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떼어 놓고 생각하고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양면인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었으며 부활사건 없이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가 없었다는 의미에서만도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수 당시를 전후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메시아 운동을 일으키다가(그것은 로마 정권에게는 반란운동으로 취급됐다) 십자가에 처형됐다. 예수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유독 예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운명과 결부된 것은 부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부활은 그리스도교 사신의 핵심이며,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선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교리상으로도 그렇다. 이 점은 누구보다도 바울에게서 분명하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목격자임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예수의 부활이 새 인류, 탄생의 첫 열매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만 못지않게 십자가를 강조한다. 아니 그는 오히려 십자가의 의미에 더 초점을 둔다. 그가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하려고 하지 않으련다(고전 2, 2)고 한 선언은 유명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말하는 경우도 많은데 오직 십자가만 그리스도교의 내용의 전부처럼 선언하는 경우도 무수하다(예, 고전 1, 23; 갈 3, 1; 필립 3, 18 등등). 그 까닭은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를 모든 기존체제와 죄에서 해방한 까닭도 있다(롬 7, 6). 그러나 바울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이 계속 고백된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에 의식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고후 4, 10-11). 그것은 말만이 아니다. 그는 예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몸에 '예수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갈 6, 17). 그러한 의미에서 갈라디아 2장 20절의 뜻은 주목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왜 함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린 것만 말하고 그 그리스도가 그와 더불어 산다고 했을까! 부활한 예수가 아니고이 여기서 우리는 바울로에게서 다음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부활이 아니라 비록 부활에 의해 죽은 몸이 살아났더라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그것은 이 땅 위에 수난당하는 자들의 비명이 계속되는 한 달리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다.
(1978. 3. 『한국기독교장로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