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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복음 14, 16-24
새 세계의 계시

어떤 사람이 만찬회를 마련하고 초청장을 냈다. 그 초청장의 내용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였다. 그러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 초청을 거부했다. 그 거부의 이유들은 밭을 샀다, 소를 샀다, 결혼했다 등이다. 이 주인은 저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그 종들에게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맹인들과 절뚝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았기에 아무나 데려다가 그 만찬회를 채우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내용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예수의 설교의 중심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본 비유의 특징만이 아니라 예수의 그 나라 비유 전반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새 세계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아무런 묘사가 없다. 이것은 플라톤을 위시한 희랍 철인들의 이상도이나 히브리 문학파의 미래의 세계사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그 나라의 성격을 유도해서 어떤 유토피아적 새 사회의 근거를 삼으려는 노력은 발붙일 데가 없다.

이 비유는 오히려 초대받은 자들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초청을 받은 자들의 거부와 그 이유, 그리고 그 다음에 부름받은 자들의 처지에 대한 서술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 비유는 그 나라 자체의 성격을 나타내려는 데 있지 않고 새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말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유대전승과 비교해 볼 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유대 전승 중에 이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왕이 그 아들의 결혼을 위한 만찬회에 초대한 것을 기일 미정으로 미리 통고해 두었다. 이 통고를 받은 사람들 중에 영리한 사람들은 "왕의 집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러니 어느 순간에도 부를 것이다"고 하면서 미리 몸을 깨끗이하고 궁전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짐스러운 준비 없이도 참여할 잔치는 없나, 왕의 집 잔치야 어떻게든 눈치 못 차리리" 하면서 소몰이는 소에게,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대장장이는 그의 숯더미로, 베 짜기는 베틀에 갔다. 그러나 갑자기 곧 오라는 초청이다. 미리 준비 한 영리한 자들은 단정히 준비된 몸으로, 미련한 자들은 일손 그대로 참여했다. 이것을 본 왕은 그 미련한 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영리한 자들이 먹는 것을 구경하게 하는 것으로 벌을 줬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 이 비유는 청함받은 자들에 대한 심리적 묘사는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그 주인이 단 한 번으로 초청을 마감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했다는 사실과 청한 자에 대한 평가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나 기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청함에 응하느냐, 아니냐로써만 두 계열로 갈라짐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was)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wie)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을 계시했다.

새 세계에의 초대

이 이유의 중심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오"에 있다. 이것이 새 세계에의 초대다. 닷드(C.H. Dodd)는 이것은 바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 15)는 뜻과 상통한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란 인간에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것은 미래에서 현재에 살고 있는 현존에 오는 초대장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고 회개를 호소한 것은 바로 인간에게 열려 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오, 동시에 그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이 비로소 참 인간으로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의해서만 참 나로서 살 수 있다. 이것은 성서의 특유한 인간관이다.

불교나 희랍의 사고에서는 인간은 영원불변의 법에 의해서만 살 수 있다. 그 법은 가변적인 것에 대해서 영원하다. 인간이라는 개성은 가변적인 잠정성과 불변성의 복합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이 두 요소의 긴장 관계에서의 투쟁이다. 그러므로 그 삶은 고난이다. 이 인간이 이 고난에서 구원받는 길은 탈아하는 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의 탈아가 아니라 불변성의 자기에로의 복귀다. 따라서 인간의 미래란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영원부터 기준한 법칙의 세계에의 환원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동적인 데서 정적인, 시간적인 데서 전 시간적인 데로의 몰입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기독적인 어떤 질서 따위 같은 실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새로운, 창조적인 가능성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무엇인지 공개될 수 없다. 까닭은 그것은 가변 불변의 영역이 아니라 참여(動)함으로써 현실이 되는 순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라에의 참여는 탈아가 아니라 탈출이다. "나"를 비끌어 맨 낡은 것의 쇠사슬을 끊고 탈출해서 새 세계로 이동하라는 것이 바로 "회개하라"며 "속히 오시오"다.

이 비유에서는 유대 전승에서 보는 것처럼 초청에 어떤 조건도 요청하지 않는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라든지, 마태에서 보는 것 같은 어떤 예복을 입고 오라고도 하지 않는다.(마태의 것은 벌써 후대교회의 삶의 자리가 채색되어 있다.) 무조건 그 초대에 응하면 된다. 그러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난한 자, 불구자 등 당시의 소외자들을 청했으며, 길 어귀에서 아무나 청해 오라고 한다. 회개하라는 뜻도 네 죄를 씻고, 네 잘못을 청산하고 그리고 오람이 아니다. 죄를 씻고 잘못을 청산하는 길은 "수신" 따위를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데에서 새 세계로 탈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탈출은 존재론적인 분석이나 현재 상태의 비극성에 대한 각(覺)이나 지(知)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서 오라"라는 내 밖에서의 초청의 소리를 듣고 그것에 응하여 나를 내맡길 때만이 가능하다. 이것을 성서는 믿음이라고 한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준비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사람이 만일 무엇이 준비되었는지를 사변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 초청에 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의 추측에 들어맞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일 수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치나 개념 또는 언어가 도절되는 현실이어야 정말 새 가능성이다. 따라서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모험이며, 그것에 응하는 것은 결단일 수밖에 없다. 이 결단은 어떤 확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단지 초청하는 그 뜻에 무조건 자기를 내맡기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믿음만이 이 새 세계에의 초청에 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준비가 되었다. 어서 오라"라는 대답 이상일 수 없다. 즉 하나님 나라는 바로 새 가능성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것은 이미 그 나라의 현실을 모르는 질문이다. 그래도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의 것은 아닌 전혀 새로운 현실이라는 말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이 초청에서 인간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보여 주며 그러므로써 인간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함을 보여 준다.

두 인간형

이 주인은 일정한 사람들에게 이미 초대장을 보내고 종을 보내서 저들을 오라고 했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거절했다. 이것은 당시의 청중들에게는 누구를 뜻하는지 곧 알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초대장을 이미 받은 민족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저들은 막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외면했다. 이것은 유대 민족의 우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저들의 불신앙을 폭로한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불응의 이유들은 저들의 진상을 신란하게 폭로한다. 저들의 불응의 이유는 산(賣) 것 때문이었다. 소를 샀다, 밭을 샀다, 결혼했다 이다. 당시의 유대 관습대로 하면 결혼도 경제가 허락하는 만큼 다수권이 있었으니 그것도 여인을 산 것이 된다. 저들은 내 것으로 만든 것, 즉 소유된 것 때문에 그 초대를 거부해야만 했다. 그 소유들은 일상생활에서 불가결의 것들이다. 저들은 소유한 것 때문에 새 가능성을 거부한 인간들이다. 저들은 소유한 것에서 "나"를 사는 사람들, 소유한 것에 삶의 거점을 둔 사람들이다. 소유! 그것은 반드시 물질적인 데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하여간 기득권 일체를 다 포함한다. 우리가 기득권을 과거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저들은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살려는 사람들이다. 내 것이 된 것을 확보하며 최대한으로 이용하자는 사람들은 새것, 외계와의 접촉을 싫어한다. 까닭은 기득권이 침해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입에 문 짐승은 모든 것을 피해서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진 자는 언제나 변혁 따위를 거부한다.

세계 역사는 보수와 혁신의 투쟁사다. 보수는 기득권에의 미련 때문에 새것에 대해서 폐쇄적이다. 유대인들은 야훼종교의 기득권 의식 때문에 미래에 대해 폐쇄적이었으며 옆에와의 관계에서 배타적이었다. 가진 자의 기득권은 그 권리가 인정되는 질서가 유지될 때만 유지된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새 세계 또는 새 질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요대로 있어다오, 그래야 나는 내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다.> 이것이 보수의 염원이다. 그러기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정치계나, 문화계나, 종교에 있어서까지도 권력, 교권, 지도력을 장악하는 순간 사람은 보수적이 된다. 그것은 혁명을 가치로 내세운 공산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맑시스트인 블로흐는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집권자의 원호 역활밖에 못 한다고 하여 오늘의 공산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화되므로 현재의 집권층의 이용률 이상의 역할은 못한다고 진단하고 새삼스럽게 사람은 무엇을 희망하느냐로써 현재를 결정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하나님 나라에의 초대로써 이러한 과거 정착적인 인간의 모습이 폭로되었다.

주인은 저들의 거부에 노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가난한 자들, 불구자들, 소경들, 절뚝발이들도 청했다. 저들은 한마디로 하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초청에 응한 사람들에 대해서 소극적인 면밖에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의 특징이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피 우는 자들이라고 할 뿐, 저들에게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떤 적극적인 것을 지적하지 않고서 복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가난하나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라거나, 불구자지만 종교심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긍정적인 면의 인정이 없다. 그렇다면 저들이 새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그 초대를 거부한 자들과는 다른 어떤 것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철저히 가지지 않은 데서 그 근거를 찾는 수밖에 없다. 저들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 사회에 설 자리가 없는 소외당한 자들이며 개인으로 보면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면 무엇이 저들의 삶의 전환을 가져왔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 초대에 응했다는 사실 자체뿐이다. 그러나 그 초대에 응했다는 사실은 저들의 존재양식을 말한다. 초대에 응한 것은 그 초대에 자기를 개방한 것이다. 그 초대가 새 가능성에의 초대라면 저들은 새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한 존재임을 말한다. 새 가능성이 미래적인 것이라면 저들은 미래지향적인 존재이다. 즉 저들은 가진 것에서 삶을 찾지 않고 기다림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현재 정착적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연장인 현재에서 탈출할 태세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 초대에 응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 자체, 불구된 것 자체가 가난한 마음을 주며 따라서 미래지향적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통 속에서 사는 디오게네스는 왕의 영화도 안중에 없는 내적 부에 도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가난함, 불구가 더 현재 애착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적인 표현은 도래하는 것에 의해서 살려는 자의 심벌로 나타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비유를 듣는 당시의 유대 청중의 귀에는 이것은 유대 종교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라고 이해되었을 것이며 초대교회의 귀에는 유대 전통적인 안목에서 판단되는 이방인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 어느 쪽이든지 저들은 현재에서 아무런 기득권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은 아니다. 따라서 저들은 궁극적인 삶의 거점을 미래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적으로 보면 빈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규정한다면 혁명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인들이 아니라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항거하는 혁명인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새 세계에의 초대는 그 어느 한 부류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다. 새 세계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부류에게는 열린 문이요, 다른 한쪽에게는 닫힌 문이다. 까닭은 그 미래의 세계는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창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묻는 말

인간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앞에 선 존재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바로 "나" 밖의 어떤 도구나 힘들여서 자기 존재 근거를 찾으므로 실존을 상실한 나의 진상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런 것에서의 탈출을 명령한다.

그 나라에의 초대는 어떤 특정한 상황, 가령 예배, 기도, 또 어떤 거룩한 장소에 있는 경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생활 한복판에 있는 나에게 전해진다. 소를 사고 있는 나, 밭을 산 나, 결혼한 나, 길을 가는 나, 불행한 나, 즐거워하는 나에게 전해진다. 정좌한 나가 아니라 일하고 일상성에 갇히어 질식하는 나의 돌출구며 탈출을 가능케 하는 손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름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까닭은 우리는 내 지금 가진 것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실은 내가 무엇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무엇들에 소유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초대에 응할 자유를 잃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사는 탈출(Exodus)을 기점으로 한다. 애굽의 쇠사슬 아래에 사는 것이 일상성으로 되어 자명화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저들을 불렀다. 이 부름이 저들의 삶은 실은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저들은 모세를 통한 부름에 호응해서 탈출을 감행하므로써 생동하는 민족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가진 것과 나를 혼동하는 습성에 젖은 저들은 계속 도상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애굽에 그대로 있었던들! 이것이 저들의 원성이었다. 그러므로 이 첫 세대는 중간정착하므로 새 세계를 보지 못하고 죽어버려야만 했다. 저들이 가진 것은 추억이었다. 이 추억은 저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기독교는 오랜 유대 전통의 세계에서 탈출함으로써 세계에 진출하고 거보를 내딛었다. 그러나 그 걸음은 가진 것이 많아짐에 따라 점점 둔해지더니 마침내 조상에 정착하므로 자기를 상실했다. 불트만은 히틀러가 소련에 선전포고하던 날 우리가 본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 다음 같은 찬가를 불렀다. "우리는 우리 민족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은 한때 하나님의 부름에 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다……" 16세기에는 루터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독일이 교회의 나라였음을 기억한다. 저 시골 시골에, 모든 도시의 교회와 뮌스터나 돔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청소년들이 학교와 교회에서 그리스도적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한 것은 그러한 입증이다. 교회의 전통이 우리 민족의 모든 삶에, 세례, 혼인, 장례에 속속들이 침투된 것이 그것을 말한다. 아직도 교회 건물이 우리들의 동리와 도시의 상징처럼 서 있으며 교회의 종소리가 주일마다 마을과 들에 울려 퍼진다. 나는 이미 교회가 그 중심이 되어있지 않다는 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주일에 참 예배드리려는 마음으로 들으려는 이가 교회에 얼마나 모이는가? 우리 민족 중에 몇 명이나 교회의 종소리를 주의 집으로 부르는 소리로 받는가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대성당들이 이미 주의 말씀은 전해지지 않고 고작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독일 민족의 정신과 유산의 기념탑이 되어버렸는가? 청소년들의 기독교적 교육의 결과는 어디 살아 있는가? … 우리는 모두 오늘의 독일은 이미 기독교국이 아님을 안다.

우리는 이미 "교회적인 삶이란 부스러기처럼 약간 남아 있는 것을 알며 많은 사람들이 이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것조차 어서 사라져 버리기를 원하고 있음을 안다…"고 했다. 그는 민족적 아니, 세계적 위기에 직면했으면서도 무능의 잠만 자는 독일 교회에 만가적인 호소를 한 것이다. 위기는 또 하나의 새 세계에의 부름이다. 그런데 독일 교회는 이미 손에 들어온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 부름은 아랑곳없이 외면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만일 독일교회가 히틀러가 조성한 그 위기를 탈출에의 부름으로 알고 일어섰던들 저들은 그 무능을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분명히 이 새 세계에의 초청을 받은 첫 무리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서 고질화된 낡은 세계에서 탈출하자는 소리를 들었고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왜 이처럼 무능한가? 100년 전통에서 얻은 유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민족적인 위기 앞에서도 부모가 남기고 간 유산 때문에 싸우는 형제들처럼 내분만 계속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 우선권을 상실하고 오히려 "가지지 않은 자들"이 이 부름에 호응하여 탈출의 앞장을 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도가 낡은 것을 보수하는 데 집착하는 동안 소위 비종교적인 인간들이 오히려 미래, 새것, 유토피아, 해방, 새 세계를 외치며 진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오늘의 그리스도교에게 그 나라에의 초대가 무효화되었담은 아니다. 아직도 그 문은 열려 있고 그들을 부르는 사자는 반드시 종교적이거나 성자의 탈을 쓴 것은 아니다. 아니! 바로 세속적인 탈을 쓴 종들, 즉 가난하고, 불구적인 자들의 움직임이 그 사자다. 먼저 청함을 받은 교회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곧 탈출의 대열에 투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는 영원한 설교를 받게 될 것이다.

(1970. 4.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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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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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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