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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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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
요한복음 8, 1-11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사나이들

이 이야기는 원래 요한복음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 내용은 A.D. 6세기경의 "베자" 사본에서야 비로소 나타나는데,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 21장 38절 뒤에 첨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방교회에서는 이 이야기가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파피아스'(A.D. 100년 이후)가 이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이미 이 이야기는 A.D. 100년경에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왜 그동안 묵살되었을까? 보수적 유다교 분위기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그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은 성적으로 비교적 문란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적 방종에 쉽게 오염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파격적이며 오늘의 보수적 종교권에서 보면 여전히 소화하기 어려우며 여전히 파격적입니다. 아무리 개방된 자유사회라고 해도 여기 나오는 예수처럼 이 여인의 간음 경위도 따지지 않고 그녀를 정죄하는 자들을 공격하면서 그런 여인을 그렇게 쉽게 용서한다면 성윤리란 애당초 성립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항의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심판하고, 매장해 버리는 율법주의자에 과녁을 맞추고 있습니다. 유다 종교는 율법화됨으로써 해골처럼 뼈다귀만 남아 있었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첨예화하여 구조화된 전체주의 체제를 만듦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은 무시되고 기존 부류의 한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람을 사제족, 라삐, 사두개, 의인, 그리고 죄인 그리고 남자, 여자들로 분류하고 그 분류된 어느 것에 예속시키고 그런 위상을 전제로 시비를 가립니다. 따라서 '죄인' 하면 그것은 으레 경원하고 처벌해야 하는 부류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거기에는 인정, 사정이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저들을 한 더러운 짐승이나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종교인이라는 이름 밑에서도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끌고 온 남자들에게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입니다. 저들은 그 여인의 생가권을 기정사실화하고 끌고 다니면서 저들의 다른 야욕에 이용하려고 할 뿐입니다. 저들은 죽일 여인을 끌고 그들의 적대자로 생각되는 예수를 낚는 미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체제주의의 노예가 된 비인간화의 전형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율법적 전체주의자들은 형식적인 율법에 비추어서 자기를 보고, 또 남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눈도, 자기 양심의 소리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눈을 남에게 돌려서 율법에 어긋나면 정죄하고 처형까지 함으로써 자기가 의인이라도 된 것 같은 자위를 얻게 됩니다. 누군가를 밟고 서서 얻어지는 위안과 자위! 이런 삶을 통해서 저들은 그런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자신들을 보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그것은 바로 하늘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고 기도하는 죄인과는 달리,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면서 십일조를 어김없이 드리고 자선도 하는 자신들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들은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냈습니다. 저들은 그런 여인을 돌로 때려 죽이는 조문을 권리로 삼고 기세당당했으며, 사람을 죽일 독기에 차 있는 자신들을 '나는 저와는 다르지!'라고 단정지었으므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예수에게까지 그 여인을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들이 예수에게 하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여기서 주동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즉 율법풀이를 전문으로 하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그 여인의 음행의 현장을 본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그 사건의 증인으로 나섰을 것이고, 그가 '저 년이 간음하는 것을 보았다. 죽여야 한다' 하니 그 말만 믿고 군중심리에 손에 돌을 들고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정말 모세가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여자'라는 것을 누가 아는가? 또 모세가 죽이라는 것과 내가 그를 정죄하고 죽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인데, 저들은 다수의 행동에 그대로 휘몰린 것뿐입니다. 그 무리는 둘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 여인이 한 일 자체보다는 예수를 정죄할 구실을 찾자는 소수이고, 나머지는 단지 간음했다는 여인의 운명에만 관심했을 것입니다.

고발하는 사나이들과 예수

그런데 예수는 아무 말 없이 땅에 앉아 글을 쓰며 시간을 끕니다. 그 흥분된 무리, 멋도 모르고 대세에 밀려 손에 손에 돌을 든 그 바보 같은 것들에게 진정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듯이.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저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계속해서 예수의 판단을 독촉했으리라. 자기들의 권리와 자기가 그 여인과는 다름을 시위하며, 또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함정에까지 몰고 온 데 기고만장하다는 듯이.

이럴 때에 예수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자신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는 무리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앉아 여전히 글을 씁니다. 이 조용한 말씀은 솜으로 싼 날카로운 칼날이 선 수술용 메스였습니다.

'조용하라. 그리고 좀 반성해 봐라. 네가 남을 욕하고 심판할 처지에 있는가를!'

그 말은 이런 타이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남에게 겨누기 전에 네 손에 든 돌을 이들 자신들에게 겨누어야 한다는 책망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 한 말씀은 분위기 속에서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행동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돌을 든 군중을 엮고 있는 엉킨 줄을 끊어버리고, 저들을 먼저 제자신에게 눈을 돌려 제 꼴을 보게 했습니다.

'무슨 주제에 남을 욕하고 정죄를 해! 내 꼴이 오히려 너보다 더 초라하구나"

저들은 남을 죽일 권리를 가졌다고 하는 순간, 자기만이 옳다는 의인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았는데, 그 권리를 집행하기 위해 돌을 든 자신을 인식함과 더불어 자기 허상 앞에 물거품이 되어 말없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용당하는 대중

오늘은 대중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가나 '대중!' '대중!' 합니다. 저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독재자, 영웅주의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권리는 분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 개인, 또는 한 그룹의 손에 그 권리가 쥐어지게 되면 그렇게 될수록 인간이 노예화되고 파괴되는 위험은 커져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떠한 대중을 말하는 것인가?

베이컨은 인간이 모시는 우상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동굴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아집, 편견, 이기심 등이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종족이라는 우상입니다. 제 집안, 제 혈통, 제 종족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입니다. 장터에 모여 지껄이고 각기 제 주장을 하며 상품 자체와는 상관없는 값을 형성해 갑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입니다. 기존의 관념, 공유한 가치 등이 그것입니다. 이상의 공통점은 대중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오늘에는 극장의 우상은 사경을 헤메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이 마구 깨어집니다. 그 대신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시장의 우상은 정보매체를 타고 기세를 부립니다. 그리고 내 집, 내 마을, 내 종족이라는 관념은 이기주의에 편승해서 그대로 정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론에 몸을 맡긴 현대인은 중추가 없는 연체동물이거나 생각 없는 로봇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깊은 생각도 없이 신문에 한번 소문난 것 따위에 그토록 빨리 세뇌됩니다. 그리고 세뇌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곧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내용의 증언자로 둔갑하여 구전 보도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론은 급속도로 퍼져나감으로써 하루아침에 이름난 사람이나 집단을, 천사를 악마로, 악마를 천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여론에 자기 몸을 맡긴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것은 자주적 판단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안은 불신사회를 만들어내는 큰 요인이 됩니다. 그런 판국에 사로잡힌 자에게 '신뢰'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같은 대중에게 마수가 뻗칩니다. 공산주의나 또는 독재체제는 이 매스컴의 악마성을 이용하고, 그것으로써 사람을 매장하는 것 쯤을 자신이 가진 하나의 권리로 알게 합니다.

비인간화한 대중! 저들의 여론에 몸을 실으면 나도 비인간화되고 만다. 이 중심 없는 여론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며, 어제의 충신을 오늘의 역적으로 몰고, 어제의 사랑을 증오로 일변하게 합니다. 예수는 이런 맹목적인 대중심리를 선동하는 <정죄자>들의 허구를 폭로함으로 그것에 현혹된 대중을 해방시킵니다. 까딱하면 살인자가 될 뻔한 저들을!

단 둘의 만남

이 이야기의 다음의 중요한 것은 이 여인과 예수가 단둘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야수처럼 비인간화한, 이 선동된 군중들의 손에 죽게 되었던 이 여인은 마침내 예수의 도움으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났습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 이 여인은 저 군중에게 용서받은 셈입니다. 이 여인이 만일에 군중의 대세에 몸을 실은 사람이었다면 그것으로 마음의 자유와 환희를 올렸으리라. '이제 살았다!'라고.

그러나 참 사람이고, 양심을 가지고, 마음에 가책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따위 여론이나 대중이 자기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돌을 놓고 모두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났는가? 아니! 그 앞에 이제 단 한 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제 예수와 그 여인, 단둘이 마주섰습니다. 이 순간 군중 따위는 가설이고, 지금 단둘이 선 이 순간만이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내 노력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다시 내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들을 충분히 납득시켰습니다. '

'이제는 되었다. 마음 푹 놓고 가자!'라고 자위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내 앞에 한 분이 마주 섭니다. 양심이라는 형태로! 사랑 또는 존경하는 이의 얼굴로! 또는 주님의 모습으로!

'내가 옳았습니까? 내가 용서를 받았습니까?' 그 때 '아니!'라고 하거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여인에게서 군중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그 분이 서 있습니다. 군중이 용서했으면 무얼하나, 이 분은 어쩔까? '여인아,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이 목소리! 정말 죄지은 여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너'로서 부르는 이 목소리!

'주님,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다 되었나? 아니! 그 앞에 선 그분의 심판에 그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저가 나를 어떻게 할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다시 죄를 짓지 말라.' 이 단둘이 있을 때 마주선 이의 용서! 그것이 비로소 그 여인을 참 자유하게 했습니다.

현대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단둘이 마주 서는 순간을 피하는 것I 그의 허락 이전에(곧) 자신을 갖고 안도해 버리는 것! 여럿 앞에서는 자신도 있고, 당당해도 단둘 앞에서는 막혀버리는 나! 그래서 그 순간을 피하는 인간!

단둘! 인간관계에서도 너와 나가 참 인정받고 자신을 가질 수 있을 때, 대중 여론이 나 자신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천하의 견해보다 최후의 교두보가 되거나 총알을 가진 절대적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대상의 심판이 최후심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나를 결정합니다. 이런 대상이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 없는 대중이나 그따위 여론은 한낱 거품일 뿐입니다. 정말 우리의 행동이나 판단은 단둘이 마주섰을 때도 인정받는 그런 것인가?

이론으로 따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정받고 했어도 무엇인가 꺼림직합니다. 그 꺼림직한 것의 휘장을 열면 거기 한 분이 나와 단둘이 마주 서려고 거기서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휘장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용서, 참 마음의 자유를 못 얻습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단둘이 마주 서야 합니다. 참 기도, 참 반성이란 바로 과감히 단둘이 마주 서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제 정신에 못삽니다. 나는 이 시대, 이 대중의 시대일수록 정말 그 마주 선 이가 선명해져야 할 것을 느낍니다.

양심! 그것은 Organ이 아닙니다. 단둘이 마주 서서 그가 '나는 너를 인정한다'는 소리입니다.

(1970. 1. 25.)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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