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그리스도교회 연합회 주최로 부활절 새벽 설교를 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난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는 부활절 새벽집회인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거절했을지 모른다. 까닭은 그같은 많은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 그것도 새벽에 하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전날 대구로 향하면서도 걱정에 차서 봄의 풍경을 즐길 수 없었고, 대구에 도착해서 여 목사와 YMCA 총무의 영접으로 마련된 호텔에 들어서서도 밤에 누구도 만나지 않기로하고 준비한 내용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적다보니 새벽 3시! 5시에 예배인데, 곧 자야 두 시간 정도일 수밖에 없어 나는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시 30분에 노크소리에 놀란 것으로 보아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여 목사가 갖고 온 차에 올라 계명대 노천 집회장에 도달하니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모든 택시들이 다 동원된 듯 전부 그리로 몰리고 모든 경찰이 다 동원된 듯 싶었다. 밴드가 동원되고 계대합창단, 사람은 입추의 여지없이 계속 몰려들었다. 이 새벽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부활절을 함께 지키기 위해 모여드는 그 모습에 내 가슴은 뭉클했다. 원고에 적힌 대로 한 내 설교를 나는 스스로 평가할 수 없었다. 그 곳이 노천이라 본의 아니게 억양이 높았다는 것과 게다가 지독히 든 감기 때문에 발성이 제대로 안 되서 미안하다는 생각만 남았다. 오랜만에 이 많은 군중과 부활절을 함께 지킨 것은 내게 큰 감격이었고 끝나자 연단에 찾아와 손을 잡은 많은 잊었던 얼굴들을 만난 감격도 컸다.
주일 낮 예배는 여 목사가 담당한 동인교회에서 설교를 맡았다. 거기서 존경하는 강정애 장로를 만날 수 있어 기뻤고, 그 교회 건물 이 아담하게 새로 지어진 것을 보고 내 일을 보는 듯 기뺐으며, 예배 후 4, 50명의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좌담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오후 4시 30분 차를 탈 때까지 나는 피곤을 잊었고, 저들의 뜨거운 환송에 감사했다. 지난 밤 못 잔 잠을 버스 안에서 보충해야 했으니 몸은 피곤했으나 행복했다.
(1975. 4. 『현존』)