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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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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기도

바울은 몸에 종신병이 있었다. 그것이 안질이었는지 간질이었는지는 이론이 많으나 새로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인 그에게는 치명적인 중한 병이어서, 사람들 중에는 이 바울의 병 때문에 그가 전하는 복음 자체까지 회의를 품을 정도였던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이 병을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 기도는 마침내 바울로 하여금 희열의 환호를 외치게 했다. 그런데 어떤 사실이 바울을 그렇게 기쁘게 했는가 하면 그는 한 모순스러운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가 병이 들었다는 일, 그 병이 있으므로 약하다는 그 사실이 바울의 기쁨의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본래 수치로 알던 그 병 그대로가 기도를 통해서 오히려 기쁨의 내용이며 한 걸음 나가서 크게 자랑할 내용이 되고 그와 관련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까지도 마침내 기쁨의 대상이 되어버린 체험을 고백한다. 바울의 소원은 유린당하였다. 그가 낫기를 원하던 병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오직 그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그 사실을 안 것이다. 즉 자기에게는 쓰고, 싫은 사실이 그대로 남아 있으되 그것이 하나님 편에 의미가 있을 때, 그의 뜻이 이루어짐을 알 때, 그 악조건 그대로가 질적인 내용이 되어버리는 신비한 체험을 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했다는 것이다.

기도는 곧 신앙행위이다. 그것은 명상이나 사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색은 관념의 유희일 수 있으나 기도는 그대로가 행동인 것이다. 그런고로 기도는 곧 그의 신앙의 총 내용의 결정 장소인 것이다. 그런고로 기도의 태도는 곧 신앙 내용인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는 기도할 때 아무런 전제가 없이 아뢰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자기 주장의 관철이 그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수식 없는 소원을 아뢰고 그의 응답 또는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즉 그에게는 "이래야만 한다"는 전제는 없다. 만일 그가 당신의 종이 전도하는 일에 지장이 되는 이 전제로 기도했다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는 의외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려니와 그것은 오히려 악마의 소리라고 조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상을 생각하는 태도에 따라서 기도의 의미는 분명이 달라진다. 정지된(죽은) 대상을 향할 때는 그것은 명상이나 사색이 되고 산 대상을 향할 때 그것은 대화가 되는 것이다. 정지된 대상이란 개념화 된 대상이다. 그것은 그랬으니, 그러려니 하는 Sollen의 대상이다. 그 입으로는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이래야 하는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갖을 때 그것은 죽은 대상이 되고, 그렇게 다 정리해서 알아버린 하나님 앞에는 쉬지 않고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특히 지식인)는 얼마나 이런 개념의 하나님을 대상하고 있는가! 저들은 사실상 기도 없이 산다. 기도와 사색을 동일시한다. 저들은 그날 그날의 일들을 이미 가진 개념에서 연역해서 결론을 지어가면서 살기 때문에 구태여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저도 모르게 한 합리주의자의 자리에 떨어지고도 그 자기의 사상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죽은 부모를 섬기는 동양의 효자가 아버지는 그 때 이런 것을 좋아했다는 전제에서 이런 것도 좋아하리라는 결론으로 더 물을 필요 없이 제물을 죽은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와 같이(우리는 이런 현상을 특히 기독교사회주의자나 사업가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산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럴 수 없다. 산 그의 뜻은 틀에 박힌 것과는 다르다. 같은 일에도 그때 그때의 요청과 뜻이 있다. 산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비록 같은 것을 반복해도 그의 뜻을 그때 그때 물어야 한다. 자기의 상식이나 개념으로 그 아버지의 뜻을 대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이미 알아버렸다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때 그때 계시하심으로밖에 그의 산 뜻을 알 수 없다. 당신은 요 일을 요 순간에는 어떻게 뜻하십니까?라고 물어서 아는 길밖에 없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천태만상으로 나타난다. 자비의 하나님인가 하면 질투의 하나님이다. 진노의 하나님인가 하면 사랑의 하나님이다. 때로는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율로 규정했던 것까지 파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산 여호와 하나님은 사상의 대상은 아니다. 그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사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앙이 그 내용이다.(요새 소위 기독교문화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한 사상으로 전락시키므로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있으나 그것은 타락이다.)

바울은 이 산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전제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죽어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기의 활동이나 판단을 정지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는 그의 심경의 토로는 바로 이 기도의 태도이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몸에서 존귀케 하리라"라는 고백도 바로 이 산 하나님 앞에 선 그의 기도인 것이다. 내가 산다는 일 내가 죽는다는 일이 있기 전에 그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일이 먼저 있는 것이다.

이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복종하되 그것이 무서운 심판자의 뜻이니 할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을 복종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이다. 즉 그가 무릎을 꿇은 기도의 대상은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바울의 온갖 감정을 비롯한 정열 전체를 그대로 드리고 싶은 사랑의 대상이다. 이 하나님께 향한 이 끓는 사랑이 기적을 일으켰다. 병을 없이하지도 않고 그대로 좋다는 그의 뜻을 억지로 복종하고 참을 수는 있어도 기뻐할 이유는 못된다. 오직 그것은 사랑하는 그의 뜻이니 기뻐졌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 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지금의 내게 좋도록 만들어 주리라는 뜻보다 바로 이상의 경험과 같은 자기편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적당히 조화되리라가 아니라 비록 그에게는 쓰고 괴로운 조건 그대로라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곧 선이 된다고 보아야 옳다. 어디까지나 "그가 좋으면 좋다. 나는 망해도 그가, 사랑하는 그가 좋으면 좋다"라는 마음이다. 그의 슬픔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요,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는 망해도 좋았던 것이다. 로마서 9장에 그의 가장 큰 고통을 말하여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해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말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생의 소망인 구원까지도 버릴 용이가 있다는 마음이다. 루터도 이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만일 내가 지옥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나는 기뻐 복종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하는 일들이다.

억지로, 안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은 바울과 먼거리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율법주의와도 금욕주의와도 엄격히 구별된다. 정말 내가 기뻐서, 하고 싶어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자의 자유인 것이다.

온갓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좋은 것은 물론이어니와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원수로 아는 약함, 능욕, 궁핍, 곤란까지도 기쁨의 도구로 변하는 것이 기독자의 세계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없이 행동하는 자유라는 것은 자기의 죄악적인 것을 그대로 관철하도록 하나님이 양보하리라는 방종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서 우리에게 아무리 명철한 이론과 사상적인 체계와 활동이 있다고 해도,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열이 없는 한 그것은 자기연장에 불과하다. 문둥이 시몬의 집 연석상의 가롯 유다의 이론이나 비판은 옳다.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그의 뜻일 것이다"라는 것은 명철한 이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그의 이론은 옳아도 일푼의 가치도 없을 뿐더러 악마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명철한 결론을 가질 겨를도 없이 향유를 낭비한 그 여인의 행위는 미련할지 모르나 그의 그리스도를 향한 불같은 사랑은 그리스도의 뜻을 가장 바로 받든 것이 되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온갖 정열을 기울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을 줄 안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위대한 종이었으며 그의 행동은 그대로가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의 거룩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1952. 10. 『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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