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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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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코복음 3, 1-6
사(私)와 공(公) 사이

공자와 섭공의 대화인 논어의 자로 편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섭공은 공자에게 "우리 동리에 직궁이란 자는 그의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말하기를 "우리 동리는 다르다. 우리 동리의 직(直)한 자는,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감추어 주고, 아들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한다. 참 직이 이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는 윤리와 법의 상충을 본다. 아버지를 위하려면 법이 서지 않고 남을 희생해야 하며, 법대로 하면 아버지를 고발해야 하나? 그런데 공자는 바로 이 혈연적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공의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이런 경우를 우리는 늘 직면한다. 가령 전쟁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려면 적이 쳐들어오면 많은 인명이 희생된다. 또 그것을 막으려면 살인해야 한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어느 다른 하나는 희생된다. 어떤 사람이 밀수를 한다. 국가 전체를 안목에 두면, 그런 사람은 중벌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밀수를 했기로 그 한 사람을 죽여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는 싸움을 벌인다. 그런데 싸움을 하는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다. 그러나 교회 질서를 위해서라고 할 때, 개개인 또는 일부인을 희생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행동하려고 하면 선택해야 하고, 선택하면 그것은 단지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소위 "무위"라는 사상이 생긴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추한 것이 되고, 모두 무엇을 선하다고 단정하면 이미 악이 된다. …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하므로 산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인간을 추상화할 때만 가능하다. 즉, 거기에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사람이다. 무위란 정말 어느 하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 내 옆집에 강도가 들었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올린다. 나는 그를 살리려면 강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니 "가만 있자!" 그러나 그럴 때에 그는 누구도 안 죽였다고 말할 수 있나? 그의 무위는 결국 강도맞은 자를 희생시켰다. 정말 무위가 가능한가? 여기 어떤 악한이 내 품에 자식을 죽이려고 한다. 나는 무위할 수 있나? 무위하면 내 자식은 죽는데 말이다.

사람이 자기를 추상화하지 않는다면, 무위하는 나도 결국 한다(有爲)인 것을 알면 단순히 "한다"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를 본다. 사람이 자기의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 적어도 둘 이상의 엄연한 현실에 직면한 자기를 볼 것이며, 또 그들은 다 성취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를 택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는 자기를 직시하게 된다.

결단은 얻는 것과 포기하는 것

성서에서는 희랍적인 teleios(完全)라는 사상이 없다. 기독교에도 성자를 찬양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완전한가? 그는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칠지는 몰라도 가정을 희생시키는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사람은 행동하면 어느 하나만을 위하고, 그 하나를 위하면 그 순간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한계 존재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나?

본문에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신체장애자를 치료하는가를 주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가 진퇴양난의 고비를 어떻게 타개하나 주목하며,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자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식일법을 위반하고 안식일법을 지키면 사랑의 실천을 포기하게 된다. 여기서 초점은 "율법이냐, 사랑이냐?" 즉, 이 두 요구에 상충될 때에 어느 것에로 결단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계율은 유대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이란 절대적인 권위로 사람의 복종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율법도 동시에 유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예수도 이 율법의 권위나 또 안식일에 대한 계율 자체의 권위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 어린 장애자의 병을 고쳐 주기로 결단한 것이다. 적대자들도 궁지에 몰렸다. 병든 자를 건강하게 했다는 사실을 악하다고 공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이것은 안식일 시행법을 거부한 행위다. 그러므로 저들은 음성적으로 그를 죽일 논의를 했다고 한다. 즉, 드러내놓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암살"이라는 음모로써!

안식일은 "쉰다"가 중심이다. 그러나 이 안식일의 계율은 다른 하나의 하느님의 뜻과 충돌이 된다. 유대교에서도 이것이 이미 문제 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결단에는 안식일 자체에 대한 다른 이해가 앞선 데 주목해야 한다. 그의 질문은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좋으냐, 죽이는 것이 좋으냐?"이다. 여기서도 양자택일을 말하나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유대교 하면 이렇게 질문하게 되어 있다. "안식일에 안식일 시행법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안 지키는 것이 옳으냐?"

질문은 대답을 결정한다. 예수의 사랑은 "윤리"의 차원에 묻고, 유대인은 "법"의 차원에서 묻는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안식일 이해다. 안식일은 "쉰다"가 핵심이다. 그러나 예수는 "왜 그리고 누구를 쉬라느냐?"를 묻는다. 쉬라는 것은 가혹한 노동자(짐승까지 포함해서) 들을 위한 것이다. 십계명을 보면 그 뜻은 분명하다. 혹사당하는 이에게 짐을 덜어 주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용주 따위에게는 필요 없는 계율이다. 그 까닭은 저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니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생명을 구하느냐, 죽이느냐?" 이 질문에서 예수는 안식일에 관한 계율을 파괴하고 있다. 그럼 예수는 안식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트만은 예수에게는 거룩한 무위, 중립적인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예수에게는 중간적 입장이란 없다. 선이냐 악이냐, 사람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둘 중의 하나의 위치에 서 있지, 죽이지도 살리지도, 악도 선도 행하지 않았다는 없다. "나는 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소!"라는 중립적 위치는 없다. 아니 네가 해를 받고 있는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처지에서 돕지 않았으면 너는 그에게 해를 준 것과 동일하다. 예수는 언제나 "하지 말라"에서 "하라"를 해석한다. "하지 않은 것"에 중립적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하라"에서 비로소 "하지 말라"인 본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예수는 말하고 있다.

결국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이 없어지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계율이 파괴되고 있다. "선이냐 악이냐, 죽이느냐 살리느냐?" 이것은 안식일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는 어떤 특수 장소, 어떤 특수 시간이 없다. 안식일이라서 구별된 것이 없다. 안식일에만 제한된 특수성은 없다. 예수에게는 안식일이 어떤 의미로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특수 매개물일 수 없다.

너를 위한 결단은 나의 수난의 결단을 수반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행동이 모든 각도에서 정당한가? 유대교의 율법관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던 하나의 엄연한 질서를 파괴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질서에 혼선을 빚게 하고, 그 때문에 희생을 낼 수 있는 부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것을 반영해서 오늘의 본문의 끝 절에 바리새인들이 흥분해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의논했다고 전한다. 즉, 율법에서 보면, 예수는 범법자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시했다. 즉, 구체적인 경우에, 구체적인 행위의 계율을 주지 않고 근본적인 규범을 주었다. "네가 행동한 것 또는 하려고 하는 것의 동기가 살리려는 것이 목적이냐, 죽이는 것이 목적이냐? 그 동기가 사랑이냐 증오냐? 도우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냐? 증오의 노예가 되었느냐? 네 자식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것이 목적이냐 또는 사랑하는 자를 해한 어떤 이를 복수하자는 것이 목적이냐?" 바로 이것이 유대교의 율법 대신에 예수가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행위의 기준이다.

그러나 내가 남을 돕기 위해, 사랑이 동기라고 해도 거기에서 반드시 파괴하는 것이 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것으로 자기를 정당화할 수 없다. 나는 다른 면에서 범죄한다. 희생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우리에게 없다. 살리기 위해서 범해지는 잘못은 용서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비록 사랑 때문이라고 해도 다른 질서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용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살린다"는 일을 도외시하는 질서에 대해서는 우리는 굴복할 수 없다. 여기서 수난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려는 자, 사랑은 언제나 수난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고소자가 따른다.

독어 "Leiden"은 "고난"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Ich kann Dich Leiden"이라고 한다. 글자대로 풀면, "나는 너를 위해 고난할 수 있다"가 된다. "사랑"은 실은 "고난을 동반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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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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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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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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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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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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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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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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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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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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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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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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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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