯이, 그렇게 더렵혀진 옷을 깨끗하게 빨라고 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빨라는 것인가?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워진 의복을 깨끗이 빨라고 한다. 새 세계의 관찰자가, "저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소"라고 물으니 "그들은 큰 환란을 거쳐 온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두루마기를 어린양의 피로 빨아 희게 했소"라는 대화가 있다(7, 13-14). 이상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흰 옷 입은 자, 즉 두루마기를 빤 자들은 큰 환란을 겪은 자들이라는 점과, 둘째는 저들의 두루마기는 어린양의 피로 빨아 희게 했다는 점이다. 더러워진 두루마기는 예수의 피로 빨았다. 그의 피란 결국 수난이다. 그 피가 어떤 마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난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자기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저들이 큰 환란을 겪은 것은 바로 이 수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고통받은 자들의 고통을 대신 걸머진 아픔이라면 저들은 바로 그 길을 걷다가 환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한 수난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새 시대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불의한 자가 독권하여 횡포하는 시대에서 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 수난을 당해야 하나? 그것은 고행주의에서 말한 것처럼, 수난 자체에 의미를 두어 자신을 괴롭히라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수난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가 해야 할 둘째의 일이 있다.

둘째 "불의한 자, 더러운 자를 더욱 불의하게 하고 더욱 더럽게 하라"는 명령이 그것이다. 왜? 어떻게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불의를 조장한다는 말인가? 더러운 행위에 가세하란 말인가? 이 이해하기 힘든 명령은 그 다음의 "의로운 자는 더욱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한 일을 하라"는 명령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된다. 이 적극적인 명령은 사실상 듣는 자가 해야 할 일이 그 중심을 이루며, 불의를 조장하라는 것은 비록 명령형으로 되었지만 의로운 싸움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을 예언한 것이다. 의로운 자가 의로운 기치를 높이 들수록 거룩한 자, 즉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선 싸움을 위하여 선택된 의식이 행위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불의한 자는 더욱 더 반발하고 불의로써 얻은 자기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더욱 더 더러운 짓으로 반발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반동의 법칙처럼 되어 있다.

역사는 의로운 자의 피를 흘리고서, 뒤에 그들의 비석을 세우는 일을 되풀이했다. 의인을 죽여버리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옳은 뜻과 행동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의로움이 자기들의 추악함을 폭로하기 때문에 수세의 상태를 만회하기 위해서 공세를 철저히하는 것이다. 보다 악하고 보다 더러워지는 것은 결국 자기방어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결정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의롭고 거룩한 싸움을 더욱 철저히 하라는 명령이 된다.

이상에서 본문의 뜻을 풀이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언의 성격이다. 예언은 점쟁이가 하듯 어떤 숙명적 예견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회학적 법칙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예언이 저주와 정죄적 단언의 형식으로 되기가 일쑤나, 거기에는 언제나 그러한 운명을 피하라는 권고와 경고의 성격이 있다.

우리가 선 자리

정말 그는 속히 올 것인가? 우리는 정말 새 시대의 전야에 서 있는가? 1919년 3월 1일의 기미독립선언에는 바로 전야적 희망이 충분했다.

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來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착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작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來하여 만물의 호소를 최촉하는도다……

이 선언은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이 계기가 되었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무력침략에 의한 식민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31독립선언은 낡고 위력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도의 신천지가 오는 새 역사의 여명을 바라보는, 보다 고차적 투시력을 과시했으며 그것이 민족 저력을 천하에 시위하는 일대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러한 신천지는 오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식민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의 한국 강점을 인정한 채 우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를 강점한 일본은 후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불의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오히려 암흑 시대를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속은 셈이다. 그후 30년, 2차 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우리는 자주독립의 신천지가 도래한 것으로 알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 때야 비로소 31선언이 적중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냉담하고 잔인한 강대세력의 장난으로 민족이 양단되었을 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간판 아래 국민은 신음해야 했으며, 날이 갈수록 자유의 폭이 좁아들다가 질식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보면 또 한 번 속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또 한 번 여명을 알리는 닭소리가 들려온다. 미 대통령 카터의 취임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짧은 연설에서 '새로운'(a new)이라는 단어를 일곱 번이나 사용했다. 새로운 시작(a new being), 새로운 헌신(a new dedication), 새로운 정신(a new spirit) 등, 그 중에 새로운 정신이란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지금을 전환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새것이란 계속 반복되는 도덕, 자유, 인권존중의 시대로서 집약한다. 그러나 그도 말하듯 그것은 새것은 아니다. 온 인류가 갈망하던 그런 사회다. 단적으로 "위력의 시대는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來하도다"고 한 우리 31선언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여명을 알리는 닭은 한 번만 소리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닭만 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카터의 소리는 분명히 새벽을 알리는 닭 소리다.

그러나 닭이 여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카터에게 희망을 걸다가는 또다시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명이 카터를 소리치게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소리에 뇌동해서 세계의 닭들,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닭들마저 홰를 치며 소리친다. 우리는 이 소리들에서 "속히 오마" 하신 그이가 더 가까이 온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여명기에는 도적이 난무한다. 우리는 그런 현실에 놓여 있다. 현재 성은 불의한 자들이 독점하고 있고 의로운 자는 속속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고 있다. 여명을 알려야 할 닭의 입은 봉쇄당했고 도적을 잡아야 할 의로운 팔다리는 결박당하고 있으며, 새벽이 가까울수록 점점 더욱 조일 징조뿐이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속히 오마>고 했다. 아무리 불의한 방법이 가중되더라도 역사의 바퀴를 동결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 거룩한 자는 공포의 쇠사슬을 끊고 더욱 더 의로운 싸움을 위해 선택된 제 길을 관철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 밖에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올 새 세계는 바로 그런 이들의 것이 될 것이다.

(1977)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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