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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윤리의 기준
요한복음 8.1-11
성모랄의 혼선

현금 한국의 청년들은 성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한다. 소위 성의 자유의 물결이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그 고민은 더욱 심하다.

전에는 한 민족이나 국가가 그 자체 내의 윤리관을 확립할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그 안의 일원이 된 사람은 비록 본능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고민은 있었으나 가부간 빠르게 시비를 판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는 한 민족이나 국가가 그 자체의 입장에서 자기 교류의 가치관에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까닭은 세계와의 교류 의도와 거리가 압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약소민족이나 국가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한국 사람은 바로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한 면으로는 한국인이나 동시에 세계인이 되어 있다. 한국인 하면 그의 역사에서 형성된 전통적 모랄이 있으며 그것은 하루 이틀에 형성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 안에 사는 젊은이는 모랄의 기준을 안다. 성 모랄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이는 거기에 정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까닭은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질적인 모랄의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갈팡질팡하거나 이중적이거나 아니면 응성적인 행위에서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특히 도시의 젊은이의 경우는 극도로 동요되고 있다. 까닭은 그의 고향인 시골과 가정의 모랄에서 보면 자기는 극히 타락한 것으로 보여 콤플렉스에 걸리게 되며 반면에 간접적으로 듣고 보는 서구적인 풍조에서 자기를 보면 오히려 진부한 비겁쟁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교회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더욱 심하다. 한국 교회는 윤리적으로 엄격한 전통을 가졌다. 그런데 그중 무엇보다 성 모랄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예민했다. 그럼으로써 잘못된 유교적 폐풍에 시든 한국의 가정윤리에 많은 공헌을 했었다. 그러나 성의 자유의 흐름 속에서 고민하는 오늘의 청년들에게는 아무런 분명한 길을 보여 주지 못하고 부부 외의 성적 관계는 간음이라는 가장 무섭게 보이는 죄명을 붙인 채 율법주의자적인 자세에 임할 따름이다. 그럼으로써 교회에서 자란 젊은이는 내적으로 윤리적인 고민만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까지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성 문제에 대해 공포 속에 있거나 아니면 심한 음성적 이중생활에서 고민한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성 문제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눈앞에 두고 요한복음에 전달된 한 장면을 생각해 보자.

예수와 간음한 여인

유대 군중들이 간음한 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다. 그 여인은 유부녀였으리라. 그러므로 군중은 율법이 명하는 대로 돌로 때려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군중은 법을 집행하는 권리와 임무에서 이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 사형수를 끌고 예수에게 왔는데 그것은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게 할 도구로써 끌고 왔다. 이것은 확실히 잔인한 인간성을 폭로한다.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을 어떤 다른 목적의 도구로 삼으려는 인간성!

예수는 지금 살려라 아니면 죽여라 둘 중의 한 가지 결정을 해야 할 처지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결정도 저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된다. 죽이라고 하면 사랑을 유린한다는 규탄을 받을 것이며 살리라고 하면 간음에 관한 율법을 유린하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어느 결정도 내리지 않고 그들 앞에서 땅에 무엇인가 쓰면서 시간을 끌다가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저를 돌로 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치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 군중은 하나씩 말없이 물러가 버리고 그 여인과 예수만 남았다. 이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갔다: "여인아,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주님,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이제부터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은 우선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준다. 예수는 결국 이 여인을 그 법대로 하려는 군중에게서 옹호한 게 아니냐? 또 예수 자신도 그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 이것은 성의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네 문제에서 내 문제로

우선 이 이야기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어디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그 여인을 끌고 온 무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이다. 저들은 율법의 파수꾼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예수가 이 율법의 파괴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에 그 여인을 예수에게 끌고 왔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남을 정죄하는 것을 권리처럼 아는 바로 그런 인간들을 비판하는 데 있다. 저들은 잔인한 인간들이다. 이렇게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하고도 그 여인에 대해 연민의 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끌고 다닐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손에 손에 돌을 든 군중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론이요 주변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스캔들을 귀로 듣거나 신문 따위에서 보는 순간 가볍게 죽일 놈으로 단정해 버리는 현실에 산다. 사람들은 누가 성적 파계를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 뒤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가 지금 있는 처지에 대해서 조금의 동정도 없이 남과 함께 마치 어떤 신성한 권리행사나 하듯이 그를 매장해 버린다. 그뿐만 아니다. 남은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가정에 파탄이 왔는데 입에서 입으로 심심풀이의 자료로 삼는다. 더 나가서 그것을 이용해서 그 결과에서 그는 어떤 이익을 노린다. 오늘의 대중도 모세의 법이 적용된다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그런 사람을 죽이는 데 가담할 것이다.

그런 군중, 남을 심판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네게 죄가 없거든 그를 죽여도 좋다고 한다. "네게 죄가 없거든!" 이것은 남을 심판하는 것을 자명적인 권리로 아는 사람에게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내대는 칼이다. 이것은 남의 문제를 쉽게 규정하고 단죄함으로 처리해버리는 권리의식의 정지를 명함과 동시에 먼저 네 문제를 생각해 보라는 명령이다. 네가 남을 죽일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하기 전에 네게 한번 돌아가 봐라! 이 군중은 네 문제와 내 문제는 엄격히 구별하고 행동한다. 내 문제는 싸매두고 네 문제에만 신경이 예민한 인간! 이런 것들이 비판을 받을 것이다. 만일 저들이 잠깐이라도 남의 문제를 제 문제로 바꾸어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만일 저들이 그 여인의 자리에 자기를 놓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에 있다고 한다면 그 여인을 죽이려는 그 권리가 그렇게 자명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없으면 그를 죽여도 좋다는 말에 저들은 그 자명적인 듯한 권리를 후퇴시켜야만 했다. 사람은 지금 돌에 맞아 죽을 그 여인이 바로 자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젊은이를 규탄하는 기성의 가치관이나 여론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곧 예수를 자기편에 선 것이라고 속단해 버리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한국의 남자들은 이중적 성 모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성의 자유를 권리처럼 내세우는 젊은이의 경우에서도 같다고 한다. 즉 자신의 성 모랄과 상대방의 성 모랄을 엄격히 구분한다. 나는 자유다, 내게는 자유주의 네게는 보수주의를 적용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에게만은 관용하고 상대방에게는 돌을 드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의 개방을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신조라면 상대방(애인, 아내, 남편)에게도 그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이 안 되는가! 그러면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책임적 존재에로

예수는 이 여인을 남의 정죄에서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도 그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이미(과거) 저지른 죄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밖의 모든 고소자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는 이제 밖으로부터의 규정이나 시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끝났나, 이것은 성의 자유를 뜻하는가?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여인은 밖으로부터의 시비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그는 그 이상 남이 어쩌느냐에서 안정하거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즉 남의 손에 의해서 규정받고 처리될 처지에서 자기에게로, 제 문제를 제가 처리해야 할 처지에 돌아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체적, 책임적인 존재에로 환원된 것이다.

예수도 간음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을,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함으로 철저화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의 규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상태에서 자기의 문제로 돌려준 것이다. 음욕을 품는 것은 남이 간섭 못하는 영역이다. 그럼으로써 남이 어떻게 보느냐에서 좌우되는 상태에서 스스로 자신을 정리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어떤 대학생들과의 대담에서 성의 모랄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그것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러했다. 톨스토이나 어거스틴도 젊었을 때는 성을 마음껏 행위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먹을 권리가 있듯이 생리적인 절대요청인 관계와 사랑은 분리된다. 창기는 하나의 직업이다. 그와의 관계는 공정한 교환행위이다. 이상의 일연의 주장을 시도하는 저들은 사실상 자기 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그 주장의 정당성을 밖에서 구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물으려고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즉 그들은 자기에게서 전적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데서 온 콤플렉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밖으로부터의 판단을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엄숙히 그런 것을 자기 문제로 책임을 지려고 하면 그런 주장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권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로서 남이 그러니 나도 그래도 좋지 않느냐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나 어거스틴이 그랬다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논리는 자기 기만이다. 그렇다고 성의 자유는 물을 마시는 권리와 같다고 하는 주장도 자기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물 마시는 것과 성의 행위가 같은가? 성관계는 대인관계다. 대인관계에서 그저 동물성에 질질 끌려서 앞뒤를 못가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도 좋다는 것이 책임적인 결론인가? 정말 창기를 찾는 것은 단순한 교환행위인가? 창기도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의 물체를 돈으로 산다는 것을 젊은 지성의 양심이 허락하는가? 그는 만일에 오늘에도 인간을 돈으로 산다고 인율사상이 있다면 앞장서서 반항할 것이다. 그가 만일 생리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 여인이 그렇게 된 사회구조에 반항하며 그런 것에 희생된 그를 동정하여 그의 편에 서는 휴머니스트로 나설 것이다.

저들의 주장은 실은 주장이 아니라 고민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주장대로 당신들의 애인을 용인하겠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는 데서 볼 수 있었다. 저들은 그런 성 모랄을 상대방에게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동물성의 노예가 되어 자기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신이 허락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예수는 이 여인을 어느 누구도 정죄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책임적인 존재로 환원시킨 것이며 자기 문제는 밖에 의해서 정죄되니까 무서워가 아니라 자신이 허락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자유와 책임

그러면 내 자신이 옳다고 결정되면 어떻게 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행위를 승인하는 그 "양심"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오, 다른 하나는 한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하는 일이다.

과거에는 양심하면 어떤 오르간(organ)과도 같이 생각했다. 그래서 이 양심률은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더불어 영구불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 별도 이동하고 변하듯이 그 양심률도 변하는 것을 본 오늘에는 이 양심에 대한 불신임이 생겼다. 이로써 그 기준이 없어짐으로써 모든 가치관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본래 그러한 양심이란 없다. 양심이란 것은 고립되어서 스스로 반짝이는 어떤 율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 본문에서 그 여인은 그를 고소하는 군중들—객관적인 기준이 율법을 등에 업은—과의 관계에서 자유하므로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므로 그는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는 정말 혼자인가? 아니 그 앞에는 예수가 서 있었다. 즉 그는 자기에게로 돌아왔으나 그것은 동시에 예수와의 관계에 서 있다. 물론 예수 자신이 양심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그 여인의 양심은 그와의 관계에서 성립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그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양심으로서 양심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죄하는 자들에게서 해방시키고 스스로도 정죄하지 않는 바로 그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책임적 삶의 출전이 형성된 것이다.

민심이란 라틴어로 conscientia라고 한다. 이것은 더불어(con) 안다(scientia)는 뜻이다. 이것을 영어에서 그대로 받았고 독어는 그뜻을 따라 Ge(더불어)-wissen(안다)이라고 한다. 이것은 양심이란 관계적인 현실임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인격이라는 것을 자기가 자기와 더불어 관계를 가지므로 자기 행위를 객관화할 수도 있고 객관화된 자기에서 주체적인 자기를 비판할 수 있는 존재성을 말한다. 본능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인격임을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본능이 곧 양심일 수 없다. 그러므로 본능대로의 행위를 스스로 승인하지 않는다.

그 여인의 앞에 선 이는 어느 시대의 한 인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객관화한 나 또는 그런 능력을 상실한 자에게 다시 제 모습을 찾게 하는 능력이다. 사람은 관계를 잃은 상태에서 그 관계를 다시 지어 주는 능력의 대상을 필요로 하며 또 언제나 그런 대상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승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남을 속였는지 모르나 언제나 콤플렉스로 남아 점점 자기 상실에로의 급류에 자기를 내맡기게 된다.

다음, 사람은 사회적 존재다. 따라서 그 사회의 구조와 거기에 형성된 가치관에 제약을 받도록 되어있다. 만일 어떤 이가 그러한 사회윤리는 낡은 것이라고 단정하고 자기는 조금도 가책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분명히 그의 행위는 새로운 윤리의 선구적인 개척의 모멘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기초질서를 파괴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초질서에서 볼 때 범죄자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그 사회에서 오는 규탄을 책임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 사회가 규정한 불륜을 감행했으면 그 사회에 의해서 사죄받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결국 음성적 이중생활 속에서 또다시 자기상실의 비운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가 그 책임을 도피하면 그 어느 누구나 그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은 피할 수 없는 사정에서, 또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행위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때의 사회의 질서요 질서의 기준인 모세의 법을 파괴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무조건 용서했다. 그러면 그 사회질서를 파괴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그 여인이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결국 그를 그 시대의 분노에서 풀어놓은 이가 책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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