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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탄
누가복음 2, 1-7

누가는 첫 성탄은 말구유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말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나 쫓겨났다는 말이다. 왜 쫓겨났나? 누가 이 어린 생명을 내쫓았나? 누가는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한다. 기득권자들이 저를 내쫓았다. 저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양보할 수 없었기에 어린이는 내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머물 곳에 자리가 없어 그는 짐승들의 틈에서 태어나야 했다. 그는 인간에게서 소외당했다. 낡은 것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말구유에 난 것으로, 소외된 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들의 주가 되기 위함인 것으로 본다. 나신 아이는 바로 소외된 저들과 자기를 일치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첫 선언은 가난한 자, 눌린 자, 병자, 포로된 자를 해방하고 저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고 했다. 정말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어도 머리 둘 곳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자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왔다.

그는 인간이 소외된 장소, 비인간화의 현실 속에 왔다. 사람이 동물취급 받고 멸시받는 현실에서 낳다. 사람이 사는 곳은 일부 특권층 사람 위에서, 사람 아래 있는 사람을 혹사하는 자들이 점유하고, 그들에게 쫓겨났으면서도 그들 밑에 눌려 신음하는 그런 현실 속에서 태어났다.

말구유는 어딘가?

마태는 예수가 자기의 기득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새 생명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헤롯의 폭정 아래 태어났다고 한다. 잔인한 칼의 위협 아래 인권이 사정없이 유린되는 현실에 첫 성탄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헤롯은 자기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모조리 없애고 죽여버리면서 영구교권을 꾀한 잔인의 상징이다. 정략적으로 강제로 결혼한 하스몬 가의 마지막 공주였던 아내를 못미더워 죽여버리고 장모 그리고 자신의 장자 그리고 다른 두 아들까지도 그의 왕위에 위협을 느껴 죽여 버린 헤롯이다. 권력을 위해서 점령세력인 로마에는 개처럼 아첨하고 국민에게는 폭군으로 임한 그, 그가 얼마나 잔인했으면 로마 황제 아우구스트마저 "헤롯의 아들들보다 돼지의 생명이 안전했다"고 했을 정도다. 그는 민심을 잃고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70세에 퇴진하고도 예루살렘의 반대세력을 되는 대로 투옥하고, 그가 죽는 순간 곡할 인심이 없는 것을 알고 저들을 학살해서 자기들의 죽음을 위한 애곡에 대신하라는 유언을 남긴 위인이었다.

오늘의 성탄은?

제2차 대전후 도이취 나치스 전범자들의 재판이 벌어졌다. 나치스는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동화된 유대인을 족보를 들춰가며 색출하여 처형했었다. 이같은 만행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정에 폴란드 비르나의 유대 공동묘지에 피신해서 살아난 유대인이 증인으로 섰다.

나치가 체코에 진주하자 유대인들을 색출해서 거의 죽여버렸는데 그중의 일부가 유대인 공동묘지에 은신하여 공포와 기아에 떨고 있었다. 공동묘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쫓겨나 시체가 말없이 묻혀 있고 짐승이 오가는 현대의 말구유! 반대 세력은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는 나치스의 칼이 위협하는 현실에서 한 젊은 여인이 어린 생명을 낳았다. 그때 묘지기인 80세 노인이 해산의 수고에 참여하여 세상에 난 이 어린 생명을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크심이여 마침내 당신은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까?
메시아가 아니면 어찌 무덤에서 날 수 있겠습니까?

이 기도는 이천 년 전 첫 성탄에 구유에 누운 어린아이 앞에서 한 현대의 찬양이 아닌가? <생명의 주라면 바로 사람의 세계에서 쫓겨난 생과 사의 접경에서 나신다. 바로 죽음의 세력이 삶을 삼키려고 위협하는, 바로 거기 성탄이 있다.> <그러나 참 생명의 탄생은 어떤 칼도, 권력도, 불의도 저지 못한다. 아니 그런 것들은 참 생명, 진리와 정의의 출생을 촉진할 따름이다.> 결국 이 기도는 악에 대한 약자의 저항의 절규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의 절규다.

성탄절은 바로 이런 사건 아닌가? 인간 역사가 불의의 난무로 그 종국에 이르렀을 때, 그 아래서 약하고 억눌린 자들이 죽음 앞에서의 공포에서 절규하며 새로운 세대, 새 주인의 손을 갈구하는 그런 복판에 역사의 밖에서 역사에 침입해 들어오는 사건!

그런데 이 증인의 다음 증언은 더욱 가슴 아프다. 무덤 사이에서 난 이 어린이, 죄 많은 이 역사의 한가운데 벌거숭이로 난 이 어린이! 그는 이미 다 말라버린 엄마의 젖에 매달려 빨았으나 젖은 없었다. 그를 품에 안고 자신을 빨려 그를 살리는 엄마에게 이미 빨릴 것이 없다. 그 엄마의 눈에서는 아직도 다하지 않은 눈물이 흘러 어린 것의 얼굴을 적시었다. 그런데 이 어린것은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바로 그 엄마가 흘린 눈물을 빨아들이더란다.

이 엄마의 모습! 그게 이 역사의 또 하나의 단면 아닌가! 사람이 사는 데서 쫓겨나서 무덤 사이에서 새 생명을 받은 이 엄마! 언제 칼이 덥칠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떨면서 한 생명을 키우기 위해 피로된 젖을 빨리다, 그것도 없으니 제 눈물을 빨리는 이 여인I 이 엄마의 눈물은 자기의 피로 된 젖마저 바칠 길이 없어 그 고통, 억울함, 그리고 나약함이 액체로 흐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어린이는 바로 이 엄마의 가난의 피(젖)를 제 몸에 흡수하다가 그것이 없어 그 엄마의 눈물을 빨아들인다. 이것은 그 엄마의 슬픔, 고통, 억울함과 나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몸에 흡수 한 것이다. 이 역사의 부조리 속에 짓눌린 자들의 애절함과 슬픔, 그리고 원망을 제 몸에 채운 이! 그게 바로 메시아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여기 현대의 성탄의 장이 있다. 이 무덤 사이는 2000년전의 구유의 재현이요, 이 엄마의 슬픔도 어린것을 안고 헤롯의 칼을 피해 길을 떠난 마리아의 슬픔의 재현이다. 이 여인은 어린 생명을 안고 또 어디로 피난했을까?

오늘의 구유는?

징글 벨이란 음악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오색 종이의 메리 크리스마스로 장식하고 흥을 찾는 손님을 보는 저 상가가 오늘의 구유일 수는 없다. 그러면 교회인가? 물론 장(場)으로서 교회가 오늘의 구유일 수도 없다. 비록 성탄을 축하하여 구유에 누운 모형을 만들고, 관한 행사를 해도 그것은 당시를 회상하는 낭만성 이상의 의미는 없다. 위대한 존재가 온 날을 기쁨으로 맞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구유가 어디 있느냐를 묻는다. 이것은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현존의 그리스도를 묻는 것이다.

구원자의 탄생이 사람들이 사는 집에 수용되지 않고 소외된 곳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의 구유는 바로 소외된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같이 구조화된 산업사회에 새로운 생명을 맞아들일 장소가 어디 있는가? 오늘의 사회는 라부르공 호의 구조선처럼 기득권자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어떤 새것이나 변혁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구조선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 바다에서 그 생존권을 위해서 죽음 앞에서 필사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저들은 새로운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다. 절대화된 이데올로기, 절대화된 체제는 새로운 것은 무엇이나 거부하기 때문에 힘없는 자들은 내버림을 받는 분자가 되어 살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기득권이 없다. 그러므로 개방적이다. 저들은 생존권의 보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구원의 손을 기다린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 눌린 자, 병든 자,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과 주의 은혜의 날을 선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비인(非人)이 아니다.

예수가 소외된 장소 구유에 오셨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인간화되었다는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소외된 자들과의 동일화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가 난 장소가 구유라는 것이 상징하기 때문 만이 아니다. 같은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최후심판의 비유에서 이 사실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등에게 한 일을 바로 그 심판자에 한 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자, 심판을 받는 자에게는 전혀 몰랐던 비밀이다. 바로 저들은 소외자들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저들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 저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해 왔으며, 저들의 고통의 장일 것이다.

우리는 계층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 그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힘있는 자와 약한 자,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아, 고용주와 피고용자 등의 계층화의 현실에서 어느 쪽이 소외되어 있는가? 우리는 바로 이 소외된 계층에서 오늘의 구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자체가 권좌에 앉게 되었을 때부터, 이 구유를 인위적으로 이동시키므로 추상화되고, 그러므로 현실적인 구유는 제거되었다. 구유의 모형을 화려한 교회당의 장식품으로 안치하므로 참 구유는 낭만적인 전설의 유물처럼 되었으며 이로써 사실상 교회는 <구유의 현실>과 자신을 유지시키게 될 것이다. 정말 예수가 구유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교회는 <오늘의 성탄>을 외면해 버렸다는 결론이 된다.

처음의 성탄은 헤롯의 칼이 위협하는 현장에 있었다. 그 새 생명을 없애기 위해 <베들레헴>의 어린 생명을 마구 죽여 없애므로 "울며 크게 슬퍼하는 소리, 라헬이 자기 자식들 때문에 울며,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를 받지 않으려 하는" 그런 현실이 첫 성탄의 현장이었다. 오늘의 성탄은 바로 그런 현장에 다가오고 있다. 지구상 많은 생명들이 권력의 제물이 되며 사람의 생명을 파리 한 마리의 그것만큼이나 경시하는 힘들 앞에 이리 피하고 저리 도망하는 그런 현실에 성탄은 다가온다. 뺏긴 자식들의 생존권을 위한 어머니들의 애곡소리가 드높은 삼엄한 현실 속에 성탄은 다가 오고 있다. 오늘처럼 이 성탄의 뜻이 절실한 때가 또 있으랴! 양심이, 진리가 정의가 설 자리 없는 오늘 양심이 정의가 무덤 아니면 감옥에로 끌려가고, 불의가 안방을 차지하는 현실 이상 참 성탄이 필요한 데가 어디 있으랴.

새로운 충성

그러나 다가오는 성탄을 향해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니! 성탄은 바로 오늘 우리가 선 그런 현실에 새 생명이 탄생한 날이다.

누가복음은 숨겨진 비수와도 같은 성탄을 둘러싼 말들을 전하고 있다. 어린 예수를 마지막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보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중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세워진 분입니다. 또 슬픔이 날카로운 검과 같이 당신의 마음을 찢을 것입니다"고 한다. 성탄은 슬픔을 극치에로 몰아갈 것이라는 예고다. 그러나 그는 또한 "주여, 주께서 이제는 주의 말씀대로 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나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베푸신 구원이오며 이방사람들에게는 주의 길을 보여 주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옵니다"라고 찬양한다. 이것은 슬픔을 넘어선 오고 있는 궁극적 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환희다. 잉태의 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내 영혼이 하나님 내 구주를 높임은 주께서 여종의 천함을 돌보셨음이라 … 주께서 그의 팔로 전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고 찬양한다. 여기 그가 구유에 난 뜻이 잘 풀이되고 있으며 성탄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마태는 헤롯의 위협을 무릎쓰고 인간의 가치 평가의 평선(平線)을 넘어서 그 어린 생명에게 자기들의 가장 값진 것을 바치는 동방의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새로운 생명에의 경외는 낡은 권력의 협박 밑에서 가능했던 것을 나타낸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오늘도 소외된 군중이 신음하는 말구유가 있고 헤롯의 망령이 횡포한다. 바로 그러한 현실 앞에 있기 때문에 오늘의 성탄절에 나실 이 앞에 새로운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1974. 12. 『현존』)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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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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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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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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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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